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탐방 '같이 가볼까'④-사람의 마을로 길을 낸 탑리버스정류장
문화공간탐방 '같이 가볼까'④-사람의 마을로 길을 낸 탑리버스정류장
  • 신준영(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 승인 2020.09.12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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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내고 덜어내면서 선명해지는 시간의 축적
시골 버스정류장 대합실의 오래된 나무 의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을 기다리는 일로 보낸다. 버스 시간에 맞춰 들어온 사람들은 머리 위를 지나는 구름처럼 머무는 듯 급히 떠나간다. 공간도 의자와 같아서 사람들을 맞고 보내는 일이 끝나면 다시 기다리는 일로 시간을 견딘다. 오래된 공간에는 없으나 분명히 있어온 시간이란 것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여있다. 시간의 축적은 스스로를 깎아내고 덜어내면서 선명해진다. 오늘 찾을 이 공간에도 많게는 하루 이천 여명이 들고나던 호시절이 있었다. 그런 전성기가 다시 올리는 없겠지만 낡고 한가 롭기만 하던 대합실이 갤러리를 겸한 공간으로 변신하면서 이색 문화공간으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78 탑리버스정류장(ⓒ신준영)
1978년 탑리버스정류장의 모습과 김재도 대표

65년째 사람과 사연을 부리고 떠나보낸 공간
의성군 금성면 탑리버스정류장 김재도 대표는 올해 여든 셋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젊은 감각과 열정을 소유 한 인물이다. 1951년 시작한 버스정류장을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54년부터 가업으로 물려받아 65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를 인정받아 2017년에는 경상북도에서 지정한 노포 기업 20개 업체 중 한곳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초가에 방 한 칸으로 시작한 정류소는 12평 슬레이트 지붕 집으로, 다시 탑리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단층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면서 정류장과 터미널이라는 이름을 차례로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류소 소장으로 통한다.

버스 대합실 겸 갤러리가 있는 건물은 1976년에 지은 것으로 '금성(탑리)버스터미널'이라 적힌 간판과 '해암 김재도 갤러리' 간판을 사이좋게 내걸고 있다. 내부로 들어서자 1982년 2월에 멈춰선 버스요금표가 눈에 들어온다.

“2~3년 마다 요금도 변경되고 했는데 저 위에 적힌 날짜에서 멈춰선 그대롭니다. 호황일 때는 20분마다 대구로 한 대씩 나가고 들어왔거든요. 지금은 하루에 20~30 명이 타고 내리는데 모두 나처럼 나이 많고 차 없는 사람들이예요.”

동네 의원에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노인들은 대구의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아침 8시 18분 첫 차나 10시 28분에 있는 뒤차를 탄다. 그 두 대에 나눠 타는 승객들이 하루 승객의 대부분이니 온종일 마당은 비어있다. 대구에서 오는 버스에는 아침에 나갔던 사람들이 그대로 타고 와서 내릴 뿐이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정류장 은 20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하고 노후 된 건물은 보수는커녕 손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버스 대합실 안 사진갤러리
“지역민들, 특히 병원 가는 노인들을 위해서 문은 열 어놓아야겠는데 건물이나 환경이 하도 허술하다보니 하는 수 없어 작년에 군수님께 지원을 부탁드렸어요. 하루 종일 20~30명 타고 내리는데 빈 공간으로 남겨두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사 중에 업자들에게 건의해서 갤러리로 단장을 했습니다. 내가 사진 필름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사진 갤러리를 만들어서 전시를 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작년 9월 갤러리 개관 당시 김재도 대표는 본인의 작품들로 '우리나라 독도' 사진전을 열었다. 금년 5월부터는 20년 전에 전시했던 작품들을 가져와 '내 고향 의성'전을 다시 열고 있다. 원래 컬러였던 사진들을 흑백으로 작업해서 걸었는데 의성의 특산물과 유적지, 이웃 사람들의 모습 등을 담았다. 20년 전 8만이었던 의성군 인구가 현재 5만에 불과하다고 하니 컬러 사진을 흑백 사진으로 바꾸어 작업한 작가의 의도를 알 것도 같다. 이야기 도중 버스가 들어왔다. 대구를 출발해 춘산으로 가는 4시 20분 버스다. 대합실에서 나와 정류장 마당에 섰다가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다. 버스에서 내린 승객 들이 대합실 옆 정류장 상가 건물 한가운데를 통과해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상가 건물 중앙이 뚫려 있어 마을로 통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80년대에 상가 건물을 지을 때 설계를 그렇게 했어요. 시가지가 다 건물 뒤편에 있어서 건물에 통로를 만들 었지요. 아니면 빙 둘러서 가야 하니까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상가 건물 2층 외벽에는 '명빈 레스토랑'이라는 간판 만이 덩그렇다. 80~90년대에는 경기가 좋아 장사가 제법 되던 곳이다. 1층에는 옷가게, 체육사 등이 세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서점을 겸하는 문방구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가게들이 빈 채로 방치된 것도 어느덧 15년 이상 된 이야기다.

ⓒ신준영
버스대합실과 갤러리

작은 사진도서관을 준비 중인 상가 건물
작은 사진도서관을 준비 중이라는 상가 건물의 1층 한 공간으로 들어가니 기증 받은 도록과 사진집으로 가득하다. 700 여권의 책이 꽂혀있는데 방문객들의 반응이 꽤 괜찮다. 사장되어있는 사진 도록을 기증 받아 부수를 늘리고 작은 사진도서관을 만들면 지역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모은 것이 2,500권 가량 된다. 도록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많은 양을 기증 받았다. 작년 9월 14일 갤러리를 개관한 후 10월부터 아는 분들에게 사진집과 사진도록 기증스티커를 제작해서 보냈다. 전화나 매스컴, SNS 홍보 등을 통해 멀리는 김해, 창원 등 지에서도 뜻있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기증을 해왔다. 작은 사진도서관에는 갤러리 개관 당시 전시했던 독도 사진과 김재도 대표의 옛 흑백사진들이 걸려있다.

김재도 대표가 사진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모으고 있는 책자(ⓒ신준영)
김재도 대표가 사진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모으고 있는 책자

버스 한 대 보고 초가에서 시작한 정류소
“정류소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버스가 대구에서 한 대 들어왔어요. 기사, 조수, 여성 차장이라 불리던 안내원 한 명, 이렇게 세 명이 한 팀이었어요. 우리 집에서 숙식을 했는데 5시간 반 걸려서 대구에서 오면 자고 다음 날 새벽 6시에 출발해요. 버스 한 대에서 나오는 세 사람의 숙식비와 승차권 판매 수수료를 보고 정류소를 시작한 거지요.”

초가에 조그맣게 정류소라는 간판만 붙이고 시작한 것이 해가 거듭될수록 승객도 늘고 버스도 따라서 늘었다. 80~90년대 까지는 승객이 많아 좁은 마당에 버스 열대가 동시에 정차하기도 했다. 1983 년도에는 좀 무리를 해서 지금의 상가 건물을 지었고 그 상가 건물로 인해 IMF 때는 혹독하게 경제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전성기가 지나 자수입은 급격히 줄었다. 호황이었을 때 4남매를 교육시키고 출가까지 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내가 생전에 조석으로 밥상머리에서 적자 나니 문을 닫자고 했어요. 가업으로 60년 해 오던 건데 쉽게 치울 수 없다고 하는데 까지 하자고 하면 한 사람 월급 줄 돈도 안 되는데 그만 치웁시다, 또 그랬어요.”

1978년의 김재도 대표(ⓒ신준영)
1978년의 김재도 대표
2019년의 김재도 대표(ⓒ신준영)
2019년의 김재도 대표

폐업 신고하러 갔다가 도리어 설득 당해서 돌아와
세 번이나 폐업 신고를 하러 군청에 갔다가 도리어 설득을 당해서 돌아왔다. 결국은 체념하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평생에 정류소를 벗어난 건 군대에 갔을 때뿐이다. 대구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그곳에서 공휴일을 보낸 기억이 다섯 번 내외일 정도다. 대학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들어간 건설 회사를 그만두고 정류장으로 돌아온 일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지만 가정을 돌봐야한다는 책임감으로 선택한 길 역시 그의 의지였다. 젊어서부터 면의 일도 부지런히 찾아서 하고 85년에는 농협조합장에 선출되어 두 임기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30여년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모은 필름이 20여만 장
김재도 대표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80년대부터였다. 독일에 파견 광부로 다녀온 이웃 마을 친구에게서 작은 아날로그 카메라를 20만원에 산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안동 다니면서 김복영 선생 등과 어울리며 사진을 함께 찍었어요. 임하댐 수몰 될 때도 열심히 찍고. 그 간 모은 필름만 해도 20여만 장은 됩니다. 독도 사진은 2002년 가을 고운사에 사진 찍으러 갔다가 경북경찰청 장님과 인연이 되어 2003년 5월 울릉도 초도 방문시 동행하게 되었어요. 필름 카메라를 들고 갔는데 점심도 마다하고 정신없이 찍었어요. 그게 또 인연이 되어서 독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2013년까지 여러 차례 다녀왔어요. 헬기에서 찍은 독도 일출 사진은 아주 멋지죠.”

갤러리를 열었을 때는 연 4회 정도 전시를 가지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일 년에 두 번으로 변경했다. 작은 공간이지만 전시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그는 자신이 떠나 더라도 누구든 이 공간을 지켜낼 거라는 신념으로 사진 집, 사진도록 기증 캠페인을 지속할 예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그렇게 모은 자료들을 디지털화 할 인력이 없다는 것이다. 청년일자리 창출 사업과 연계해서 그러한 작업들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 지고 있다.

사람이 사는 마을로 향하는 길
여든 셋 김재도, 그에게는 여전히 계획이 많다. 레스토랑이 있던 2층 공간을 활용하여 사진 강의도 하고 이웃과 주변의 사물을 찍은 사진도 전시하고 여건이 되면 유명 작가 초청 강의도 열고 싶다. 20년간 스크랩한 독도 관련 신문 기사들도 공개하고 싶고 복고풍으로 꾸민 추억의 사진관, 포토존도 만들어 어른, 아이 모두 좋아할 만한 공간으로 꾸며보고도 싶다. 다행히 조금씩 소문이 나서 현재 평균 하루 50명 정도가 갤러리를 방문하고 있다. 버스 승객을 훨씬 웃도는 숫자다.

정류장 빈 마당으로 다시 나와 마을로 난 상가 건물의 뚫린 통로를 돌아본다. 여든 셋의 그가 평생을 걸려 걸어 온 길, 앞으로 걸어가려는 길 또한 결국은 사람이 사는 마을로 향하는 길이었음을 알겠다. '빈 마당에 다시 사람이 끓기를…….' 그가 건넨 방명록에 한 줄 적어둔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4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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