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게 말을 걸다④-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돌아가고픈 이십대 시절아
사진에게 말을 걸다④-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돌아가고픈 이십대 시절아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0.09.2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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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집단 패싸움으로 끝났다. 1985년 3월 초, 안동대 송천캠퍼스에서 만난 스무 살 또래 동기들과의 단합대회가 시내 '송림아구찜' 이층 다락홀에서 열렸다. 자기소개에 이어 술기운이 무르익었고 누군가 가져온 대형카세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도중에 후다닥 싸움이벌어졌다. 식탁이 엎어지고 술병이 깨졌다. 놀란 여자 동기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자 동기들은 엉켜들었다.

이날의 치기어린 행동은 오랫동안 두고두고 회자된 사건이다. 뒤늦게 이 난장판을 목도한 지도교수는 이튿날 강의시간에 본 수업내용은 제쳐놓고서 '바람직한 대학생활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딱했으면 공부에만 전념했던 젊은 날을 들려주며 바람직한 공부에만 열중해 달라고 강권했을까.

신입생 서른여섯 명으로 구성된 민속학(folklore) 85학번은 4월이 시작되자 세 개의 패로 나뉘어졌다. 전공파, 취업파, 정의파로 형성된 세 그룹은 각각 나름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전공을 살려서 민속문화 계통으로 진출한다는 전공파, 일반적인 취업을 위해 과 소속을 유지한다는 취업파, 시대의 불의에 눈감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정의파로 갈라졌다. 그래도 20대 특유의 불안감과 감수성으로 무장한 이들은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억압적인 정치체제에 순응적으로 비춰진 교수와 선배에 대한 불만만큼은 공유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민정당사에서 5·18광주학살범을 처단하라는 농성을 벌이다가 연행·구속되었다. 그 장면을 지켜만 보는 것이 큰 부채의식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다가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남겼다.

영어스터디를 꾸려 시청각실을 드나들었고 따뜻한 봄날엔 반변천 강변을 나룻배로 건너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반변천 석양을 바라보며 감탄을 연발했고 안동댐 민속촌 주점에서 동동주를 나눠 마신 후 비틀거리며 기숙사로 기어들어 갔다.

6개월 넘는 정신적 방황이 끝나가던 12월 나는 학생운동 이론학습에 돌입했다. 닥치는 대로 읽던 책들을 뒤로 남겨놓고 소위 커리큘럼에 따라 한 권씩 책을 읽고 난 후 맨투맨식 학습 토론을 가졌다. 얼마나 강렬했으면 아직까지도 토론을 한 책 제목이 이리도 선명할까. <학교는 죽었다>, <페다고지>,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해방전후사의 인식1>, <철학의 기초이론>, <강좌철학>, <서양경제사론>, <경제사총론>,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 1~2>.

대자보, 1986년 봄, 졸업정원제 폐기운동에 즈음하여 민속학과 1,2학년 일동의 입장을 간결하게 썼다.(ⓒ유경상)
대자보, 1986년 봄, 졸업정원제 폐기운동에 즈음하여 민속학과 1,2학년 일동의 입장을 간결하게 썼다.(ⓒ유경상)
졸업정원제 폐기 요구 점검농성에 지지 모습을 보여 준 학과동기들. 이를 계기로 500여 명이 넘는 학생시위가 촉발되었다.(ⓒ유경상)
안동대 인문학관 3층 서클룸을 점거해 졸업정원제 폐기 입장을 낭독하였다.(ⓒ유경상)

석달 동안 개인적으로 독파한 책 제목도 기억난다. <민중과 지식인>, <노동의 역사>, <8억 인과의 대화>, <철학에세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어느 돌멩이의 외침>,<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사적유물론>,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등이다. 대학도서관에서는 틈나는 대로 1966년 창간호부터 1980년 폐간 때까지의 <창작과비평> 양장본을 읽어내려 갔다.

스물한 살 청년의 생각은 급속하게 의식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1986년 3월, 2학년 개강이 시작될 때부터 수상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졸업정원제도로 인해 30% 인원이 제적될 수 있다는 소문이 실제로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제도를 대학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으로 판단했고 곧바로 항의 시위를 준비했다.

누구도 졸업정원제도의 도입 배경과 내용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월간 신동아에 실린 기사를 읽고 작은 대자보를 만들어 부착했다. 학우들이 호응하며 '통일마당'에 집결해 줄 지 걱정이 커졌다. 급기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결정해 서클룸을 박차고 들어가 "살인적문교행정 즉각 폐지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선동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민속학과 85학번 동기 스무 명이 3층 서클룸 아래 통일마당에 모여 앉아 호응을 하다가 교수들의 설득에 몇몇은 흩어졌지만 끝까지 자리를 고수해 준 친구들 모습이 사진에 찍혀 있다. 당시에는 이 사진의 존재를 몰랐다. 몇 년 후 학보사 친구가 건네 준 것이 남아 있다.

졸업정원제 폐기 요구 점검농성에 지지 모습을 보여 준 학과동기들. 이를 계기로 500여 명이 넘는 학생시위가 촉발되었다(ⓒ유경상)
졸업정원제 폐기 요구 점검농성에 지지 모습을 보여 준 학과동기들. 이를 계기로 500여 명이 넘는 학생시위가 촉발되었다(ⓒ유경상)

졸업정원제 폐기 농성과 시위선동의 후유증은 학교당국의 '경고'로 나타났다. 이어 여름엔 '유기정학', 가을 대동제 시위 사건으로는 '무기정학'을 당하며 2학년 시절은 끝나버렸다. 87년이 시작될 때 대부분 남자동기들은 군에 입대했다. 여자동기들은 89년 2월에 졸업을 했고 제대한 남자동기들은 91년에 복학을 하였지만, 난 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군형무소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이상을 품은 채 시위로 점철된 나의 이십대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절반 가까운 학과 동기들이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졸업 이후 흩어져 살아온 지 삼십여 년이 지났다. 개성이 강했지만 단결력이 높았던 동기들과는 매년 모임을 가지고 있다. 매년 불원천리 달려오는 모임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구동성으로 우리의 이십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자신 있게 떠들고 있다. 저마다 슬프고도 외로웠던 마음을 묻고서 큰 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전진하거나 방랑했던 그 시간들이 모일 때마다 그득하게 쌓이고 있다. 그래도 어쩌랴,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법칙은 존재하는 어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 다시 돌아갈 순없지만 꽃내음 가득했었던 이십대의 초원으로 기억할수밖에.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5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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