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왕④-보영 씨의 만화방
수집왕④-보영 씨의 만화방
  • 김은경(안동인터넷뉴스 기자)
  • 승인 2020.09.11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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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한계가 없잖아요.
어떤 때는 미래로도 갔다가
외계로도 갔다가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공간으로도 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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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환
박보영씨의 만화방에서(ⓒ권기환)

잊혀진 옛 시간의 문을 열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다. 여자에겐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안동에서 만화방을 가진 여인이 있다고 해서 햇살 좋은 날 와룡면 이하리를 찾았다. 큰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흙담집 앞에서 박보영(38) 씨가 환한 웃음으로 미리 마중을 나왔다. 마당에 들어서자 골든 리트 리버 한 마리가 한껏 가을 햇살을 맞으며 방문객을 느긋하게 쳐다본다. 아늑하고 푸근한 시골 풍경이다.
보영 씨를 따라 농가 별채에 마련된 만화방에 들어갔다. 친숙한 만화책들과 그림책으로 가득했다. 어림짐작으로도 수백여 권은 돼 보였다. 몇 권을 수집했는지 다 세어보진 못했다고. 만화로 가득 둘러싸인 방은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고 싶은 못 다 이룬 꿈같은 것 이 아닐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책들과 현재를 살아가고 나이 드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큰 즐거움이다. 필자도 어린 시절 추앙했던 추리소설 전집을 재 구매한 적이 있다. 가끔 어린 시절과 조우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하물며 한 방을 아예 만화방으로 차린 정성 이라니!
방에 들어서니 어색함도 잠시,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와 《은비가 내리는 나라》, 황미나의 《레드문》을 비롯해 그 시절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비천무》, 《언플러그드 보이》, 《오디션》 등 십대시절을 함께 거쳐 갔던 추억이 깃든 만화들이 눈에 띄었다. 필자와 동갑인 보영 씨와 '응답하라 1996년'으로 돌아간 듯 그 시절 우리가 봤던 만화책에 대해 잠시 폭풍 수다를 떨었는데, 그녀의 만화방은 잊혀진 옛 시간들을 한꺼 번에 소환하는 타임머신 같은 공간이었다.

보영 씨의 힐링공간,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
원래 동네 꼬마들이 놀다가곤 했던 이 방은 7년 전 만화방으로 바뀌었다. 계기가 있었다.
"당시에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 조금 우울했던 거 같아요. 애들 아빠가 제가 만화를 좋아하니까 여기서 만화 보면서 지내라고 방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책장은 아는 분이 짜주셔서 그때부터 하나씩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만화는 가장 좋아했고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였거 든요."
남편의 배려로 박 씨는 한편에는 아기를 재워놓고 만화책을 보며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이들이 자라 동네 꼬마들이 드나들며 놀이공간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꼬마들도 자라 나이가 들면 동네에 한켠에 자리하고 있던 만화방에 대해 언제나 추억 하게 될 것이다. 풍성한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박 씨도 그랬다. 구미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란 그녀는 초등학생 때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만화책과 만났다. 그곳엔 다양한 만화책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따뜻한 타쿠야 형제가 만들어간 감동적인 이야기인 《아기와 나》 를 모두 학원에서 읽었다.


“제가 어렸을 때 보고 좋았던 만화들은 아이들도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게 기억에 남아서 아기 낳고 이 책을 모두 샀어요. 딸아이도 다 읽었는데 저보다 더 많이 보더라고요. 저도 어릴 적 어머니께서 우리가 워낙 만화를 좋아해서 조르니까 생일 때마다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를 꼭 사주셨어요. 집에 이만큼 모아두기도 했었죠. <나나>라는 잡지도 있었는데 당시 5천원이었어요, 그건 특별한 날만 돈을 모아서 샀던 기억이 나요. 창간호 표지는 당시 한창 인기였던 만화가 이은혜의 그림이었어요. 거기에 연재된 한승원의 《프린세스》는 아직도 완결이 안 났는데 연로하셔서 이젠 후속권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 같아요. 아쉬워요.”
순정만화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린세스》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만화책이기도 하다.
“지금 보면 시시할 수 있는데, 고등학교 때 느꼈던 감정을 지금도 그대로 느껴요. 내가 이 대목에서 가슴 아팠지 하고요.”
동네 꼬마들에게 모든 책을 볼 수 있도록 개방했지만, 유일하게 그 책들만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웃음 지었다. 청소년기의 추억이 묻어있는 소중한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기환
서고가득 만화책이 보인다(ⓒ권기환)

십대 시절, 다른 세계로 데려다 준 매개체
여느 십대들처럼, 박 씨도 학업 스트레스를 겪었지만 만화를 읽거나 따라 그리면서 그 시간을 견뎌냈다고 한다. 만화에게 참 고마운 일이다.
“당시 저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 준 건 책이었고 그 중 에서도 만화책이었어요. 만화는 한계가 없잖아요. 어떤 때는 미래로도 갔다가 외계로도 갔다가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공간으로도 가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동경? 저도 그쪽으로 같이 따라갈 수 있는 매개체여서 너무 좋았던 거 같아요. 만화가 피난처였던 것 같아요. ”특히 책과는 달리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공간적으로도 볼 수 있는 점이 만화책이 지닌 고유한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10대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만화는 한승희의 《펑키》였다. 드라마도 제작돼 인기가 많은 작품으로 그림책도 좋아해서 팬레터도 써서 보냈다가 답장까지 받은 일화도 있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뜨는 만화가 천계영이었어요. 《오디션》과 《언플러그드 보이》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만화여서 사랑을 많이 받았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약간 좋아하는 작가 층들이 변했어요. 지금은 개성 있고 논 픽션이나 작가주의 책들을 좋아하는 거 같아요.”

ⓒ권기환
보영 씨가 특별히 추천하는 만화책(ⓒ권기환)

만화로 그리는 소설 등 다양한 만화의 세계
이 방에서 추천하고 싶은 만화책은 한없이 많다. 고르는 책마다 그에게 끼친 영향도 저마다 다르다.
“소설분야에 맨부커상이 있다면, 만화에는 앙굴렘상이 있어요. 국내 작가인 "앙꼬"씨는 단편만화집 《나쁜 친구》로 국내에선 최초로 2017년도에 앙굴렘국제만화제 "새로운 발견상"을 받았어요. 우리나라 고등학생 이야기를 한 건데. 이걸 추천하고 싶어요.”
그 다음 집어든 책은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 폴리스》이다.
“이란 여성이 어릴 때부터 자기가 전쟁도 겪고 이란에 대한 상황들이 다 나와 있어요. 이런 작품들은 만화라기 보다는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는데 만화로 그리는 소설 같은 거예요. 이 작품은 허구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쓴 것이고, 예술성도 높아서 좋아해요.”
이어 집어든 《7층》도 저자의 실제 증언과 보도를 담은 데이트 폭력 고발 그래픽 노블이다. 스웨덴 대표 여성 만 화가인 오사 게렌발의 작품으로 특히 그림 그리기에 주저하던 보영 씨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이 되게 훌륭하진 않아요. (웃음) 이걸 보고 제가 그 동안은 만화가가 그림을 잘 그려야 된다는 어떤 편견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지 않구나, 자기 이야기를 그냥 그림으로 표현하면 되는 구나. 그걸 굉장히 많이 느꼈던 작품이에요.”
마지막으로 김은성 작가의 《내 어머니 이야기》를 꼽았다. 마흔 살에 처음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작가가 우리의 역사 중 가장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서 자란 평범한 엄마의 여든 생애를, 10년이란 시간을 바쳐 완성해 한국 근현대사 백년의 장면들이 놀랄 만큼 생생하게 펼친 작품으로 평가된다. 박 씨는 한 잡지사에서 진행한 그림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김은성 작가에게 직접 그림을 배운 특별한 인연도 있다.

보영 씨가 직접 그린 그림과 만화(ⓒ권기환)
보영 씨가 직접 그린 그림과 만화(ⓒ권기환)

“이제는 제 일상을 만화로 그려나가요”
“2011년에 <고래가 그랬어>에서 한 일주일 코스로 만화 그리고 싶은 사람 아무나 오라고 해서 나도 한번 가서 해볼까 해서 배우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조금씩 그리고 있죠.”
박 씨는 2016부터 2017년까지 1년 반 동안 어린이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맨날 맨날 놀고 싶은 진짜 놀이터'를 연재하기도 했다. 우연히 남편이 쓴 글에 그림 한 점을 실었다가 덥썩 출판사에서 연재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고 승낙한 것이다. 한 달 원고 마감을 맞추느라 힘도 들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그 일을 끝가지 해낸 그녀가 대단히 놀라웠다.
박 씨는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첩을 펼쳐보였다.
“지금은 가끔씩 우리 생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여행 다녔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요. 이것도 여행 잡지에 조금 연재를 했었어요. 그건 폐간이 돼서 나오다가 말았는데 이런 생활 만화같은 경우에는 제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볼 수 있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정제해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말은 그냥 막 나오는 거지만, 글이나 그림은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솔직해야 하잖아요. 김은성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고 나면 뭔가 풀리는 게 있다고 하셨는데.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요즘은 뭔가 조금 시원하단 기분을 느끼고 있어요.”
어린 시절 만화에 푹 빠져, 즐기면서 다시 일상을 만화로 풀어내기까지. 그녀에게 만화란 순수 놀이터이자, 그녀만의 방식대로 세상과 담백하게 소통하는 언어가 아 닐까 생각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4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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