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⑦〉-민주화 운동의 산증인 야성 강창덕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⑦〉-민주화 운동의 산증인 야성 강창덕
  • 강병규(안동MBC PD)
  • 승인 2020.10.0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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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연신 고맙다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 선생을 인터뷰하기 전 나는 인터넷이 올라와 있는 자료를 찾았고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냈다. 그런 후 9월 방송대상 시상식, KBS대구총국이 만든 특별기획 10부작 《기억, 마주서다》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다시 강창덕 선생을 볼 수 있었다. 현대사의 아픈 기억 한 가운데 서 계셨던 선생은 장장 4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너무나도 또렷한 기억과 생생한 증언으로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인터뷰 전 시장하다며 점심 밥상에 반주로 맥주 한 병을 시원하게 드셨고 거침없는 달변에 분명한 가치관은 어른의 거칠었던 생애만큼이나 우뚝했다. 한국의 질곡된 근현대사를 몸으로 견뎌온 분, 들별 강창덕.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순국열사 일곱분을 모셔서 '칠충사'라 이름지은 공간
순국열사 일곱분을 모셔서 '칠충사'라 이름지은 공간(ⓒ안동MBC)

그냥 일반적인 사무실로 알고 들어왔는데, 앞에 보니까 '칠충사'라는 사당이라고 되어 있네요. 왜 이렇게 이름 지으셨나요?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일곱 분의 순국열사님을 모시려고 이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름을 칠충사라고 했어요. 모셔 놓은 지 올해로 10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그래서 매년 음력 9월 9일에 합동추모제를 올립니다. 내가 오래전부터 이 열사님들을 숭배하고 사모하고 지내다가 내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무죄를 받아서 약간의 배상금을 '가불' 받은 일이 있는데 그 돈이 생겼기 때문에 내가 사모하는 분들을 모시려고 이런 공간을 빌려서 이름 지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이 숭모하는 분이시잖아요? 어떤 기준으로 저분들을 모신건지요?
제일 왼쪽에 전봉준 열사님이고 제일 오른쪽에는 전태일 열사인데 배열은 연도순으로 했습니다. 전봉준 열사님은 동학 농민 혁명을 영도하시던 녹두장군이기 때문에 '농민군'에는 전봉준 열사님을 모시고 싶었고요. 허위 선생은 구한말에, 반일, 국권 수호를 위해 의병 13도 총대장을 하셨기 때문에 의병 쪽을 대표해서 모셨습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인사들 중에 김구 선생님을 모셨고, 김창숙 선생은 유생이시고 자연사를 하셨지만 나머지 여섯 분 못지않게 사신 분이예요. 감옥에서 고문을 당해 앉은뱅이가 되셨잖아요? 그렇게 여생을 보내신 분이기 때문에 나머지 여섯 분 모두 다 사형, 암살, 분신한 분이지만 함께 모셨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내가 원래 소년시절부터 근로인민당하고도 인연이 좀 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으로 통일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 하시다가 한지근이라는 그 어린 테러범에게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조봉암 선생은 내가 평화통일을 원하기 때문에 모셨습니다. 이승만 독재 하에서 북진통일, 무력통일을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하시다가 억울하게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서 사형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전태일 열사님은 아시다시피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자기 몸을 바쳐분신했던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농민부터 의병, 임시정부, 독립운동, 좌우합작, 통일운동, 노동운동까지 모두 그런 분들을 내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하고 오래오래 기리고 싶은 어른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돈 몇 푼 생겼을 때 내 평생의 뜻을 이루려고 조그만 이런 공간을 빌려서 모시고 있습니다.

저분들 바로 아래 지금 선생님 가슴에도 달고 계시는 한반도기가 있네요?
나는 내 나이 열일곱 살 때부터 분단 반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반대에 뜻을 같이 했어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라고 보면 됩니다. 내 고향 한마을에 강용성 씨라는 분이 있었어. 그분이 참 옛날 신분으로 말하자면 천민이었지요. 백정이었는데 형평사 운동, 그 다음에 소위 수평운동 그런데도 다 가담하고 했던 분인데 그 분이 여운형 선생을 따랐어요. 그래 놓으니 1944년에 결성되었는가. 지하 단체에 여운형 선생이 만든 건국동맹. 거기 관련 되어서 옥살이하고 해방되어서 나온 분이 있었거든요. 그분의 지도를 받고 이념과 사상이 정립되었다고 봐요. 그리고 충신열사에 대한 관심은 내 아버지셨구요. 말하자면 사상과 정치철학에 의해서 진보적으로 물든 것은 강용생선생을 만나서 그렇고 그 외에 충신열사에 대한 관심은 내 아버지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죠. 어릴 때부터 항상 중국의 충신열사들 얘기를 해 주셨고,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항일 무장투쟁 중 보천보사건 등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많이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통일된 한반도를 그리워하면서 한반도기를 걸어 놓은 겁니다.

17살이면 매우 어린 나이인데 그때부터 감옥살이를 하셨다고들었습니다.
1944년입니다. 해방되기 전이죠. 일본 경찰이 날 미워한거는 김일성 부대가 함경북도 보천보에서 일본 경찰을 습격했다는 사실을 유포했다고 해서 구류형을 내렸습니다. 경산경찰서 하양 경찰원 주재소에 지하 땅굴에 넣어 놓고 한 15일 정도 땅굴 속에서 구류를 살았지요. 그게 말하자면 1차 투옥인 셈입니다. 그 다음 2차는 1945년입니다. 한여름인데 해방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때 일본 경찰 하양 주재소에 수석부장 시노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를 불러서는 해군 지원병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뭐 아무리 생각해도 갈 수 없다 싶어서 도망을 가버렸죠. 경산 압량면 부적동에 누님집이 있었는데 거기 숨어서 있다가 달아났어요. 입대 날짜 후에 돌아왔더니만 붙잡아 갔습니다.

'조선 사람이 일본 천황을 위해서 목숨 바치기 싫어서 안가고 도망갔다왔다' 하니까 나를 경산 경찰서 유치장으로 보내더라고요 또 구류 처분이었어요. 그게 두 번째였습니다. 감방 생활이 조금 고급이 됐죠. 지하땅굴보다는 좀 낫더라고. 지하땅굴은 한 평 정도 되는데 뚜껑은 두꺼운 철판을 덮어 놓고 조그만 공기통 하난 뚫어 놓고는 사다리 놓고 오르락 내리락 했어요. 참 많이 맞았습니다. 두 번째 때도. 일제 경찰은 '소자지매'라는 게 있었어요. 소 자지를 가지고 매를 만들었는데 그거 가지고 고통을 주는데 옷 벗겨놓고 때리니까 피부는 많이 상해요. 뼈는 안 다치고 두어 달 가면 다 나아요. 미군정 경찰들은 몽둥이로 때려서 많이 다쳤는데 일제 때는 그랬지요.

어린 나이에 투옥 생활이 무섭지 않으셨어요?
무서웠죠 왜 안무서웠겠어요. 그 안에 들어가면 도둑놈하고 노름꾼하고 같이 있어야 되니까. 그리고 그 안에 요만한 구멍, 공기통 하나밖에 없거든요. 어둡지요 거기서 밥내려주면 밥 받아먹고 그랬어요. 처음 그렇게 구류 살면서 옥살이 경험을 했는데 두 번째 하양주재소 때는 간이 더 커졌는지 그렇게 무서운지 모르겠습디다. 내가 뭐 일본 천황을 위해서 죽는 게 싫어서 도망을 갔는데 마음에 고통 받고 그런 건 없었고 도망 잘 갔다 싶어서 만족감으로 갔고 그래서 유치장 생활을 하니까 별로 마음이 덤덤합디다. 어떤 불안이나 공포는 전혀 없었어요.

감옥살이한 게 합하면 일곱 번이라고 들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진보적인 청년단체 조선민족청년동맹에 가맹을 해서 활동도 해봤고 그러다가 직장에 들어갔는데 경북도청에 농업 경제과라는게 있었어요. 농산물 검사를 담당하는 검사계라는 곳에 부검사원이 됐었죠. 1944년 겨울에 독학으로 공부해서 고원시험이라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대구 상업학교 야간에 들어가게 됐죠. 대구 상업학교 학생 시절에는 민족 학생운동을 겪었어요. 1947년인데 11월 26일이었어요. 대구 공회당이라고 상당히 큰 건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녁에 웅변대회가 있었어요. 웅변대회 내용이 분단 반대였어요. 그래서 내가 미국과 UN을 들먹였죠. UN의 결의에 의해서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한다고 선거한다고 하니까, 나는 통일 독립 국가를 원하는 입장에서, 마음으로 반대하면서 미국을 비방을 하고 UN을 비방했지요. 그랬더니만 그것이 이제 미국의 포고령 위반이라네요. 미국과 UN을 비방했다 뭐 그런 내용 때문에 구속이 됐습니다. 벌금형을 받고 나왔죠. 사실은 그날 밤에 웅변대회가 테러 때문에 쑥대밭이 됐습니다. 그 책임까지 나한테 다 물렸어요.

웅변대회를 진행 중에 내 차례가 다가와서 마음의 준비를하고 있는데 테러가 발생했어. 테러한 인간들은 우익학생 단체인 전국학생연맹이었는데 총수가 서울에 고대출신 이철승이었어요. 경북학연은 대구대 농과대 학생인가 김일룡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깨가 딱 벌어진 게 학생깡패 비슷한 놈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경북학련의 위원장입니다. 그래 인자 학련패들이 와가지고 김일룡이 지휘 하에 와서 웅변대회를 완전 파괴해버렸습니다. 공회당에 전기도 나가고 아비규환이 됐지요. 30분 정도 지났는데 불이 들어왔어요. 연단에 조준영이라는 경찰 통신과장이 소대병력을 데리고 와 있었어요. 인솔자가 빨리 해산하라고 해서 내 친구들은 나를 호위해가지고 공회당 뒷문 어디로 빠져나왔어요. 그래가지고 그날 웅변대회는 완전 파탄이 나버렸죠. 또 신문에도 조금씩 나고 했는데 그 사건의 책임을 강창덕의 웅변 때문에 발생했다고 하면서 웅변대회를 소요사건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나한테 책임을 지라고 했어요.

하루 지났는데 대구 경찰서 손 뭐라는 사찰계 형사가 와서 날 연행을 해갔는데 가보니까 장난철이라는 사찰주임이 왜 미국을, UN을 비방하냐고 심문을 하더라구요. 나는 '미국이, UN이 남조선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주동하고 배후조종하고 UN이라는 허울 좋은 엉터리 기구를 통해가지고 우리를 분단, 분열을 시킨데 대한 반대였는데 그렇게 비판한 건데 그게 뭐가 잘못됐냐'고 했더니 그게 바로 미국과 UN을 비방했다는 거야. 그래서 분단 반대의 배후세력은 미국과 UN이라는 걸 내가 분명하게 지적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내가 당했지요. 당시에 나는 대구 상업학교 야간부 3학년인데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했습니다. 벌금 5천 원인가 물고 풀려나왔는데 다행이 대구상업고등학교가 교명이 바뀌어서 상원고등학교가 됐는데 거기서 나한테 명예졸업장을 주더라구요. 2005년인가 그랬어요, 62년만이었지요. 명예졸업장 내용이 민족 운동에 공로가 크다 뭐 그런 내용입디다.

열일곱에 항거의 인생을 시작하셨는데, 고향이 경산이라고 하셨죠? 그때까지만 해도 고향 분위기는 전통적인 유학이 대세였을텐데요?
내가 본적지가 경산군 하양면인데 대체로 그런 분위기인 것은 맞아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태평양 전쟁 때문에 우리 조선사람 억눌리고 할 때라 유교적인 전통 분위기보다는 의로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훨씬 더 컸다고할 수 있죠.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옛날 중국의 충신열사들,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 그런 충신들의 얘기를 많이 들어놓으니 그래서 그런가 일본 놈 반대하다가 내가 감옥 사는 거. 그래도 안 죽으니까 다행이다 싶고 뭐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선친께서는 한학을 하셨습니까?
한학을 해가지고 마지막 과거도 봤어요. 초시까지 봤거든? 초시는 경상도 감찰사 앞에서 봤고 그 다음이 대과였는데 김홍집 내각 때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렸어요. 그래서 대과를 못보고 있다가 구한말 광무시대지, 그때 중앙관서 탁지부 주사로 있다가 합방되는 바람에 낙향을 하셨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사서삼경은 안 되고 그저 통감에 있는 중국 열사들 이야기. 충신열사들 얘기를 많이 듣고 커서 그랬는지 내가 이것도 하나의 일종의 일본 놈국가 권력하고 내가 싸우는데 떳떳하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죠.

사무실 문에 걸린 표지판을 보니 이름이 또 하나 있네요. 야성사? 어떤 의미인가요?
네. 아호 따서 지은건데 내 아호가 야성이거든. 이 호가 마음에 들어서 계속 쓰고 있어요. 내가 대구 공회당 웅변대회 사건 때문에 포고령 위반으로 대구 형무소에 들어갔다고 했잖아요? 그때 검사는 권오택이었는데, 미결사 들어가 보니까 정치범도 많이 있고 일반 잡범도 있고 했어요. 한 방에 열 한 명 정도 생활하는데 그 생활에도 선배들이 있었어요. 어떤 선배인가 하면 10월 항쟁에 관련되어서 들어와 있던 분이 있었는데 왜관 출신의 감방장이었죠. 그 감방장 어른이 나를 무척 귀여워하면서 호를 지어 주더라고. 들 '야野'자 별 '성星'자. 그때 물어 봤지요 무슨뜻입니까 했더니만 들 야野 이거는 민중이라고 생각하고 민중의 스타가 되라했어요. 깜깜한 밤에 별이 되어가지고 어두운 세상을 내는 길잡이가 안 되나, 그러니까 들별, 야성 하는 게 좋다. 그래서 호를 받았는데, 그 홋값 한다고 한평생 험한 길만 자꾸 걸었던 것 같아요. 야성 홋값 한다고.

근데 들어보니까 그럴 만하네요. 들별이라고. 그냥 한자로 야성 하는 것 보다 우리말로 들별 하니까 정말로 민초들, 민중들이런 느낌도 나오고.
그렇지? 그래서 좀처럼 시를 잘 안 쓰는데, 대구에 10월 문학회가 있어요. 거기서 10월 항쟁에 대한 시를 꼭 한 편 써달라고 해서 내 평생에 처음이고 마지막 시인데 그때 들별 강창덕 이렇게 한 일이 있어요 제목은 '10월 항쟁의조약돌’이라고 붙였었지요. 그래서 그 당시 10월 항쟁의양상 그리고 끝에 가서 야산의 빨치산까지 발생한 과정 뭐 이런 것을 설명조로, 10월 항쟁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느끼고 보고 한 것 그걸 그대로 적은 건데 그게 하나의 시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저기 보면 '야초린부생'이라. 또 '성광야유명이라고 하는 것도 저 친구가 지어서 자기 글씨로 서서 주는데 들별은 아무리 유린해도 다시 살아나고 별빛은 밤이 어두울수록 더 밝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때 나한테 호를 지어준 그 어른은 민중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라는 뜻으로 들 야자, 별 성자로 지어주셨는데, 결국 그 홋값 한다고 전과 7범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하!

풀려나서는 본격적으로 저항의 길을 걸으신 거겠네요?
내가 서상일 선생하고 인연이 된 거는 49년부터예요. 경북도청 말단직원 하다가 대구 공회당 사건 때문에 한 달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는데도 해고하진 않더라고. 49년 가을 쯤 되니까 보도연맹 문제가 나오더라고. 내 육감에 보도연맹 이건 피해야 되겠다 싶어서 일단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갔지요. 공부를 제대로 못한 한이 있었는데 결국 돈이 없어서 대학도 아닌 조선정치대학관이라는 게 있었어요. 요즘의 건국대학인데 전문부 정치학과 2학년에 들어갔어요. 자격도 안되는 게 어떻게 들어갔냐 하면 소위 말해 꼼수를 좀 썼죠. 대구 출신이었던 서상일 선생을 찾아갔어요. 그래 인사를 하고 나는 대구도청에 근무를 하면서 대구 상업학교에서 분단 반대운동을 하다가 퇴학 당해서 감옥 살다 나왔는데 공부가 더 하고 싶어서 서울로 왔으니 날 좀 도와 달라고 했죠. 그렇게 그분의 도움으로 심부름도 하고 서류 정리도 좀 하면서 비서역할을 했지요. 서상일 선생이 산업분과위원장을 하셨는데 자리가 비었으니 나더러 상무자리를 좀 보라고 하셔서 또 심부름을 좀 했지요. 그때 있었던 일인데 재미난게 당시 경북 도지사 장인환 씨라고 있었는데 국회 산업위원회에 들어온걸 보고는 내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는데, 장지사가 내 앞에 와서 절을 하는 거라 도지사한테 절을 받아본 기분이라는 게 참……. 그렇더구만요.

1927년 경산 하양에서 태어나 경산 진량중고등교사,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반일 반독재 평화통일 민주화운동으로 7번 투옥하고 약 13년을 복역했다. 2006년 참여정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안동MBC)
1927년 경산 하양에서 태어나 경산 진량중고등교사,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반일 반독재 평화통일 민주화운동으로 7번 투옥하고 약 13년을 복역했다. 2006년 참여정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안동MBC)

1952년의 일인가요? 서상일 선생이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왔던 게? 그 당시에도 일이 있었죠 선생님께?
그러니까 그게 한민당 후신이지. 안재홍 선생하고 이청천 장군하고 만든 게 민주국민당인데 이승만에 대한 대항 세력이었어요. 서상일 선생이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를 하시고 나는 민주국민당 경북도당 사무차장을 맡아서 당사 안에서 거의 먹고 자고 할 때였어요. 자유당에서는 이승만이 또 대적할 사람을 내려 보냈는데 배은희라는 사람이었어요. 완전히 경찰 선거를 했었죠. 그때 나는 선거 사무를 돌보면서 했는데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주장할 때입니다. 평양 가서 점심 먹고 압록강 가서 저녁 먹고 이러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을 전쟁 중이었죠. 그래서 나는 이건 아니다. 이건 평화통일을 해야지 무력통일은 안 된다 민족의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에 평화통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면서 선거운동 같이 하는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경찰에서는 이걸 가지고 나를 보안법 및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했어요. 또 남대구 경찰서에 구속이 되었는데 당시 검사가 묻더라구요. '왜 평화통일을 주장하냐? 국시가 반공통일인데. 반공통일하자면 전쟁을 통해서 북한을 타도해야하는데. 왜 또 평화통일 주장하냐?'면서 서상일 선생이 선거운동 때 유권자들한테 담배도 돌렸다는 둥 조작을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보안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잡혀들어갔어요. 나를 투표일이었던 6월 5일까지 우려먹더라구요. '서상일의 비서 강창덕, 선거법 위반으로 엄중 구속문책 중이다'라는 내용을 각 투표소 마다 붙여놓고는 서상일한테 표찍어 봐야 안되니까 찍지 말라면서. 일단 선거 끝나니까 내보내 주대. 허허. 며칠 지나니까 그래 뭐기소유예, 이래가 내보내더라고 그게 네 번째였죠.

이승만 저격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고 어딘가 자료에서 봤습니다. 사실입니까?
1952년 4월쯤이었을 겁니다. 2차 내각제 개헌운동이 장택상의 잘못된 선택으로 실패로 끝나버렸어요. 서상일 선생을 모시고 부산에서 내각 개헌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부결됐어요. 이승만이 장택상을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을 했는데 그걸 받아들일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상일 선생하고 조병옥 박사 등 개헌파들이 장택상 씨를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제발 좀 이승만 말 듣지 말고 끝까지 우리 한 대열에서 내각제 개헌하자 그래서 당신이 국무총리 할 수도 있다. 독재치하에서 국무총리가 뭐 좋으냐 만류를 했지만 장택상 씨는 끝끝내 자기 고집대로 해버렸어요. 2차 개헌 운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참 앞이 캄캄했지요. 한국 정치가 암담해졌는데. 그때 김시현 선생이 서상일 선생을 찾아와서 이승만 저격 문제를 의논 했어요. 이승만이 살아있는 한 도저히 우리나라를 바로 잡을 수가 없다 결국 이승만을 처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극비리에 논의를 하고 저격을 준비하게 됐죠. 누구를 저격수로 하느냐 아주 단단한 사람을 구해야 안 되겠나. 이런 이야기를 두 어른이 하실 적에 내가 그 말을 알아듣고는 자청을 했죠.

내가 한 번 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니. 총 쏠 줄 아냐고 하시길래 일제 때 군사훈련도 조금 받아보고 해서 안다고 했죠. 사실 나는 이번 기회에 내 목숨 한 번 바치고 싶습니다 라면서 임무를 달라고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어요. 그것도 서상일 선생 집주소로 나와버렸지요. 내가 그래도 무보수지만 정치요인에 대한 경호원이 되어있는데 영장이 나올 리가 없다고 길을 찾고 있었는데 결국 제주도 훈련소까지 끌려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고 부산서있었던 6.25 행사 때 저격사건이 있었지요. 김시현 선생의 지시로 유시태라는 분이 저격을 했는데 권총이 불발탄이 되어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내가 영장만 안나왔으면 그 자리에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투옥은 언제였습니까?
장면 정권 때였습니다. 장면 정권이 2대 악법을 제정하려고 했습니다. 2대 악법이 뭐냐 하면 과거에 없었던 반공법을 만들려고 했고 또 데모를 막으려고 데모 규제법을 입법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그 두 법을 우리는 악법이라고 하고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했습니다. 대구에서는 61년이었습니다. 4월 4일 대구에서 각 운동 단체가 총망라 되어서 공동투쟁 연회를 만들어서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했습니다. 그게 4기 데모인데 대구에서도 유사 이래 가장 큰 데모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 만경관에서 중앙통그 사이에 모두 수천 명이 모여 있는데 그래서 대구 역전으로 대회의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못 가게 막았어요. 밀고 당기고 뭐 참 육탄전이 벌어졌어요.

대구 역전에 먼저 골인한 사람들 몽땅 실어다가 대구 경찰서로 갔고 그 다음에 대구 형무소로 갔는데 그게 다섯 번째예요. 검사가 심승택인데 내가 잘 싸웠어요 그래서 기소유예 받고 나왔죠. 어떻게 잘 싸웠나 하니 데모에 참가한 사람들 사진을 내 놓고 날 찾는 거야. 내 사진이 있기는 하더라도 옆에서 찍힌 것인데 나만 알아보겠더라고, 근데 심승택 검사는 모르는 거야. 그래서 넘어갔어요. 아이고, 이제 됐다 싶어 물증이 없어졌으니 그때부터 검사하고 막 싸웠습니다. 경찰이 나한테 맞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공무집행방해 아니냐라고 하는데 나는 막 따졌어요. 내가 영남일보와 대구매일 신문기자 출신이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죠. 검사한테도 마음대로 해보라고 큰 소리를 쳤죠 그랬더니만 그이튿날 밤에 출소시켜 주더라구요. 기소유예로…….

신문기자를 하셨었나요?
내가 어떻게 해서 하게 됐나 하면 1956년 5월 15일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때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출마를 했죠.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이었고 진보당은 대통령 후보 조봉암, 부통령 후보 부산출신 이학박사 박기출 이렇게 선거를 치르게 되었죠. 나는 조봉암을 지지하고 지원하고 싶었어요. 당시에 진량중고등학교 교사 생활 1년도 안되었던 때인데 부부교사였던 아내는 그냥 두고 나만 자직하고 나왔어요. 진보당 준비 위원회에 가담하고 선거때 경산군 책임을 맡았죠. 말하자면 경산군 선거본부장이야. 전국 투표율에서 경산이 최고 높았습니다. 76% 가까이 나왔거든요 대구가 한 74% 정도 나왔어요. 조봉암 후보 표가 삼만표가 넘었어요. 이승만이 만표를 좀 넘었었지요. 내가 참 그때 흐뭇했어요. 가장 한스러운 건 이승만저격 못한 거였고, 가장 흐뭇하게 생각하는 건 조봉암 표가 경산 내 고향 땅에서 전국 최고 득표를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 때문인지 자유당에서 자꾸 날 괴롭혀서 한때 부산 가서 피신 겸 해서 한 몇 달 있었습니다. 9월에 다시 대구로 왔는데 영남일보에서 공채기자를 뽑는다고 해서 응시를 했습니다. 학과시험은 1등을 했는데 나이가 서른 가까이 되니까 일선 기자로서는 부적격이었는데 다행히도 백기만 선생이 내 답안지를 보고는 논술실에서 일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붙어서 견습기자 거쳐서 한3년 가까이 되는데 그게 58년인가 그랬지요. 영남일보 사장이 대단히 좋은 분이셨고 민족주의자들도 많이 찾아오고 한 분이셨는데 내외방직을 운영하면서 어려우니까 자유당에 들어가게 됐어요. 나더러 자유당에 유리한 기사를 쓰라고 하는거야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만두고 나왔지요. 그러다가 두어 달 지나고는 대구매일 최주필이 나보고 같이 일해보자고 해서 하다가 4.19 끝나고 5월에 옷을 벗고 나왔습니다. 언론계 생활하면서 그래도 좀 흐뭇하게 생각하는 건 그 자유당 말기의 부정선거를 특파원 생활 하면서 좋은 기사를 많이 썼다는 겁니다.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도 취재를 하셨죠?
대구사범을 나와서 진보적 성향이었던 편집부장이 경산코발트 광산에 사람이 많이 학살당했다는데 그걸 우리가 세상에 한번 밝히자면서 강창덕 기자가 취재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어요. 평산동으로 지프차를 타고 갔습니다. 일제 때 코발트 광산을 했던 곳인데 폐광에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또 내가 신문기자하면서 또 한 번 아주 통쾌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경산 코발트 광산에 가서 취재를 한 후에 이승만이 반인도적이고 이걸 참 학살당한 사람은 원혼이 되어있고 유가족들은 어떻겠나 싶어서 그 길로 기자를 그만두고 피학살자 유족회를 발족시켰어요. 1960년 5월6일쯤인데 이승만 하야 후에 열흘 쯤 됐을겁니다.

코발트 광산 기사는 5월 22일자였구요. 신문사 그만두고 내가 고향 가서 만든 것이 '경산군 피학살자 및 피해자 실태 조사회'였습니다. 각 면에다 연락소 간판을 붙여놓고 전단지를 만 장 정도 만들어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게 모인 게 약 삼백 오, 육십 장 쯤 되더랍니다. 실태 조사회가 끝나고 난 후에 유족회를 만들어서 제2 공화국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기 8월 15일 이전에 합동 위령제를 지냈어요. 유가족, 피해자 등등 500여 명 정도 모였어요. 경찰들도 물려놓고는 합동 위령제를 무사히 끝냈는데 그날은 참 정말로 모두가 다 울음바다가 됐지 뭡니까. 그게 아주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정치 활동도 좀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야당으로서 4.19 공간에 결성된 게 사회대중당입니다. 완전히 진보는 아니었지만 나도 진보적 정당에 내가 가서 정치 활동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사회대중당에 입당 후 경산군당위원장이 됐습니다. 7.29 총선거때인데 그 당시 김시현 선생이 안동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서상일 선생이 대구을구에서 당선되었을 때입니다. 나도 상향식으로 군당과 경북도당 공천이 확정되었는데, 중앙당 공천이 당연히 된 줄 알고는 군청 선관위에 등록까지 하고나서 선거운동을 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나중에 느닷없이 이형우라는 사람이 자신이 공천을 받았다면서 선거에 나섰더라고요. 군당이나 도당 공천에서 떨어졌던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참모들이 무소속이라도 가보자고 했지만 나는 후보 등록한 걸 취소하고 공탁금 50만원 날려버렸죠. 그래서 입후보했다가 선거운동도 하다가 도중하차가 되어버렸어요.

여섯 번째는 어떤 일이었습니까?
1961년 5월 10일이었던 것 같네요. 사회당 경북도당 주최로 만경관 앞에서 남북 학생회담 촉진 대구 시민 궐기대회를 열었어요. 그때 서울대학이 중심이 되어서 남북학생회담을 하자고 제의를 안 했나. 그때 구호가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였어요. 15일 오후에 올라가서 서울에서 하룻밤 자고 있는데 5.16이 나버렸어요. 5.16이 났는데 온통 혁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5.16은 쿠테타인데 확실한 정체를 좀 밝혀야 안되겠냐고 했었죠.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옛날 여순사건 때 그때 남로당 프락치가 되서 까닥하면 죽을 뻔했는데 용케 살아 소장까지 된 박정희가 쿠테타음모를 꾸몄다는 겁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빨리 대구로 내려가서 사회당의 모든 조직문서를 빨리 없애 버려야 되겠다고 급히내려왔는데 대구에서 딱 잡아버리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대구 경찰서를 데리고 가서 군사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공소장에 보니 죄목이 남북 학생회담 촉진 시민 궐기대회에서 강창덕이가 도당 조직위원장으로서 궐기사를 했다 그래서 유죄다 이러는 겁니다. 합법적인 행사였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소급법이 적용되어서 교원노조, 피학살자유족회, 사회당, 통사당, 교원노조 할 것 없이 다 잡아 넣어 버린 거예요. 그게 여섯 번 째인데 7년 징역을 받고 2년 8개월을 살았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무죄를 받았어요.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이나 민족운동을 하면 제도권보다 더 고통스럽고 배도 고프고 하셨을텐데 어떻게 견뎌 내셨나요? 그간 사모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그래 내가 어떻게 내 가정을 지탱했나 하면 다 내 아내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백수인 나와 결혼을 하고는 다시 복직을 했지요. 애 엄마가 애들 다 키우고 했어요. 내가 만든 문자 중에 '위방무취 가무면'이라고 나라를 위해서는 부끄러움이 없는데 가족에 대해서는 면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야생마처럼 뛰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제일 컸던 사건이 인혁당이었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고문 조작한 사건인데 역시 본질은 유신반대운동입니다. 그건데 이걸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긴급조치1호, 긴급조치 4호 위반. 죄목이 다섯 가지입니다. 무기징역 구형에 무기징역언도였어요. 2심에도 그대로, 3심도 그대로 선고되어서 8년 8개월 복역했습니다. 내가 했던 활동이 67년에는 반독재 재야민주세력 단일후보 추진위원회 라는 게 있었습니다. 대선에서 난립한 야당 후보들이 힘을 합해서 박정희를 낙선시켜야 되니 후보 단일화 하자는 거였고 그 운동을 대구의 진보계, 혁신계가 중심이 되어 진행했습니다.

내가 대변인을 맡고 의성 출신의 유시벽 선생을 대표로 모시고 난민전의 이경은 동지가 또 대외 섭외 관계를 맡고. 또 4.19때 대구대 학생으로 용감하게 활동했던 경만진 동지하고 모두 그렇게 어울려서 단일후보 운동체를 만들었지요. 결국은 윤보선 선생을 단일 후보로 만들어냈습니다. 이래가지고 단일후보 운동을 했는데 결국은 또 실패 안했습니까. 실패 하고 난 후에 고민을 하다가 노동운동으로 방향을 바꿔야 되겠다 싶어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노동운동도 제대로 못한게 통혁당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남조선 해방전략당'에 가담을 했었는데 잘못될까봐 그 길로 다시 서울을 탈출해서 부산으로 갔습니다. 부산서 1년을 지내다가 주민등록이 없어서 고향으로 다시 올라갔는데 거기서 경산경찰서 정보과 형사 두 놈이 쫓아오더라구요. 하양지서로 데리고 가서는 하는 말이 나더러 이북에 다녀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산 살다 주민등록 때문에 왔는데 생사람 잡지말라고 했죠. 마음대로 조사해보라고 했어요. 12시 넘어서 까지 조사를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피의자 심문조서가 아니고 소재 확인 조사였어요. 그래서 마음을 놓고는 주민등록증이나 만들어 달라고했죠. 그러고는 대구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서 위수령을 발동하고 그러더라고. 그때부터 반유신헌법운동이 일어났는데, 우리는 대구백화점 안에서 민주수호경북협의회를 만들어서 운영을 하다가 전부 폐쇄당하고 그 다음부터는 위장사업을 하면서 지냈어요. 와룡산에서 염소목장을 운영하면서 겉으로는 장사를 하고, 실제로는 유신반대운동을 했습니다. 결국 염소농장도 그만두고 지하신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신문 이름을 참소리 그래서 업체 이름은 참소리사로 정했죠. 내가 창간사를 쓰고 했는데 또 그 놈들이 냄새를 맡은 겁니다. 창간도 못하고 긴급조치로 모두 체포됐어요. 그게 인혁당 재건위사건입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연관이 있었던 건가요?
4월 25일인가 그래요.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사건으로 기자회견을 하는데 배후가 인혁당 그룹이다 이거야. 아무래도 나한테도 불똥이 날아올 것 같아서 그날 밤에 보따리 싸서 내 누이동생한테 돈 백만 원 얻어서 또 부산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는 매부가 형사들한테 들볶여서 부산까지 찾아왔었지요. 일가친척들 모두 들볶았던 모양입니다. 부산에 있는 양복점에서 담배 한 대 피고 있는데 거기서 그만 답싹 붙잡혀버렸어요. 그런데 수첩을 버려야되겠다 싶어서 내가 가짜로 변소에 좀 가서 대변 좀 봐야 되겠다고 갔는데 문을 열어 놓으라는 겁니다. 그 길로 붙잡혀 올라왔어요 남대구 경찰서로. 그날 밤새도록 고문을 받았습니다. 몽둥이 찜질은 기본이었고 나무벤치에 묶어 놓고 때리면서 유신반대했다고 실토하라는겁니다.

나중에는 물고문하더라고. 주전자에 물을 가져오더니 콧구멍에 물을 넣고 고춧가루도 조금 넣었는 모양이야. 좀 맵더라고. 그리고는 내가 기절해버렸어요. 얼마 지났는지 하튼 일어나보니까 자기들이 조서를 다 만들었다고 하면서 내가 반 혼수상태에 있을 때 내 지장을 찍었어요. 그 이튿날 우리 집 가택 수색하러 가서는 헌 라디오 하나 있는 거 그거 들고 나오더니만 그게 나중에 내가 북한방송 들었다고 그게 증거라면서 그렇게 들어간 게 검사 구형이 무기징역이었습니다. 내가 활동하면서 사람들을 포섭하고 유신반대 데모기사를 잘 나오도록 주동했다면서 군법회의에서 자기네들 마음대로 출입제한 시켜놓고는 강창덕한테 포섭됐다고 분명히 말하라면서 다른 증인들을 심문한겁니다. 아니, 나중에 구형하는데 무기야. 깜짝 놀랐잖아. 일반 재판 같으면 뭐 재판감도 안되는데 공소장 보면 염소장사하면서 위장사업을 했고 참소리에서 지하신문을 발행하려고 했다. 이게 주 공소사실인데 나하고 이경환하고 나경일하고 셋이 인혁당과 같은 목적의 단체를 만들었다 이거야. 1심, 2심 모두 똑같고 대법에는 접수만 하고는 재판도 안했어요. 결국 8명이 판결하고 그 이튿날 18시간만에 전부 다 집행을 했는데. 그래 유신반대 사건 때 무기징역 받은 경우가 그겁니다.

8년 8개월 복역하신 거죠?
그래 징역 살다 나와 보니 뭐 할게 있나? 집사람 만나보니 빚투성이었어요. 할 수 없어서 살던 집 처분하고 옛날 양계장 했던 자리에 임시로 만들어놓은 방에 애들 옮겨놨는데 형편이 없었지요. 애들은 아버지 오면 뭐 좀 나을까 싶었겠는데, 그래서 나도 뭔가 해야 되겠다 싶어서 아파트 경비원 자리를 구해서 일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7개월쯤 하고 겨울 보낸 후 이듬해 그만 뒀어요. 또 백수 생활이었는데 6월항쟁이 터진 거죠. 그때부터 민족통일 재건운동, 전민련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 세대들 학생운동할 때 같이 다니면서 한마디씩 하고 지냈죠. 노태우 대통령 때 잔형 면제 사면을 받았는데, 복권 사면은 못 받았어요. 우리 인혁당 재건위 그룹에는, 민청학련 쪽은 전부 다복권 사면까지 돼서 이철이고 유인태고 전부 다 국회의원 해먹고 그랬는데 우리는 안 되더라고, 그 이후로도 계속 감시만 받고 살았죠.

평생 저항 운동을 하시다가 결국은 무기징역까지 받고 집행정지 나오고 잔여형 면제까지 받긴 하셨는데 어찌됐든 그때까지유죄였던 거죠?
그게 2006년인가 2007년인가 그랬어요, 재심이. 가톨릭정의구현 사제단 사람들이 우리한테 관심을 많이 가졌었어요. 가톨릭인권위원회에서 우리 문제를 재심해보자고시작을 했어요. 결국 무죄 판결이 났는데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지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고 사람이 멍해지더라구요. 이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내가 꿈을 꾸나, 뭐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어요. 배상금도 받게 됐죠.

근데 그 배상금 청구해서 받고 난 다음에 또 문제가 생겼더라고요.
부당이득이었다고 반납하라고 하는 거였어요. 내가 물론 청구를 했으나 무죄가 나서 한 건데 말입니다. 기가 막혀요. 배상법에 의해서 32년간에 대한 이자를 계산해서 2심에서 판결했는데 대법까지 가려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가집행을 신청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됐나하니 받아서 가집행 받아서 빚도 갚고 가집행이 판결액의 약 한 50프로? 한 3분의 2 정도 됐어. 그래 받아서 그거가지고 빚도 갚고 이래서 평생 처음으로 아파트라고 내집이라고 하나 사가지고 좋다 그러고 있는데 대법에서 대법관들이 모여서 과거 배상금의 이자 계산법을 완전히 무시 해버린 겁니다. 고법 최종판결이, 최종변론 있는 날로 부터 이자 계산 한다고 하니 32년 이자가 7~8억 되는데 가집행해서 받은 건 12억 가까이 되는 겁니다. 빚도 갚고 아파트도 하나 사고해서 마음이 좀 홀가분하다고 했는데 느닷없이 대법원에서 배상금 이자 계산법을 싹 바꿔버렸어. 약 한 60%가 부당이득이 되는 거야. 그러니 국가에 반납해라 이건데. 그래서 서울고등검찰청에서 독촉장이 오더라고 조금 있으니 국정원에서 민사소송을 걸어왔어요. 우리는 모두 채무자가 됐어요. 국가는 채권자구요. 이자도 연 20%랍니다. 도둑놈들이지요, 정말.

그럼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요?
지금 현재 못 내고 채무자가 되어 있지요. 대구지방 법원에서 재산압류하려고 내 가재도구 냉장고하고 에어컨하고 셋방 보증금 300만원을 압류해 버렸어요. 그냥 이러고 있는거죠, 뭐.

평생 저항하시고 민주화 운동을 하셨는데 조금 인정을 받았나 싶더니 다시 지금 이 상황이네요. 어떠세요 심경이?
내가 그 판결을 받고 국정원 마당에 가서 만천하에 고한다하고 유서를 써 놓고 거기서 분신자살 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나더라구요. 이렇게 억울한 데가 어디 있노. 박정희는 육체적 고문을 하고 박근혜는 내 경제적으로 사람 고문을 하니 이런 세상에 내가 어떻게 사노 싶어요. 내가 분신까지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그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지금 뭐 밤낮없이 이자만 늘어나는 거지. 우리 연루자가 16명인가 그랬는데 가족 합치면 70명이 넘어. 70명이 지금 전부 국가에 채무자가 되어 있는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 되고 국정원장이 바뀌고 그래서 국정원에서 실태 조사하러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 사정 얘기를 다했는데 국정원에서 그건 어쩔 도리가 없지. 민사 재판에서 판결을 한 일을 가지고 국정원이 어쩌겠나. 그러면 이거 구제책은 뭐냐.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이 문제를 해결하지 해결할 방법이 없다. 한 가지 또 할 수 있는 건 대법원 판사 중에 과반수 이상이 우리 관계를 해결하고 싶은 판사들이 대법관이 생기면 다시 재심을 해가지고 과거에 대법에서 잘못한 판례를 뜯어 고칠 수는 있다고 하더라구요.

진짜 질곡의 90년을 힘들게 넘게 살아오셨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아주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잖아요. 이육사기념사업도 하시고 전태일 기념사업회도 하고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세요?
몰라. 어떤 채무감. 의무감. 그게 발동돼서 그렇지. 내가 무슨 이권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 운동에는 내가 참 가담 안하고는 내 마음이 허락을 안 해. 그래서 죽을 때까지 무슨 고난을 받더라도 내 갈 길, 옳은 길이라고 하면 나는 끝까지 가보겠다. 촛불집회 할 적에도 한 번도 안 빠지고 촛불집회 참가하고 그랬어요. 앞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열사님들 모시고 그분들 정신을 계승하고 살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한테 '통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완전 통일독립국가, 반외세 자주국, 반전 반핵 한반도평화, 민족 대단결. 그걸 항상 가슴에 품고 살지요. 그 다음에 이 열사님들 정신을 어떻게 해서든지 계승 발전하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겠다 하는 그 생각. 그래도 이제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 뭔가 좀 더 값있는 생활을 하다가 죽고 싶은데. 하는 방법은 다른 거 없어. 나는 뭐 투쟁의 현장에서 자주통일 독립운동에 투쟁의 현장에서 내가 살다 죽고 싶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소원은 투쟁의 현장에서 나는 죽고 싶다. 그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가지고 하루하루 이렇게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청년들이 참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인데 그청년들한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한 마디만 들려주십시오.
청년들한테는 나는 이 세상을 올바른 세상으로 만드는데 힘써 달라는 것뿐입니다. 청년들에게 바라는 건 조국과 민족에 대한, 통일에 대한, 반일 자주 통일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통일 운동에 몸 바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민주주의도 젊은 청년들의 각성 없이는 해결을 못 한다는 거. 그래서 의식화 된 그 청년들에게 바라는 건 초지일관. 초지일관을 바랍니다.

평생을 민주화와 자주평화통일운동에 몸 바쳐 온 선생은 마지막으로 정론직필을 말씀하셨다. 왜곡되어 있는 한국언론에 대한 따갑지만 애정 어린 말씀이셨다. 4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에도 잡고 있는 손에 강직함과 신념이 느껴졌다. 부디 건강하시길 그리고 건강한 청년의 삶을 누려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7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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