수집왕③-역사문화박물관 권영호 관장
수집왕③-역사문화박물관 권영호 관장
  • 김은경(안동인터넷뉴스 기자)
  • 승인 2020.09.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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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에 대한 바보 같은 사랑

옛것에 대한 바보 같은 사랑

-역사문화박물관 권영호 관장-

안동시 풍천면에 자리한 폐교된 풍서초등학교를 리모델링 해 역사문화박물관을 개관한 권영호(69) 관장. 한 개인이 40여 년 간 옛 문헌과 유물에 관심을 갖고 수집하다보니 어느덧 그 양이 수만 점에 이르게 됐다. 많은 사람과 이를 공유하기 위해 사설박물관까지 개관 한 것은 보통의 사명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학자들에게는 연구자료로, 청소년들에게는 교육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그는 가장 안동다운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교실을 전시실과 수장고로 리모델링해 각종 고문서류와 전적류, 민속자료, 근·현대 자료, 초등 교육자료 등의 1만여 점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다. 1960~1980년대에 주로 사용했던 검정고무신과 공중전화 등 생활용품은 물론 일제강점기, 조선시대 등에서 사용됐던 다양한 유물들도 전시돼 있다.

특히 중요 소장품인 조선 시대에 편찬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정고본, 1300년대 간행 된 것으로 추정되는 《배자예부운략(자전)》, 원종대왕과 숙종의 글씨를 자본으로 한 동활자본 《어필맹자대문》은 지역에서 유일하게 역사문화박물관에서만 소장하고 있는 희귀본이다. 수집품 전체의 경제적인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 물어보니 그도 얼마인지 잘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친척이나 지인들에게 이거 팔아서 식구들 고생 덜 시키고 집이라도 하나 사지, 바보 같은 짓을 한다는 이야길 많이 들었어요. 부끄럽지만 내일 모래 일흔 살이 다 돼가면서도 이 지구상에 손바닥만 한 내 땅 한 평 없어요. 그래도 좋은 집 가진 사람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어떤 때는 그 분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화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풍서초등학교를 리모텔링 해 역사문화박물관을 개관한 권영호 관장
풍서초등학교를 리모텔링 해 역사문화박물관을 개관한 권영호 관장(ⓒ권기환)

조상 유물 보따리를 갖고 온 젊은이와의 만남
그가 수집을 시작하게 된 것은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한 것이 큰 원동력이 됐다. 안동이라는 역사적인 고장에서 자란 영향도 컸다. 그리고 본격 수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 일화가 있다. 1988년 표구사를 운영하던 그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조상 유물을 한보따리 가지고 와서 이것도 사느냐고 물었다.

“펼쳐보니 보따리엔 한 선비가 처음 진사 때부터 대과급제할 때까지의 자료 일습이 완벽하게 다 있는 거예요. 당시 금액도 기억 안 나는데 돈을 지불하고 샀어요. 그리고 며칠 뒤 그 젊은이가 갖고 온 게 태종 공정대왕 친필이 '초선대'라고 하는 큰 글씨로 있고. 효령대군 친필이 대필(大筆)로 쓴 게 스물 넉자가 있었어요. 거기에다 우리 안동의 조선 말경 대학자들이 보증을 해놓은 서류도 같이 있었어요. 내용은 임진왜란 때, 효령대군 5세손 이 포 2첩을 끌어안고 영남으로 피난 와 예안의 큰 강을 건너서 '어필각(御筆閣)'을 짓고 그곳에 유물을 보관한 거예요. 그건 도저히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서 제가 나무랐죠.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도 당신 집의 가보이자 보물인데 이걸 팔려고 하느냐.” 했더니 돌아서서 “나는 필요 없는데…….” 하고 나가버렸어요.” 아차, 싶어서 그는 다시 젊은이를 불러 세웠다.

“그때 저는 미래에 박물관을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기증하라고. 대신 힘껏 사례 하겠다 했는데 그 사람은 돈이 급했어요. 당시 지역에 돈 있는 몇몇 어른들을 찾아가서 사정을 하며 이 서류를 사두시라고 부탁했는데 결국은 안 샀죠. 지금은 돌아가신 원로 서예가 김신용 선생을 찾아가 이 귀한 서류가 개인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고 서울에 '(사)청권사'라고 하는 효령대군 사업회로 돌리려고 올라가시게 했는데 얘기가 잘 안됐어요. 결국 그 후손은 돈이 급하니까 얼마 받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한테 넘겨버렸어요. 그때 일이 지금까지도 한스러워요. 그걸 계기로 우리 지역 문화재는 가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나라도 더 열심히 수집해야겠다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됐죠.”

조선과거제 한눈에 보는 선비의 일습자료가 안동에 남기까지
1만 여점의 수집품 중 그는 경제적 가치를 떠나 퇴계 선생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과 선비의 일습자료를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자료로 꼽았다. “퇴계선생 호당수계록은 계문서예요. 호당은 독서당을 말해요. 조선시대에 머리 좋은 젊은 관리 들중에서 뽑아서 인재양성 차원에서 연수를 보내는 제도인데, 거기에 들어간 동문들의 계문서인 거죠. 거기 보면 퇴계 선생의 호가 그 당시엔 '지산芝山'이었어요. 호당수계록에 그렇게 써 있죠. '퇴계'는 그 뒤에 사용된 호죠. ”또 조선시대 과거제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선비의 일습자료도 지역에서 그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소장품이다.

기막힌 사연도 있다. 영주시에서 선비촌을 만들 무렵이었다. 선비 일습 자료를 가진 이가 안동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시 조창현 영주시 부시장이 그를 찾아와 자료를 팔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이 자료는 안동 선비의 것이고 저 또한 박물관 계획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돈과 관계없이 팔 수 없다고 말씀 드렸죠.” 하지만 두 번, 세 번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을 갖고 다시 그를 찾아왔지만 같은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바보 같은 안동 양반에게 항복한 조 부시장은 이런 제안을 했다고. “더 이상 달라는 얘기를 안 할테니 우리 친구나 됩시다.”

그 제안은 한번에 수락했다. 지금까지도 좋은 우정을 이어오게 된 계기다. 그렇게 지켜낸 선비의 일습자료는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이 개관할 당시에 무상으로 빌려줄 수 있었다. 안동도 많은 문중유물들 중에 서도 선비의 일습자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 2017년 유교문화박물관은 그가 개인박물관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는 돌려드려야 할 때라고 생각돼 그에게 반납했다. 그가 단 한번이라도 흔들렸다면 안동에선 만날 수 없는 자료였을 것이다. 현재 그의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선비 일습자료는 한 수집가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도 함께 품고있다.

그가 수집한 다양한 종류의 자료들
그가 수집한 다양한 종류의 자료들(ⓒ권기환)

우리나라 최초 백과사전 등 희귀소장품
그에게 중요 소장품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해달라고 말했다. 《대동운부군옥》은 권문해가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초고본이 보물 878호로 지정돼 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정고본. “이 책은 문헌상으로는 지구상에 없는 걸로 돼 있어요. 지금 원본이 없어요. 현재 초고본이 보물 878호로 지정돼 있는데 이건 정고본이니까 훨씬 더 의미가 있죠. 정고본은 출판을 위해 완벽하게 다듬어진 책을 말해요. 왜 문헌상에 없다고 말하냐면 《서지학개론》에 보면 이 책을 한강 정구 선생이 한 벌 가지고 가서 불이나 없어졌다고 기록돼 있어요. 지금 이 정고본은 학봉 김성일 선생이 가져온 거라고 봅니다.

제가 왜 학봉 선생이 가져온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냐하면 마지막 소장자가 울진 평해에 황여일 선생이었기 때문이에요. 황여일 선생은 학봉의 형님이신 귀봉 김수일 선생의 사위였어요. 그러니 추리가 딱 맞아떨어지는 거예요. 학봉 선생이 출판을 하기 위해 가지고 내려오신 건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진주성 전투에서 돌아가셨잖아요. 집에 진귀한 책 있으니 형님 귀봉 선생이 갖다 보셨을 것이고, 사위 황여일 선생이 처가에 왔다가 귀중한 책이 있으니까 좀 보겠다고 가져가서 안 돌려준 거라고 유추해볼 수 있는 거예요.”

그가 소장하고 있는 《어필맹자대문》도 매우 귀한 자료다. 맹자의 글 중에 핵심 원문만 실린 책으로 서지학을 수십 년 공부한 대부분의 사람도 구경하기 어렵다고. “우리가 서지학 연구하는데 있어선 누구의 글씨를 자본으로 해서 활자를 만들었느냐가 상당히 중요해요. 이건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대왕의 글씨를 자본으로 활자를 만들고 발문은 숙종대왕의 글씨를 활자로 주조해 찍은 희귀본이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불과 몇 부 안 찍은 책이다보니 그 희소성이 엄청난 거죠. 대왕이 쓴 걸로 활자를 만들었으니 더욱 의미가 있어요.”

이러한 희귀본을 소장하게 된 것은 수집에 대한 사명감과 인생 전부를 올인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대동 운부군옥》과 한 전시대에 전시된 《배자예부운략》 은 시부를 지을 때 운을 찾기 위해 만든 자전으로 서기 1300년 간행된 고려본이다. 조선후기 1679년에 판각한 책판이 보물로 지정돼 현재 국학진흥원에 보관중인데, 그가 소장한 고려본은 이보다 앞선 것이다.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이 오면 이 책을 가지고 왜 책이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해줘요. 책이라는 건 곧 학문과 연결되고, 우수한 문화민족과 연결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자부심 가져라고 말하거든요. 고본은 300년 이상 된 것을 고본이라고 하고,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고본 중에서 도 큰 의미를 더 부여합니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 것이냐, 후 것이냐에 따라 의미도 엄청나게 달라지거든요. 우리 안동이 고서 중에서도 '고본의 보고'가 안동이 었어요. 지금은 안타깝게도 거의 다 빠져나가버리고 남아있는 오래된 고본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인터뷰 중 그가 풀어낸 고문서 수집 과정의 이야기부터 그 의미와 담긴 가치는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지면에 다 담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역사문화박물관에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숱한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옛 물건 들에게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건네고 싶어진다.

수집의 꽃을 피우다
여기까지 오는데 녹록하지 않았다는 권 관장. 그의 박 물관에는 아내와 딸이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 일궈나가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돈이 많아서 수집을 하는것으로 오해하기도 했고, 물려받은 유산이 많은 줄 착각하기도 했다. 특히 가장 서글플 때는 사설박물관의 실정을 하나도 모르는 채 박물관을 돈벌이로 착각하는 뉘앙스가 담긴 말을 들을 때였다고 한다. 가끔씩은 그 좋은 조건을 다 뿌리친 것에 대해 후회가 될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근데 그 후회는 잠깐이었고 새롭게 박물관을 시작 했으니 다시 여기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는 현재 한국고미술협회 경북 지회장을 맡고 있고, 한국고서협회 회원이면서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3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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