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내비게이션은 꺼도 돼②-빨간 날만 열어요, 빨간 장터
잠깐, 내비게이션은 꺼도 돼②-빨간 날만 열어요, 빨간 장터
  • 권영창(영창필름 대표)
  • 승인 2020.09.23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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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직면 귀미1리의 특별한 마을장터
시간은 자꾸 흘러 기록창고 마감일이 다가오고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안동 토박이라고 자부하던 나도 안동을 잘 모르고 있었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도 머릿속엔 글감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있었는데, 문득 '아, 코너 제목대로 내비게이션을 꺼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일단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을 끄고 차를 일직 방향으로 쌩- 하고 틀었다. 일직-길안-임하를 거쳐 안동의 남부지역을 훑어보려는 심산이었다.

모처럼의 농촌 풍경, 수확기도 지나 한산하고 썰렁한 모습이었지만 살짝 열린 차창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마저 왠지 반가웠다. 건조하고 답답한 히터 바람 대신 상쾌한 촌바람이 차 안을 가득 메우니 기분이 좋아져 괜히 콧노래가 나왔다. 그렇게 스스로 안동촌놈 정체성을 확인하며 빈 도로를 신나게 쌩쌩 달리는데, 내리막길 마지막쯤 갑자기 튀어나온 과속방지턱을 보고 깜짝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둔탁하게 덜컹이던 차처럼 놀란 내 맘도 덜컹거렸다.

아무도 못 봤겠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바로 옆 갓길에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서있다. 열 명이 조금 안 되는 주민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창피한 마음에 살금살금 액셀레이터를 밟는데 가만 보니 풍경이 참 희한했다.

'무슨 일이기에 조용한 마을에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있을까?'

창문 너머로 슬쩍 다시 보니 대문짝만 하게 '귀미1리 빨간장터'라고 쓰인 몽골텐트 두 동 아래 가판대도 있고 분명히 무언가를 사고파는 형국이었다. 빨간장터라니…나의 상상력은 여러 갈래로(잠깐은 음흉하게도) 뻗어 나갔다. 도대체 뭘 팔길래 '빨간'장터인 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재밌는 글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차를 얼른 옮겨 가까운 공터에 주차하고 빨간장터에 가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친절한 인사로 반겨주는 동네 주민들, 뭔가 어설프고 엉성해 보이긴 하지만 나름의 구색을 갖추어 가판대에 놓인 농작물들. 사람 하나 안 지나가는 동네에 뜬금없는 이 장터는 도대체 뭘 하는 곳이지? 너무 궁금해서 인상이 가장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을 붙잡고 여쭤봤다.

"여기 뭐하는 곳이에요?"

"아~ 여기는 마을 사람들 농작물 직거래 하는 장터에요."

아하, 마을 직거래 장터 정도야 여기저기 열리는 곳이 많으니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빨간장터'의 어원이 궁금했다. 조심히 여쭤봤다.

"빨…간장터는 무슨 뜻이에요?"

"(웃음)별게 아니고, 빨간 날만 연다꼬 빨간장터라고 지었어요."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너무 단순하지만 직관적이고 순수하면서 귀여운 이름이었다. 요상한 상상을 했던 나의 생각이 불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빨간장터에선 이렇게 모여 전을 부쳐 먹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권영창)
빨간장터에선 이렇게 모여 전을 부쳐 먹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권영창)

3년째 이어져오는 마을기업, 빨간장터
어머님 말씀처럼 빨간장터는 말 그대로 빨간 날이면 무조건 열리는 장터라고 한다. 토, 일 주말은 물론이고 각종 국경일에도 빠짐없이 아침 9시부터 오후 4-5시 정도까지 열린다. 역사도 길다. 농한기 한가한 시간에 남은 농작물들을 직접 판매해보자고 벌린 장이 벌써 3년째 탈없이 쭉 이어져오고 있다. 파는 농작물들은 모두 마을 주민들이 수확하고 가공한 식품들이다. 무, 사과, 도토리,자두, 양파, 마늘, 잡곡뿐만 아니라 두부와 식혜, 고춧가루, 장아찌, 고춧잎, 감말랭이, 사과즙 등등 없는 게 없다.

들으면 들을수록 궁금한 점이 더 생겨 이것저것 여쭤보니 아주머니는 쑥스럽게 "내는 잘 몰래요"라며 옆에 있던 다른 분의 옷자락을 끌어당기셨다. 빨간장터의 대표 이주남 씨였다. 동네 장터에 '대표'가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씀드리니, 빨간장터는 마을기업으로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때때로 마음 가는 대로 좌판 까는 동네 장터가 아니라 정부에서 마을기업 인증을 받아 나름의 체계를 갖고 운영하는 곳이었다. 장터는 회원제로 운영하고 현재 회원은 7명이다. 장터에 물건을 내놓는 것이야 귀미1리 마을 주민이면 회원이든 비회원이든 상관없지만 회원은 운영비 명목의 수수료가 훨씬 낮다. 모인 수익은 연말에 정산하여 회원들이 일정 부분 나눠 갖는다.

젊은 사람의 입장에선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기업은 인증을 받는 것도 절차가 까다롭다고 얼핏 들은 기억 때문이었다. 소박한 모습의 어르신들이 마냥 손에 흙 묻혀가며 농사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내공에 내심 놀란 마음이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마을에서 상대적으로 젊다는 이유로 대표직을 맡게 된 이주남 씨는 마을기업 인증을 위한 사업계획서 한 줄 쓰는 것도 버거웠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계획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컴퓨터로 작성해야 하는데 살아생전 컴퓨터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컴퓨터 교육을 받는 것부터 시작해 손수 마을기업 사업 계획서를 차근차근 준비했고, 2017년 여름 드디어 빨간장터가 행정안전부로부터 마을기업 인증을 받았다. 정말 대단한 열정이다.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장터 사람들은 하나둘 장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나는 염치 불고하고 "혹시 대표님 댁에 가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요?" 했더니 흔쾌히 초대해 주셨다. 조그만 식탁에 앉아 구수한 믹스커피와 빨간장터의 감말랭이를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마을 이장님인 남편 김종호 씨도 대화에 함께 했다.

사실 빨간장터의 시작은 김종호 씨의 아이디어였다. 오래전 안동에서는 마을 인근의 일직장이 유명하긴 했지만, 그 이전에 먼저 생긴 귀미장의 전통을 살리고 싶었고 교육 차 견학했던 충남 홍성의 한 마을 장터를 보고 팍! 느낌이 와서 벤치마킹한 것이란다. 마침 아내도 마을에 활기를 줄만한 거리들을 찾고 있던 와중이었고, 그렇게 부부의 마음과 생각이 맞아 빨간장터가 생겨나게 된것이다.

빨간장터애서 파는 농작물들, 물건 하나하나에 생산자의 이르밍 기록된 것이 인상 깊다.(ⓒ권영창)
빨간장터에서 파는 농작물들, 물건 하나하나에 생산자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인상 깊다.(ⓒ권영창)

화투보다 재밌는 장터
그렇게 시작한 지 3년 차, 빨간 날이면 하루 평균 40-50명의 손님들이 방문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지만 솔직히 힘든 점도 많다고 했다. 일단 농사지으랴 장터 실무 보랴 잠잘 시간조차 부족하다. 스스로 '부지런해야 해'라고 되뇌는 말로 응원을 하고 있지만 힘든 것은 사실이다. 마음이야 뜨거운 열정으로 버티지만 물리적으로 시간이 빠듯하니 힘든 건 몸이 가장 솔직하게 느낀다. 게다가 사람과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다 보니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하셨다. 장터가 열리면 회원 중 두 분이 하루를 책임지고 자리를 지키는데 회원들의 스케줄을 형평성 있게 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란다.

얘기를 듣다 보니 '그럼 그 궂을 일을 왜 하고 계실까? 몸과 마음이 바쁜 데다가 수익도 얼마 나지 않는데?'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나의 의문에 대표님은 “즐거워요”라며 딱 잘라 이야기했다. 솔직히 장터 수익이 살림에는 큰 도움이 안되지만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주는 것도 한몫을 하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하는 것 자체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예전과 달리 요즘 어르신들은 마을회관에 모일 일도 잘 없는데, 이렇게 장터에 모여 손님들 만나고 고구마 구워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전 부치고 막걸리 마시고 노래방 기계를 가져와 함께 노래도 부르며 즐거움을 나눈다. 회관에서 치던 화투보다 장터가 더 재밌다고 말씀하실 정도란다.

빨간장터 대표 이주님(오른쪽) 씨와 남편 김종호(왼쪽) 씨(ⓒ권영창)
빨간장터 대표 이주님(오른쪽) 씨와 남편 김종호(왼쪽) 씨(ⓒ권영창)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월 수익 정산(ⓒ권영창)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월 수익 정산(ⓒ권영창)

"다 팔아뿌면 팔 게 없잖니껴"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이 장터는 단순한 경제공동체를 넘어 마을의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복합문화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최근에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재밌게' 일해 본 기억이 없어서일까? 아주 잠깐 이 마을의 주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러웠다. 팔 게 없어서 장터를 못 열까봐 걱정하는 대표님의 말이 살짝 얄미워 보이기까지 했다.

카메라 앞이라 잘 보이고 싶은데 손하트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권영창)
카메라 앞이라 잘 보이고 싶은데 손하트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권영창)

"아이고~ 너무 장사 잘 돼도 걱정이래요. 장터에서는 우리 마을 것만 파니깐. 다 팔아뿌면 팔 게 없잖니껴. 다른 데서 물건 떼올 수도 없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소복히 쌓여있던 감말랭이가 자취를 감추었다. 맛있어서 한 입 두 입 먹다가 혼자서 한봉지를 다 먹었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대표님이 연말정산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고 눈치껏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함께' 그리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앞으로 함께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니 지쳐있던 마음에 벌써 봄바람이 불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5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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