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탐방 '같이 가볼까'⑦-이육사문학관
문화공간탐방 '같이 가볼까'⑦-이육사문학관
  • 신중영(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 승인 2020.10.1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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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의 뜰에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안동에서 청량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는 여전히 공사 중이다. 굽이돌던 길들이 지난하다 싶을 만큼의 시간차를 두고 조금씩 펼쳐지고 확장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한편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아서 오히려 정이가는 길이다. 이 길은 한국국학진흥원을 지나 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관, 도산서원 진입로를 거치면 도산면사무소 앞 사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토계천을 따라 가면 이육사의 마을에 가까이 왔음을 눈치 챌 수 있는 264청포도와인 와이너리를 만날 수 있다.

와이너리를 지나면 퇴계 이황이 말년에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계상서당과 퇴계종택,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 보인다. 길은 이어져 퇴계 묘소 표지판과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가 우뚝한 하계마을에 이르는데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이다. 또한 한일강제병탄에 분개하여 자정 순국한 의병장 출신 향산이만도의 마을로도 유명하다. 하계마을을 지나 일명 '땅재'라고 불리는 언덕 하나를 넘어서면 마침내 거짓말처럼 아늑한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이곳이 시인이자 투사였던 육사이원록 선생과 그의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란 원촌마을이다. 7월의 원촌은 그의 시처럼 청포도가 익어간다.

이육사문학관과 원촌마을(ⓒ강병두)
이육사문학관과 원촌마을(ⓒ강병두)
이육사문학관 정신관(ⓒ신준영)
이육사문학관 정신관(ⓒ신준영)

원촌마을은 퇴계 후손들이 모여 살던 진성이씨 동성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내 동리란 곳은 겨우 한 100여호나 되락마락한 곳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녀온 이땅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었습니다'라고 육사가 「계절의 오행」에서 밝혔듯 강한 혈연적 연대의식과 가학으로 이어온 퇴계의 정신적 유산이 마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이어지는 마을이다. 이러한 규범과 도리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더 극명하게 발현되어 이육사와 같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여럿배출하였다. 원촌마을 초입에는 「절정」을 새긴 시비가 있고 그 앞에 책 한 권을 펼쳐들고 멀리 칼선대를 향해 앉은 육사와, 그를 만나 오래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한 공간이있다.

1941년 육사 선생이 친구 조규인에게 보낸 사진과 친필(ⓒ이육사문학관)
1941년 육사 선생이 친구 조규인에게 보낸 사진과 친필(ⓒ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육사 이원록선생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고 현창하는 공간이다. 육사탄신 100주년이 되는 2004년 7월 31일 고향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 안동시에서 직영하던 것을 문학관 관리업무의 전문성과 효율성등을 따져 2008년 12월부터 (사)이육사추모사업회(이사장 권부옥)에서 민간위탁운영하고 있다. (사)이육사추모사업회는 이육사문학관 운영을 통해 육사의 독립운동과 문학적 업적들을 널리 알리고, 육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의 문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행사의 개최 및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이후 3대문화권 문화·생태 관광기반 조성사업의 전략사업인 유림문학 유토피아사업의 범주에 속해 시설을 증축 및 신축하여 2017년 2월 재개관 하였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육사문학관 내부모습(ⓒ신준영)
이육사문학관 내부모습(ⓒ신준영)

이육사문학관은 육사의 독립운동과 문학적 업적들을 널리 알리고, 육사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행사의 개최 및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육사 추념식(1월 16일), 이육사문학축전(년 4회로 나눠 학술발표회, 작가 초청 낭독회, 음악회, 문학학교, 이육사시문학상 시상식, 시극 공연, 문학 강연, 전국육사백일장 및 전국육사시낭송대회 지원, 재능나눔 시낭송대회, 지역작가 북콘서트, 작가와 함께 걷는 육사로드 등), 청포도사생대회, 중국과 러시아에서 진행하는 해외이육사문학제, 지역 작가 초청 갤러리 상설 전시, 나라사랑 글짓기 대회, 이육사영화극장, 문학관 특성화 프로그램, 상주작가 배치 및 프로그램 운영, 내 고장 독립운동 바로알기, 지역문화전문가 양성을 위한 이육사아카데미 등 각 분야의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육사독립운동자료집과 평전, 문학전집, 학술서, 영어와 중국어 번역의 육사시집 등을 발간하여 육사의 삶과 문학을 기린다. 2017년 최우수문학관 선정(한국문학관협회), 2018년 소장 자료인 육사육필 '편복'의 문화재 등록(등록문화재713호), 2019년 5월에는 경북1호 공립문학관 등록 등의 성과를 이뤄내기도 하였다.

이육사문학관은 2017년 증축과 신축 및 주변시설 정비를 통해 기존의 전시관 및 복원된 생가 건물의 단순한 구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설과 공간을 확충하게 되었다. 문학정신관은 문화집회시설로서 2개층의 전시실과 세미나실, 강의실, 다목적실, 영상실(기획전시실), 사무실(관장실, 회의실), 수장고, 북카페(노랑나비) 등을 포함하고 있다. 문학생활관은 연수 및 문학인 집필실 용도의 객실 20실(각 실 4인 정원)과 식당, 관리실, 세미나실, 야외휴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살롱 육우당은 'ㅁ'자 형태의 한옥 건물로 육사의 생가를 복원한 건물이다.

문학관 주변 시설로는 육사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인 윷판대 가는 길과 칼선대 가는 길, 육사 묘소길이 있다. 육사 생가 터에 '청포도 시비'를 중심으로 조성된 시비공원에는 최근 안동무궁화보존회(회장 이진구)에서 '안동무궁화'를 식재하여 육사의 정신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육사가 살던 시절 백여 호 남짓 되던 마을의 가구 수는 현재 열 가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지구로 지정되어 대다수 가구가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떠난 집들이 자리했던 곳에는 생태경관녹지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올해는 메밀밭과 해바라기밭이 조성되어 관람객들의 볼거리를 더하고 있다.

1월 1일과 설날, 추석과 월요일을 제외하면 이육사문학관의 문은 늘 열려 있다. 2017년 1월 재개관 이후 매년 4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갔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이 있지만 사태가 잠잠해지면 예전의 관람객 수를 회복할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육사문학관은 2008년 민간위탁운영과 함께 취임한 조영일 시조 시인에 이어 2020년 2월부터 손병희 안동대학교 교수가 관장 직을 맡고 있다. 이위발 사무국장을 비롯하여 십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따님 이옥비 여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옥비 여사는 네 살 때 마지막으로 뵌 아버지 육사의 모습을 기억한다. 어머니 안일양 여사와 삼촌들, 아버지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관람객들에게 아버지 육사의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준다.
이옥비 여사가 기거하고 있는 목재고택 누마루에 앉으면 맑은 날엔 언제고 별이 한아름 쏟아진다. 목재고택은 육사생가 터와 이웃한 곳이니 우리가 오늘 보는 별은 육사가 어린 날 할아버지 무릎 아래서 헤아리던 그 별이 맞을 것이다.

육사가 헤아리겠다던 한 개의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난다. 육사의 뜰에서 '한 개의 별을 노래하는 일은 한 개의지구를 갖는 것',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풍림』, 936. 12)보'고 싶거든 이육사문학관을 찾으시기 바란다.

이육사 문학관 앞에 조성한 메밀밭, 뒷모습은 이옥비 여사(ⓒ문영숙)
이육사 문학관 앞에 조성한 메밀밭, 뒷모습은 이옥비 여사(ⓒ문영숙)

흐린 날이면 또 어떤가, '구겨진 하늘은 묵은 얘기책을 편 듯 돌담울이 고성 같이 둘러싼 산기슭 박쥐 나래 밑에 황혼이 묻혀오면 초가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지고 고향을 그린 묵화 한 폭좀이 쳐(「초가」, 『비판』, 1938. 4)'진 시인의 고향이 물기를 머금고 그림처럼 펼쳐져 있을 테니.

코로나19로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도 이육사문학관에는 최근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매표소 위에 제비가 둥지를 튼 것이다. 비었던 공중에 한 채의 집이 들어오고 새 생명이 부화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일은 경이에 가깝다. 무언가를 품는다는 것은 안팎의 동요를 동시에 잠재울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알에서 나왔다는 것은 '내'가 '나'를 깨고 나왔다는 것이고, 곧 날아오르겠다는 약속 같은 것이겠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점쳐보다가 다시 어디가 아닌 여기를 문득 당겨보게도 될 거란이야기다. 그러니 이육사 시인의 시 한 구절 품고 돌아가는 길이라면 당신도 나도 얼마간은 안팎이 서로 출렁이지 않겠는가.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7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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