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국은 ‘탈(脫) 안동’의 신호탄
조문국은 ‘탈(脫) 안동’의 신호탄
  • 마창훈
  • 승인 2010.08.03 15: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읽기> 마창훈(영남일보 기자)

▲ 마창훈(영남일보 기자)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지방의 최대 화두는 ‘탈(脫) 중앙의, 탈 중앙에 의한, 탈 중앙을 위한’ 정책과 행정이다. 원인은 정치·사회·문화·교육 등 전 분야가 절대적 다수가 군집한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지방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의성군과 같이 농업을 주력산업으로 하는 소규모 지자체 입장에서는 소외가 아니라 거의 방치 수준에 가까울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의성만이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의성을 한 사례로 문제에 대한 해답에 접근하고자 한다.

의성은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부터 지속된 안동이라는 큰 범주에 포함돼 고유의 색상을 제대로 뽐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이 같은 현상은 비단 의성만이 안고 있는 고민은 아닐 것이다. 안동과 인접한 영주, 봉화, 예천, 청송, 영양 등의 지자체가 느끼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각설하고 지난 2007년 의성에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시작됐다. 그것은 기원전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근거로 고대왕국을 건설한 ‘조문국’의 재발견에서 비롯됐다. 2007년 당시 영남일보는 경북지역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가 신라에 복속된 소국의 흔적을 찾아가는 시리즈 기사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중 조문국(召文國) 편을 보도한 바 있다.

조문국은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병합당한 소국(학술용어로는 성읍 또는 읍성국가) 중 하나이며, 신라 최장의 왕조를 형성했던 김성 세력의 성장과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 의성을 중심으로 한 안동, 예천, 상주 일대는 금 생산지였으며, 김씨 세력이 조문국을 장악, 군사·경제적으로 비축한 힘을 근거로 신라 최후의 승자로 발돋움 한 왕가의 발원지로 볼 수 있다. 또 이 지역은 경북북부 내륙이나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서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경주(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와 전혀 다른 토기가 의성군 금성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학계가 ‘의성양식토기’로 명명한 이 토기는 남으로는 군위, 서로는 상주, 북으로는 안동ㆍ예천ㆍ영주ㆍ봉화ㆍ청송을 비롯, 단양과 제천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렇듯이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운 문화적 자산을 알리기 위해, 최근 3년간 의성군이 쏟아 부은 노력은 엄청나다. 그 이유는 안동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 결과물로 올해 하반기쯤 ‘조문국박물관’이 착공되며, 이를 통해 의성은 안동으로 대표되는 유교문화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문화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대내ㆍ외에 알릴 수 있는 단초로 제공될 전망이다.

이 같이 조문국은 안동의 아류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출향인을 포함해 ‘60만 의성지역민의 큰 자긍심’으로 등장할 날이 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의성은 조문국을 통해 유교문화권의 대부로 지칭되는 안동이라는 범주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을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북부지역의 맏형 역할을 하고 있는 안동시가 곰곰이 새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유교문화권개발사업’의 추진과 관련한 것이다. 이 사업과 관련해 안동을 제외한 인근 지자체가 대부분 “우리는 들러리로 안동이 흘린 떡고물만 주었을 뿐”이라는 자조 섞인 푸념을 한다.

이는 결국 경북북부 지역이 중앙정부의 각종 개발정책에서 소외된 곳이라는 주장을 하면서도, 안동은 인근 지역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안동은 북부지역의 맏형으로서 인근 지자체와 함께 발전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확한 성과물들을 나눠가지는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