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④〉-영원한 한국인 두봉 주교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④〉-영원한 한국인 두봉 주교
  • 강병규(안동MBC PD)
  • 승인 2020.09.0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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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한국인' 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때는 한국 사람보다 더 우리사회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통렬하게 비판하는
외국인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때도 있다.
1954년 12월 19일, 전쟁이 휴전으로 접어들고 반년 남짓 지났을 때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된 두봉 주교.
60년을 넘게 한국에 살면서 이제는 태어난 프랑스보다 한국을 '우리나라' 라고 부르는 가톨릭 사제.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습조차 너무나 자연스러운 한국인이며
불의를 참지 못하고 무엇보다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는 그다.
2019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은 천주교 안동교구의 산증인이기도 한 두봉 주교님을 만났다.
인터뷰는 2018년에 진행했습니다.

집 앞에 가꿔놓은 텃밭이 너무 깨끗합니다. 그냥 저기만 매일매일 가꾸는 분처럼 어떻게 저렇게 정갈하고 예쁘게 해 놓으셨어요?
아니에요. 뭐 많아야 하루에 한 시간, 그거 밖에 안 합니다. 풀이 나오면 조금씩 뽑다보니 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구마도 얼마 안 있으면 캐야 될 것 같고, 지금은 고추를 많이 따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추는 매일 조금씩 먹어요.

직접 농사 지어 드시는 거네요?
네. 그것이 제 취미에요. 원래 프랑스에서도 농사짓는 집에서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모르는 사이에 저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고 그리고 농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좋아해요. 작물 기르는 것을요.

의성 봉양문화마을에는 언제부터 살게 되셨습니까? 가톨릭 신자 들도 많이 있습니까?
정확하게는 2004년도 11월 달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이죠. 어느새 벌써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네요. 여기는 본래 가톨릭 신자가 몇 명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데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내가 신부가 됐다고 해서 사제라서 꼭 교도들하고만 살아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난 누구하고든지 어울리고 싶은 그런 생각이 있어서 여기서 그냥 살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하고 잘 지냅니다. 이 동네 사람 들이 참 순수해요. 여기가 문화마을이거든요, 문화마을 이라는 데가 본래 환경이 좋은 데를 만든 거 아니겠습니까. 환경이 좋아서 그런 건지 분위기가 괜찮아요. 좋아요. 좋은 마음입니다. 동네 사람들 중에 안 통하는 사람들 없고 어색하다든지 그런 것도 전혀 없어요. 잘 지냅니다. 동네 사람들을 종종 만나는데, 일상생활에서 만나기도 하 고 동네 사람들이 어디 놀러 간다든지 하면 웬만하면 저도 같이 놀러 다닙니다.

이렇게 정정하신 비결이 따로 있습니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 요?
아휴, 묻지 마세요. 부끄러워서요. 한국나이로 구십이에요. 뭐 비결은 없지요. 그냥 이렇게 사는 대로 살다보니까 어느새 모르는 사이에 나이를 많이 갖게 되었을 뿐이지. 뭐 병에 걸리는 사람이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건강하고 싶어서 건강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난 하늘에서 주시는 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그냥 축복이라고, 은총, 뭐 하늘에서 좋게 해주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

여기만 계시는 게 아니고 밖으로도 많이 다니시는 것 같아요. 외부 에서도 일이 많으십니까?
네,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날엔 처음 참석하는 포항에 서의 부부모임이 있었는데 한 50쌍, 그러니까 100명 모였어요. 부부가 되면 단 둘이 있는 그런 시간이나 자리가 따로 없잖아요. 금요일 오후부터 주일 오후까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었어요. 주제가 '함께'였어요. 그래서 평소 함께 잘 하지 못하는 점, 그리고 함께 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서로 얘기 나누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저는 결혼을 해본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면담이라고 할까요. 바빴어요. 뭐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한테 찾아와 가지고 부부가 함께 오는 경우가 있었고, 따로 오는 경우도 있었어요. 저 같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얼마나 많이 찾아왔는지 몰라요. 무척 바빴어요. 그런데 저도 무척 좋았어요. 아, 부부들에게 그런 시간이 참 필요 하다, 했어요. 다음 주일날에는 춘천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강원도 북쪽은 춘천교구인데. 금년에 평신도 희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의 해'라고 볼 수가 있죠. 거기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 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저보고 강의를 해달라고 해요.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을 부르는 것이겠죠, 나이 많은 사람인데 아직도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같아, 참 좋습니다.

두봉 주교 인터뷰ⓒ강병규

은퇴하실 연세가 이미 지났는데 이 한국에, 이 경상도에 계속 남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까 나이가 구십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태어난 나라 프랑스에서는 조금밖에 살지 못했어요. 거기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3년 동안 로마에서 했죠, 군 생활을 1년 동안 독일에서 했고, 제가 태어난 나라에서 20년 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60년 이상 살았기 때문에 여긴 뭐 '우리나라'라고 부르고요. 그리고 참 아주 마음 놓고 기분 좋게 살 수가 있거든요. 종종 저 쪽으로 가면 오히려 외국 같아요.

주교님은 프랑스 이름도 있었을텐데 어떻게 '두봉'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게 되셨나요?
성은 뒤퐁이에요. 한국말로 발음하기가 어려우니까 제가 한국에 왔을 때 이미 프랑스 '두 신부'님이 계셨어요. 그때 주교님은 원 주교님이셨는데 두 신부가 떠났기 때문에 나보고 원래 성하고 비슷한 그런 점이 있다고 해서 두 신부라고 부르자고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두 신부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본당 신부님이 이름이 있어야 되겠다고 하셔서 생각을 했지요. 중국에 시인 두보가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막을 '두' 자인데. 두견새 할 때도 쓰는 '두' 자거든요 그래서 두보 비슷한 두봉. 그러면 제 이름이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 그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냥 일방 적으로 그렇게 불렀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두 신부에 얽힌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말씀 드릴까요? 전에 한국에서 선교했던 신부가 두 신부였고 나도 두 신부였는데 제가 안동교구장이 되었어요. 서해 바다 쪽의 공세리라는 마을에 살던 두신부가 거기 본당 신부로 계셨거든요. 그 마을의 어느 할아버지가 두 신부가 안동교구장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착각을 했어요. 자기가 알던 두 신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옛날 충남에 살았던 두 신부가 아니냐?' 제가 그렇다고 답을 해줬거든요. 그 다음 편지에 옛날 두 신부 사진을 보내줬어요. 그래서 보니까 아차, 했지요. 나하고 옛날 두 신부하고 혼동하는가 보다 싶었어요. 그래서 우스워죽겠는데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에게 '난 옛날 그 두 신 부가 아니다'고 얘기를 하면 좀 섭섭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사진을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다음 편지는 언젠가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썼더라고요. 만나면 탄로 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오시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안동에 오셨는데 나보고 “아휴, 신부님이 수염을 깎으시고 굉장히 젊게 보이신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그때도 제가 옛날 그 두 신부 아니라고 얘기를 안 했어요. 이야기를 섭섭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식사 대접도 하고 고맙다고 하면서 잘 보내드렸는데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에서 얼마나 웃을 거예요. 많이 웃었을 거예요. 나도 많이 웃었죠.

한자로 풀이한 주교님의 두봉이란 이름이 굉장히 좋은 뜻이네요.
그렇지요? 그래서 나중에 많은 분한테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참 이름이 좋다고. 전 원래 몰랐거든요. 근데 모르는 사람들은 '드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뭐 화장품 드봉 때문에 그런가. 그래서 화장품 이름으로 저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허허.

고향, 태어나신 곳에 20년 정도 계셨다고 했잖아요. 지금도 혹시 그 고향의 모습이 생각나십니까?
몇 번 왔다 갔다 했고. 글쎄, 거기는 우리나라만큼 변화가 그렇게 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은 굉장한 변화가 있었는데 저쪽은 뭐 집이라든지 도로라든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큰 차이가 없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제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은 엄마가 태어난 집입니다. 그러니까 그 집이 150년? 상상도 못하죠. 그렇게 큰 집도 아닌데. 그런데 아주 튼튼하게 돌로 만들어 놓은 집이기 때문에 까딱 하나 안 합니다

프랑스의 어느 지방이에요?
오를레앙이라고 파리에서 거리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뭐 중간 도시죠. 30만 정도 되는.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파리에서 근무를 해요. 한 시간 밖에 안 걸리거든요. 그런데 농촌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집은 그 도시의 아주 가까운 변두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 다닐 적에는 늘 걸어서 집에서 왔다 갔다 했어요. 그리고 땅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었어요. 옛날에 주로 채소농사를 했는데, 아주 옛날에 장날이면 우리 엄마가 생산한 물건을 팔기 위해서 장터에 왔다 갔다 하고 나도 엄마를 거기서 만나서 도와드리고 그랬어요. 우리 집은 그냥 어려운 집이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일을 했었거든요. 저는 신부 되고 싶다고 해서 그냥 중학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만 제 형제자매들은 다 그랬어요. 우리 5남매인데다가 사촌동생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애들이 일곱이었거든요. 나만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다음엔 장학금 탔기 때문에 뭐 부모님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는 않았죠.

프랑스가 1차 대전 무렵에는 세계중심지와 같은 그런 나라였지 않습니까. 그때 프랑스 가톨릭은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회 활동을 했었는데 외방선교회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지원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들어갈 수가 있는 곳입니다. 당시 공식 이름이 '파리외방전교회'라고 부릅니다. 요새 이런 단체를 선교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만, 옛날에 불렀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아요. 원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교육을 받고 그리고 발령을 냅니다. 전통이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나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성격, 지식, 건강이라든가 그리고 여러 나라의 필요성을 봐서 판단을 합니다. 제가 발령 받은 것이 정확하게 1953년 6월이었거든요. 근데, 휴전이 1953년 7월 27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긴 정식적으로 아직 정전되기 전이었는데, 대개 전쟁이 있는 나라에 사람을 안 보내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국으로 발령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만나보니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아주 좋았어요. 한국이 그때 전쟁이 끝나고 세상 에서 가장 어려운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나라로 가는 게 참 좋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오시기 전에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좀 아셨습니까?
많이 알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군 생활을 했을 때 6.25가 났어요. 그리고 기억이 잘 납니다. 우리보고 프랑스에 서 파병을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지원하는 사람이 있으 면 지원해보라고, 그래서 같이 지냈던 애들 중에 하나는 고아였는데 나하고 정말 잘 통했어요. 그 친구가 한국전쟁에 지원을 해서 한국에 와서 여기서 죽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어요.

외방전교회라는 것은 지원을 해야 된다고 하셨잖아요. 파견이야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주교님은 왜 지원하셨어요? 그냥 프랑스에 계시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참 재밌는 얘기입니다. 왜 그러냐면, 제가 선교사 될 생각을 전혀 안 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난 신부가 되고 싶었죠. 삼촌이 신부여서 영향을 받았는지 신부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거든요. 교구신부, 그냥 신부로 살고 싶었던 사람인데 '노동사제라는 말을 들으신 적 있어요?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에 대해서 거부감 을 느끼는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몇몇 친구들이 일반 사람들처럼 그냥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남들처럼 그냥 밥벌이를 하고 주말에 이렇게 종교생활을 하던 신부가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돼야 되지 않겠는가 싶었어요. 그건 제 마음에 쏙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학장 신부님이 안 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있었는데, 아직 입대할 시간도 있었구요. 저처럼 살던 사람들 중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생이 하나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그럴 수가 있지 않겠는가, 노동사제가 안 된다면 그렇게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결정을 하지는 못했어요. 학장신부님이 받아들이실지 안 받아들이실지 몰라서요. 그래서 제대하면서 학장신부님을 찾아갔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해외선교사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됐다, 좋다,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 제가 아직 결정을 짓기 전이었는데 그 분이 결정해 버렸어요. 그래서 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저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를 했어요. 하늘에서 그렇게 저를 이끌어 준거죠, 뭐.

어려운 나라에, 특히나 전쟁이 무서운 거잖아요. 그런 나라에 가라고 하는데도 그렇게 기뻤던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제가 어릴 적부터 성당에 다녔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이왕이면 좋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좋게 산다는 것이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구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남들에게 뭐든지 도움 주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부모님으로부터 배웠어요. 그래서 내가 많이 얻어야, 많이 받아야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남들에게 행복을 주고, 남들에게 도움을 주면 나도 반사적으로 행복 하리라는 그런 사고방식, 그건 아마 우리 부모님이 가톨릭 신자여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내가 어릴 적부터 아주 확실히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어려운 나라 간다는 거 축복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참, 우리 동료 중에 일본 발령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땐 이미 일본이 잘 살았거든요. 아휴, 그런 데서 어쩔까, 가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보면 어떤 부모라도 자기 자식들한테 '착하게 살아라, 남들 도와가며 살아라, 그리고 나쁜 짓 하지 마라'라고 얘기를 하지 반대로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 집은 5남매였어요. 사촌동생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러면 그 형제들이 얼마든지 돌봐줄 수가 있는데 우리 부모님은 어려운 사람 도와줘야 되겠다, 그래서 우리 집 으로 사촌동생들을 불렀거든요. 제 친동생도 애들이 넷 이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큰 지진이 있고 어려움이 있 었다는 중미의 아이티공화국, 거기에 어려운 애들이 많이 있다고 그러면서 거기 아이를 입양시켰어요. 그런것은 억지로 그렇게 하는 건 아니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되 지 않겠는가 싶은 거죠. 남을 위해서 잘 나서는 사람들이 느끼는 묘한 행복감이죠.

주교님의 한국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요즘처럼 비행이 이렇게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여정이 짧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두 달 반 걸렸습니다. 왜 그러냐면 그 당시에 일본까지 가기는 쉬웠습니다. 한 달 정도 걸렸거든요. 지중해를 건너 가지고 그 다음에 스리랑카, 싱가포르, 베트남의 사이공, 홍콩까지 들르면 한달 정도 걸렸습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내려 그 다음에 한국에 가려고 생각을 했는데 전쟁 직후여서 그랬는지 배가 없었어요. 그래서 수주일 동안 알아봤더니 나중에 어느 화물선이 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접촉을 해서 좀 태워달라고 그랬더니 그렇게 해주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요코하마에서 인천까지 또 3주나 결렸어요. 왜 그러냐면 뭐 짐 중심이었나봐요. 일본을 떠나 먼저 한국에 와 제가 첫 번째 발을 디딘 곳이 마산입니다. 그래서 마산에 물건을 싣고 풀고, 그 다음 부산 갔다가 다시 요코하마로 갔다가 오키 나와에서 인천으로 들어갔죠, 이상했어요. 그렇게 3주나 걸렸습니다. 그래서 합쳐서 두 달 반이 걸렸죠.

그러면 마산은 잠깐 들렀을 뿐이고 정말 한국에 오신 것은 인천이 네요. 그때가 언제입니까?
1954년 12월 19일이었습니다. 제가 부름 받은 다음에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가 덜 끝났어요. 그래서 신부된 다음에 계속 1년 동안 공부를 더하고 다음 해에 한국에 왔어요. 그때 당시 서울은 아주 비참했죠. 처음에는 좀 불편했지요 솔직히. 음식이 다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빵을 많이 먹었었는데 한국에서 밥을 많이 먹어야 했어요. 그리고 반찬도 김치였고. 조금씩 먹기 시작을 했는데 이제 와서는 전혀 뭐 문제가 없죠. 오히려 지금은 외국 나가면 2, 3일 동안은 괜찮은데 며칠 지난 다음에는 뭔가 매운 것 좀 먹어야 돼요.

정말 한국 사람이 맞네요. 그러면 처음 부임하신 곳이 어디셨습니까?
대전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서너 달 있었을 뿐이고. 사실 그때 한국말 배우기 시작했다고 봐야 되겠어요. 학교도 없었고 가르칠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애들이 쓰던 국어 1 학년 1학기 바둑아 이리와, 이런 책을 보고 했는데 아주 배우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그나마 공부할 수 있는 데가 대전이었습니다. 그때 본당 신부님은 한국 신부님이 셨고 그분이 소개해 준 대학생이 있었어요. 근데 그 대학 생이 불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매일 만났습니다. 그렇게 내가 불어 가르치고 그 사람이 나한테 한국말을 가르치고 일 대 일로 배웠어요, 우리말을.

대전에 처음 가셨던 게 대흥동 성당인가요?
네. 대흥동 성당에 10년 이상 있었어요. 본당신부님은 오기선 요셉 신부님이셨고 10년 동안 본당 신부님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나도 말을 잘 모르니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었죠. 그분이 강론을 얼마나 잘하셨는지 몰라요. 6.25 얼마 후였기 때문에 성당 안에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교구청에서 심부름 왔다 갔다 하고 그랬는데 몇 년 지난 다음부터는 교구청에 다른 신부가 없었어요. 오 주교님 혼자 있었어요. 그래서 보필하는 일거리가 좀 있었거든요. 오 신부님이 겸해서 교구청 일을 많이 하시고 그리고 제가 가면 갈수록 본당의 일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혹시 가톨릭 노동청년회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톨릭은 천주교를 말하는 거고 노동청년이라하면 대학 안 다니는 청년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대학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뭐, 저도 대학생 들을 전혀 안 만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좀 와달라고 해서 충남대학에서 강의를 했어요. 그렇게 본당에 가톨릭 노동청년회를 만들게 되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굉장히 좋았고 일하고 싶었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남을 위해서 좋은일을 해야 되겠다고 굉장히 적극적이었거든요. 그 일을 하다보니까 가는 길에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선화교였어요. 그 다리 밑에서 사는 애들이 많이 있었어요. 거기에 왕초라고 부르죠? 청년이 거기서 살고 있었고 그리고 똘마니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어떤 면으로 보면 왕초의 도움을 받고 있었어요. 왕초는 애들이 구걸한 것으로 먹고 살았구요. 그래서 우리 세 청년은 그 왕초를 접촉해서 우리도 같이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왕초가 받아 주더만요. 그때는 사람이 서로 잘 도와주는 그런 때였거든요. 그래서 거기 살면서 아이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어요. 대다수가 집에서 가출한 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이 그 아이들의 집을 알아보고 부모님들을 만나서 아들을 찾아와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중간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40명 중에 30명 정도 집으로 보냈어요. 그리고 남았던 10명은 고아원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어요. 그래서 다리 밑에 애들이 없어졌죠. 참 아주 그 청년들이 그런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저도 신났죠.

가톨릭 노동청년회는 주로 그런 일을 했었나요?
주로 그런 일은 아니었고 그때 대전에는 방직 계통의 회사가 많았어요. 대다수가 거기 다니고 있었어요. 노동청년회의 본래 목적이 공장 다니는 애들을 도와주자는 거 였어요. 참 좋은 조직이었죠. 그런 일들을 했어요. 그 이 후에 한국에 있는 파리외방선교회 지부장이 되었어요. 그런 일을 1년 동안 하다가 안동교구가 생겼어요. 그래서 안동교구장이 됐어요.

한국에 오신지 얼마 만에 안동으로 오신 건가요?
제가 한국에 54년에 왔고 안동에 온 것이 69년도였으니까 15년 후에 왔네요 안동에. 교황청에서 교황님이 결정 하시는 건데요. 나중에 제가 교황청에서 교황대사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안동교구가 생긴 것도 두봉 신부가 주교가 되었다는 본분을 받으라는 것이었는데 그때 내가 거절을 했었거든요. 왜 그러냐면 한국에선 주교가 한국 사람이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주교 서품을 받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그런 이유였어요. 그런데 교황님이 결정하신 것이 한국 주교단에서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한국 사람이 주교를 해야 된다는 것은 두 신부 개인 생각이지 주교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교 서품을 받게 되었어요. 그것도 제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었죠.

안동교구장으로 부임을 받아 오셨던 그때 안동은 어땠습니까?
그때는 목성동 성당 밑에 바오로 딸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서점 거기가 교구청이었습니다. 본래 파리외방전도회 집이었어요. 거기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제가 무슨 계획이 있었다든가 무슨 목표가 있었다든가 전혀 그런 게 없었거든요. 빈손으로 그냥 빈 마음으로 사실 순수하게 그러면서 '어디 좀 해보자'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뭐 조금 어려움이 있긴 있었죠.
그때 안동은 지금보다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예의를 많이 가르쳤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많이 가르쳤죠. 인성교육이 지금보다 더 뚜렷했습니다. 학교는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교육을 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상지대학이 되었습니다만 제가 안동에 와보니까 외국 수녀님들이 와서 여자고등학교를 시작해야 되겠다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법적으로는 학교를 운영 하려고 하면 재단 법인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와서 학교재단법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국적으로 전문학교는 최초였죠. 고등학교 졸업한 다음에 2년 동안 직업을 가르치는 그런 학교였습니다. 상주 함창에 옛날 독일 신부님이 운영하는 학교가 있었는데 거기도 졸업장을 주지 못하는 학교였어요. 그래서 제가 만든 재단이 상지 대학과 함창의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거예요.

주교님이 50년 전에 안동에 오셨을 때 다른 선교사분들도 적응을 잘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는 세계 모든 주교들의 모임을 공의회라고 부릅니다. 바티칸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였기 때문에 제 2바티칸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강조하는 것이 토착화였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정말 그 나라의 문화를 인정해주고 맞게 하라는 거였죠. 그때까지도 신부들이 미사를 올릴 때 라틴어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착화 일환으로 일단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말로 이렇게 미사를 올릴 수 있도록 했어요. 근데 신부들이 주로 외국인이었거든요, 자신이 없었어요. 자기네들이 그냥 뭐 토착화 그러면 한국사람 되어야 한다는 거라고 볼 수가 있는 건데 외국 사람의 사고라든가 습관이 그렇게 되기 어려웠죠. 그때까지는 라틴어로 미사를 올렸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한국말로 진행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맞게 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신부들이 자신이 없어 했어요. 그래서 19개 본당 중 한두 해 안에 일곱 분이 떠났어요. 그래서 참 어려웠어요. 신부들이 전부 다 도망가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아휴, 안 되겠다고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 개인 피정을 했는데 결론이 그 신부들에게 도 문제가 있었지만은 나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 했어요. 내가 너무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리고 나가려고 하는 신부를 붙잡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떠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에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만사를 하나님의 손에 깨끗하게 내놓고 편안하게 살아보자 했어요. 또 '기도를 많이 해야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사를 올리고 하는 기도 외에 하루에 한 시간 개인 기도를 해야 되겠다는 그런 결심을 하고 많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후 외국에 서의 피정이 끝나고 돌아온 다음부터는 떠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것조차도 나에게 달려 있었더라는 거를 반증하는 거였죠.

지금도 경상북도 안동 지역은 농촌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까 주교님도 말씀하셨지만 어렸을 때부터 농사, 농부, 농민 이런 것에 굉장히 익숙하다고 하셨잖아요. 그것이 주교님과 농촌, 농민을 떼어 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네, 뭔가 통하는 것이 있었어요. 저는 농촌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때는 가톨릭 농민회 관련해 큰 일이 있었지요. 뭐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그때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그분이 많은 일을 했어요. 그런데 안동교구 생기고 저격당한 것이 79년도였습니다. 그때 안동 역시 굉장히 긴장되었었거든요. 여기저기 터지는 문제가 많이 있었고 가톨릭농민회가 정부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농민들이 자기들에게 유리 한 여러 가지 제안을 했는데, 저쪽(정부)에서 그것을 못마 땅하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농촌사람들이 대도시로 빠져 나와서 공장 생활해야 되겠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적인 방향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는 농민회를 싫어했어요. 그래서 뭐 문제가 하나 있었죠. 오원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오원춘 사건이 났었죠. 그 사건 때도 주교님이 큰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 제가 가톨릭 농민회를 뒷받침 했습니다. 힘을 주었습니다. 박수를 주었습니다. 사실 별 문제가 아니었어요. 오원춘은 농민이거든요. 그해는 비가 안 왔었기 때문에 가을에 심을 수 있도록 농협에서 감자를 주었는데 그 감자가 씨가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들 감자농사를 실패했어요. 그래서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보상을 받았는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오원춘이 안동교구 간부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전국모임에서 그 일을 발표했어요. 그러면서 농민들이 당하면 가만있지 말고 요구를 하라고 했는 데 정부에서 그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더니 납치를 하고 고문을 했어요. 그 이후에 오원춘 이 양심선언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항의를 했죠. 저희가 그렇게 당하는데도 가만히 있다고 그러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당할 것 같아서 그건 두고 보면 안 되겠다고 그래서 이쪽저쪽에서 기도회를 하고 농성, 촛불시위를 했었지요. 그래서 정부로부터 또 미움을 많이 받았어요. 긴급조치 9호를 이유로 모든 간부들이 다 체포당했고 그리고 두봉 주교 추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아주 참 굉장한 문제가 되었죠.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후원도 하고 든든한 지원을 해주시고 하셨나요?
그 농민들을 누군가 도와줘야지, 고문을 당하고 납치를 당해도 그냥 눈을 감는다면 양심상 그건 안 되잖아요. 누가 나서야 되는 거예요. 사실 그 당시에 그렇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 신부들은 그냥 뭐 가정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가 그럴 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항의를 했죠. 그런데 추방명령이 떨어졌죠.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주교는 교황님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교구장이 되는 거예요. 우리 한국하고 바티칸하고 관계를 맺 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추방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서울에 교황대사님이 외무부 장관을 찾아가서 '교황님이 임명한 사람을 어떻게 일방적으로 상의도 않고 그렇게 보내느냐?'고 한 거죠. 제가 언제까지 나가야 된다는 그런 기한은 없었어요. 그리고 교황청에서 저를 불렸죠. 교황청에서 왜 그랬느냐?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죠. 사실 그해 봄에 제가 교구장 된지가 10년 되었기 때문에 이미 교황청에 나를 좀 바꿔 달라, 내가 10년 했으니까 한국인 주교가 이제 안동교구장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교황청에서 반려가 되었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냥 있으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로마에 갔더니 아니 봄에 그만두겠다는 사람이 그러면 사표를 내라고 하면서 그래야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제가 못하겠다고 답을 했거든요. 왜 그러냐면 정말 제 후임자가 한국인 주교가 되는 것은 분명한데 오원춘 사건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어요. 사람이 납치당하고 고문을 받고 그래서 그런 이후로 내가 사표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그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그 소식을 듣고 김수환 추기경님과 주교회의 의장이셨던 윤공희 대주교님을 로마로 부르셨어요. 그리고 나중에 교황님 사무실에서 교황님, 김수환 추기경님, 윤공희 대주교님, 저하고 함께 얘기를 하셨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우리 상황이 어떻고 우리나라는 독재이고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농촌에도 그렇고 도시에도 그렇고 우리가 가만있으면 안 되지 않냐고 말씀을 하셨죠. 교황님이 이해를 잘 하셨어요. 아 한국교회에서 정말 잘 한다. 그러면 그 때문에 두봉주교가 사표를 내면 안 된다. 그래서 나보고 사표내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만일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추방을 하면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겠다. 그렇게 다시 한국에 들어왔는데 한 달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어요. 그 다음 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긴급조치를 해지 했기 때문에 그 다음 날 교도소에 있던 오원춘과 그 일 행이 다 나왔고 그 다음부터는 저에 대해서는 뭐 아무 말 없더라구요.

벌써 몇 년이 됐습니다만, 2012년쯤 그때 상을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불교에서 제게 주는 만해상을 받았는데 뜻밖이었습니다. 제가 불교에 대해서 안 좋게 얘기해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스님과 손잡고 같이 일했던 것도 사실 없습니다. 만나는 스님들하고 늘 좋게 지냈던 것뿐이었죠. 안동교구청이 옆에 대원사라고 절이 있잖아요. 거기 주지스님하고 사이좋게 지내긴 했습니다만 상을 받으리라는 생각은 못했죠.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까지 이렇게 인정을 해 준 게 무척 고마웠습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기쁘고 떳떳하게'살라고 하는 내용이 기억납니다.
네, 제가 그 말을 많이 썼다라는 것을 잊어버렸었는데 하 하. 제가 교구장을 그만두고 후임자가 대구교구에서 오신 박석희 이냐시오 주교셨는데 그분에게 제가 부담을 주면 안되겠다 싶어서 그때 경기도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신부들이 모여가지고 뭔가 지침이 있어야 되겠다고 그래서 저 뒤에 있는 말을 썼습니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 서로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일군다. 이렇게 했는데 제목이 있어야 될 것 같아서 두봉 주교가 그 이야기를 잘 했다고 해서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제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제가 기쁘고 떳떳하게 그 말을 많이 했던 기억이 안 나는데 방향이 분명히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부들이 선언문을 만들면서 제목을 그렇게 붙였어요. 그런데 좋아요. 네 저도 사실 그렇게 살고 싶고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늘 불교든지 유교든지 누구든지 뭐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좋은 일을 하면 박수를 칩니다.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게 제일 기쁘다고 하셨고, 잘못을 했으면 얘기를 해줘야지 당당하니까, 그 말씀인 거죠?
네, 그렇죠. 그러니까 남에게 행복을 줘야 자기가 행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 드렸는데 행복을 주는 것이 남에게 정말 도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남이 고쳐야 할 것 이 있으면 그것을 이렇게 고치라고 하는 것이 행복을 주는 것이죠. 그래서 상대방의 상황으로 보아서 뭐 어떤 것은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고 어떤 것은 섭섭하게 받아들 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의 입장에서 정말 뭐 좋게 해주고 뭐든지 내가 남잔데 여자에게 뭐든지 다 좋다고만 그렇게 이야기를 못하거든요. 잘 하는 것은 칭찬하고 잘못 하는 것은 지적을 하고 해야죠. 그런데 지적할 때 홧김에 막 그렇게 남들에게 충고를 하면 사람들이 이것을 못 받 아들이거든요. 지적을 할 때에도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지적한다는 것을 본인이 느끼면 문제가 없어요.

주교님이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사신 지가 몇 해 되셨습니까?
그러니까 뭐 65년인가 햇수로 그렇게 되죠. 글쎄, 한국인 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우리나라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외국 사람입니다. 아이들도 길거리에서 나를 보면 뭐 어디 다른 데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 수가 있습니다만 마음으로는 한국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죠. 우리나라가 잘 되었으면 좋겠고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고 저는 외국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요. 우리나라에서 요새 행복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행복병원 행복은행 그런데 내가 볼 적에는 아까말씀드린 대로 참 행복이 남들에게 주는 행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들에게 정말 참 행복, 도움 주는 그런 복을 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너무 각박해지고 바쁘고 힘드니까 옆을 잘 돌아보지 못하고 사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런 젊은이들한테도 좋은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젊은 사람들에게 전 그런 이야기를 들려줘야 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라 남에게 관심을 가져라. 요즘 혼밥, 혼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런게 아마 그 시대를 말해주는 관계라고 봐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는 자기 혼자 앉게 되는 것 이고 핸드폰을 쓰더라도 그냥 혼자, 게임을 해도 혼자 하는 거니까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기 밖에 몰라요. 자기에게 좋게 해주면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그만둡니다. 그러다보니까 직장을 다니다 아주 쉽게 그만두고 결혼을 하더라도 이거 뭐 잘 안되면 이혼을 하거든요. 공동체의식, 우리가 함께 살아야 되고 그래서 남들에게 주고받는 그런 것이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자꾸 가르쳐야 될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탓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네들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입니다만 보충할 것이 있다면 함께 하는 것 제가 지난 주일날 부부들의 모임의 주제가 '함께'였던 것 처럼 젊은 사람들에게도 많이 가르쳐야 될 거예요. 집에 서도 학교에서도 어디를 가든지 함께 산다는 것. 가정, 직장, 나라, 우리는 혼자 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남들에 게 주라고 그러면 조금 어려워할지 몰라도 함께 살아보자, 그런 얘기를 하면 젊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겠는 가 싶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주교님은 성직자가 된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요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살아야 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살겠습니다. 아주 그냥 후회를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참 분명합니다. 내가 늘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저 늘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모두 함께 살아가야할 우리나라, 두봉 주교님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그렇게 만들어가고 싶은가보다. 충분히 그러 하실 것이고 또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을날 텃밭을 가꾸는 밀짚모자 아래 주교님의 웃음 띈 얼굴이 참 맑아 보이는 이유였다. 주교님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4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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