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의 현장, 그곳②-안동 최초의 감리교회, 안동제일교회
근현대의 현장, 그곳②-안동 최초의 감리교회, 안동제일교회
  • 조창희(아동문학가)
  • 승인 2020.11.0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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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최초의 감리교회, 안동제일교회(ⓒ조창희)
안동 최초의 감리교회, 안동제일교회(ⓒ조창희)

고종황제에게 감리교회의 윤허를 청원하다
영국에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대를 이어 영국교회(성공회)의 사제(신부)가 된 죤 웨슬리로부터 시작된 감리교회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크게 번성하였다. 유럽에서는 칼빈의 장로교회가 번창하였고 독일에서는 루터교회가 국교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원군시대에 들어온 천주교가 많은 박해를 받았고 고종 황제가 개화정치로 문을 열었을 때 1882년 조심스럽게 미국과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에서는 즉시 푸드 초대 공사를 파송하여 서울에서 공사업무에 들어갔다. 고종 황제는 이에 대한 답방으로 민영익을 단장으로 세운 보빙 외교사절단을 미국에 보내게 되었다. 이때 미국 측에서는 푸드공사가 타고 온 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가도록 교통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여러 달에 걸쳐서 항해하여 태평양을 건너서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한 보빙 사절단은 또 다시 동서대륙간 횡단 열차를 갈아타고 동부에 있는 워싱톤 수도를 향하여 여러 날 기차여행을 해야했다. 이 횡단 열차 안에서 미국 감리교 목사인 가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가우처 박사는 처음 보는 동양인 민영익 보빙 사절단에게 관심을 가지고 선교에 대한 마음을 불태웠다. 초기에는 손짓 발짓 몸짓으로 의사를 나누다가 마음이 통한후에는 조선의 왕에게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윤허를 받아주도록 청원하며 부탁하였다. 민영익 단장은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워싱턴 수도에서 헤어졌다. 민영익 보빙 사절단은 미국 대통령을 만니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했고 가우처 박사는 감리교 본부로 찾아가서 조선 선교에 대하여 건의를 하고 횡단열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조선 선교를 위하여 거금 2천 달러를 기탁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조선 선교를 위하여 헌금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런 연유로 미국 감리교 본부에서는 조선 선교에 먼저 힘을 쏟게 되었다. 감리교 본부에서 나온 가우처 박사는 일본에 선교사로 나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동역자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장문의 전문을 보냈다. 곧 조선에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빙 사절단과 이야기 된 그간의 내용까지도 자세하게 알렸을 것이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즉시 여장을 갖추고 목사(선교사)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배를 타고 조선에 들어와서 제물포를 거쳐서 1884년 6월 24일 서울에 입성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조선에 합법적으로 입국한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일본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친분이 있는 김옥균을 만나게 되어 고종 황제에게 감리교 선교 활동에 대하여 윤허를 받도록 청원을 하였다. 이에 대한 고종 황제의 윤허가 내린 직후인 7월 3일에 이 반가운 소식을 궁중에서 우연히 만난 윤치호 선생에게전하고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찾아가서 전하였다. 그런데 선교 윤허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에 한해 윤허가 내려진 것이다. 어쨌든 제한된 단서가 붙었다 해도 고종황제가 윤허한 합법적인 조선의 일이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즉시 일본으로 복귀하여 미국 감리교 본부에 보고하였다. 미국 감리교 본부에서는 조선 선교에 우선하여 준비하면서 아펜젤러 선교사를 조선 현지 실무 선교사로 내정하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1954년 안동제일교회. 종탑 자재는 준비해 두었으나 아직 종탑을 올리기 전이다.
1954년 안동제일교회. 종탑 자재는 준비해 두었으나 아직 종탑을 올리기 전이다.(ⓒ조창희)

한편 미국 장로교에서는 장로교인인 의사 알렌이 주한 미국 공사관의 직원인 외교관 의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가게 된 것을 알고 서둘러서 알렌에게 선교사의 직분을 부여하였다. 조선에 미국 공사관 직원으로 갈지라도 장로교 선교사의 사명을 겸하게 한 것이다. 알렌은 외교관의 신분으로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9월 22일 서울에 입성하였다. 한편 미국 장로교에서는 조선 현지에서 선교에 전념할 실무 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선택했다. 아펜젤러는 조선으로 오기 전에 결혼을 해서 부부가 오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독신인 언더우드 선교사는 일본을 경유하여 이본 주재 선교사들을 만난 후 세 사람은 한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마침내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항에 배가 도착한 후 아펜젤러 부인이 앞서 나가고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아펜젤러 부인의 뒤를 따라서 나란히 손잡고 제물포항에 발자국을 찍었다. 곧 아펜젤러 부인이 최초로 발자국을 찍었고 그 뒤를 따라서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함께 발자국을 찍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펜젤러 선교사는 선교일지에 생생한 글을 남겼고 보고하기도 했다.

"내 아내가 미지의 선교지 조선에 최초의 발자국을 찍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교사로서 자부심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시절 서울은 분위기가 살벌했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비록 실패했으나 서울의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서양여성이 서울에 들어가는 것도 불안하여 제물포항 여관에서 며칠 보내다가 무작정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감리교 선교사들을 만나서 대책을 세워나갔다. 반면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독신이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제물포에 며칠 있다가 서울에 입성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에서 알렌 의사를 만나서 장로교 선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때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 대감을 서양의술로 수술하고 치료하여 기적적으로 살려냄으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비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서양 의술에 대한 인정도 받게 되어 알렌은 호제를 만났던 것이다. 고종 황제로부터 광혜원이라는 서양병원의 명칭까지도 하사 받았다.

피난 간 지역마다 뿌리내린 감리교회
선교 초기에는 감리교와 장로교뿐이므로 두 교단의 선교사들이 불필요한 경쟁과 낭비를 하지 말고 조선을 효율적으로 선교하는 차원에서 1893년 선교협정을 체결하였다. 대략 평양은 특정 지역으로 공유하고 감리교가 장로교보다 선교에 앞장을 섰으니 그 시절 교통이 편리한 지역 곧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를 감리교 선교 구역으로 하고 교통이 불편한 변방지역 곧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평안도, 함경도를 장로교 선교구역으로 하자는 데에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실상 내면적인 도민성으로 가치를 평가해보았을 때 장로교가 알짜 지역을 고스란히 다 차지한 셈이다. 이렇게 선교협정이 체결됨으로 강원도 땅인 원주에 자리 잡았던 장로교 선교사들이 철수하여 안동으로 이주해오므로 안동성소병원이 크게 의료선교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협정은 두 교단 사이에 50년 가까이 잘 지켜져 왔으나 여타 기독교파들이 들어오므로 파기된 후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어디든지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감리교는 청진과 함흥에 세워서 감리교 선교의 교두보로 삼았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일은 감리교회가 없었던 경상도와 전라도, 제주도에 순식간에 많은 감리교회가 세워진 역사이다. 곧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피난민 감리교인들이 감리교회를 세운 것이다. 우후죽순처럼 피난민 감리교인들이 거쳐간 지역에는 감리교회가 세워졌다. 안동제일교회도 그런 유형이다. 1950년 6.25전쟁 때는 안동에서도 대구와 부산으로 물밀듯이 피난을 갔지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서 전세를 바꾸어 압록강까지 이르러 북진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므로 1951년 1.4후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안동은 현상유지를 할 수 있었으나 소백산과 죽령고개 넘어 있는 단양, 제천, 원주 등지에서는 안동으로 피난민들이 밀려 들어왔다.

1951년 서영준 목사 부부. 당시 단양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안동에 피난 와서 안동제일교회를 세웠다.
1951년 서영준 목사 부부. 당시 단양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안동에 피난 와서 안동제일교회를 세웠다.(ⓒ조창희)

안동 감리교회와 김광현 목사
이때 단양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던 서영준 목사가 피난민 감리교인들의 구시점이 되어서 피난민 감리 교인들이 떼 지어 들어오니 안동장로교회(그 시절은 안동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인 김광현 목사가 교회당 아래층을 감리교 피난민 숙소로 쓰도록 제공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서영준 목사에게는 주일학교 예배와 중고등부 학생 예배 때에 설교를 하도록 해서 설교한 상사 사례비 명목으로 매주 봉투를 건네주어 수입 없는 피난살이 생활에 도움이 되게 했다. 그러면서 김광현 목사는 서영준 목사에게 이번 기회에 안동에 감리교회를 세우라고 권면했다. 서영준 목사는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다들 제 고향으로 돌아갈텐데 교회를 세우면 뭘 하느냐?"는 것이다. 이때 김광현 목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 가더라도 감리교회 하나는 남지 않느냐? 그리고 안동에는 조상국 집사를 감리교회로 파송해서 교회를 지키게 할 수 있으니 감리교회를 세우시오."해서 서영준 목사의 마음이 움직여 감리교본부의 지원을 받아 안동에 최초의 제일 감리교회가 세워졌다. 1951년 4월 29일 성소병원 마당에 벽돌로 지은 전기실 창고 건물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이때 감리교 류형기 감독은 김광현 목사에게 표창장 혹은 감사장을 수여하려 했으나 본인이 극구 사양하므로 구두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서류상 안동제일교회의 설립자는 서영준 목사와 안동형무소에 몸담고 있는 우인철 목사 그리고 원주 제일교회에서 피난 왔다 얼마 안 있어 복귀한 장로, 이렇게 3인이 서류 작성하고 도장을 찍었다.

북문동 적산가옥에서 지금의 옥정동 예배당
안동 장로교회에서는 김광현 목사가 담임목사 직권으로 조상국 집사 가정을 제일감리교회로 파송하는 예배를 9월에 드렸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집사 직분을 받고 주일학교 유년부 부장을 맡아보면서 5년 동안에 유년부 어린이를 998명에 이르도록 부흥시킨 주일학교의 중요한 일꾼인데 이런 일꾼을 제일감리교회로 보낸다면 반대할 교우들이 있을터이니 김광현 목사가 지혜롭게 담임목사 직권으로 파송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때 성도들은 많은 선교현금을 해서 도왔고 조상국 집사에게는 지름이 38cm 되는 놋대야를 전별 기념품으로 선사했는데 지금 남아있다. 최초로 세워진 안동제일감리교회는 북문동 15-6번지에 62평 적산가옥을 감리교본부 총리원 지원으로 매입하고 수리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1954년 10월 23일 현재 옥정동 464-9 대지 279평을 구입하여 1955년 8월 11일 신축예배당 기공예배를 드리고 동년 11월 6일 새성전 건축을 완료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또한 동년 11월 29일에는 목사관 건립에 임하였다. 이 건물과 목사관 건물 전부 1973년 6월에 여관구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직후 1973년 7월 12일 전기 누전으로 화재를 당하여 전소되었고 전 교우들이 건축헌금을 하고 여관구 목사가 열심히 활동하여 90평 새 성전을 건축하였다.

1953년 3월 22일, 제2대 박승은 목사 부임 기념사진. 앞줄 중앙에 박승은 목사와 오른쪽으로 필자의 아버지 조상국 장로, 어머니 장민선 속장
1953년 3월 22일, 제2대 박승은 목사 부임 기념사진. 앞줄 중앙에 박승은 목사와 오른쪽으로 필자의 아버지 조상국 장로, 어머니 장민선 속장(ⓒ조창희)
1954년 안동제일교회. 경안고등학교 윤영호 학생이 교사로 활동했던 교회학교 어린이들. 오른쪽 뒷줄에 교모를 쓴 이가 윤영호 반사
1954년 안동제일교회. 경안고등학교 윤영호 학생이 교사로 활동했던 교회학교 어린이들. 오른쪽 뒷줄에 교모를 쓴 이가 윤영호 반사(ⓒ조창희)

안동제일감리교회 개척 초기 조상국 집사 가정이 감리교 뿌리를 찾아 안동 장로교회에서 제일감리교로 옮긴 후 1952년 2월 12일 당회와 구역회에서 조상국, 박윤빈 두 사람을 장로로 천거하였다. 그런데 박윤빈 장로는 장로 취임을 앞두고 대구 동산병원으로 스카웃 되어가게 되고 여러 해 지난 후 대구제일감리교회에서 장로로 취임하였다. 후에 1973년 교회가 화재를 당했을 때에는 대전에 살던 조상국 장로가 안동에 와서 함께 예배 드리고 건축헌금을 하였고 군복무 중이었던 필자는 육군하사 봉급 한 달 치 봉투를 전액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먼 훗날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엄형필 총장 재임 시절에 조상국 장로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여 명예 신학사 학위를 수여할 때 단상에 오른 백발의 팔순 조상국 장로에게 온 회중이 기립하여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감리교와 장로교의 임원 명칭에 있어서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감리교에서는 본처 전도사, 권사, 속장, 유사, 탁사로 불려졌고 장로교에서는 장로, 집사로 했으며 본처 전도사는 장로로 바꾸었다. 또한 장로교에서는 여성 장로가 없었으므로 여성 권사를 도입하였다. 현재는 장로교에 여성 장로와 여성 목사가 있다. 감리교는 이미 1930년대에 여성 목사와 여성장로를 두고 있었다.

(ⓒ조창희)
1953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아 찍은 기념사진(ⓒ조창희)

안동 최초의 감리교인
안동에서 최초의 감리교인이 된 가정은 1935년 안동성소병원 부원장으로 부임해 온 백태성 씨 가정이다. 개성이 고향인 백태성 씨 집안의 면모를 살펴보면 백태성씨 고모가 윤치호 선생의 세 번째 부인이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윤치호 씨는 중국 여성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서 살다가 귀국하여 해산 도중에 출혈과다로 산모가 사망하므로 개성 여인 백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백태성의 고모였다. 또한 윤치호 선생은 중국에서 망명생활 도중에 미국 남감리교회 교인이 되었고 세례를 받았다. 미국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그리고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이렇게 교파가 나뉘어진 것은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를 해방시킬 때 남부지역민들이 반대하여 남북전쟁이 일어았다. 이때 교회들도 지역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분할되지 않을수 없었다. 윤치호 씨가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어 조선에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두 감리교단을 단일 감리교단으로 합동하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1930년 역사적인 조선 감리교로 합동하는 총회를 열어 피선교국인 조선에서 남북감리교가 합동하자 미국 본토에서도 합동하자는 운동이 일어나서 10년 후 미국에서도 남북감리교가 화합하게 되었다.

1954년 10월 23일 지금의 옥정동에 대지 279평을 구입하여 건축을 완료했을 때의 모습. 왼쪽부터 대구제일교회 박세광 목사, 박재희 전도사, 우인철 목사(안동형무소), 이순옥 목사(저전감리교회), 서광도 선교사(경상북도 지역선교담당), 조상국 장로(필자의 부친)
1954년 10월 23일 지금의 옥정동에 대지 279평을 구입하여 건축을 완료했을 때의 모습. 왼쪽부터 대구제일교회 박세광 목사, 박재희 전도사, 우인철 목사(안동형무소), 이순옥 목사(저전감리교회), 서광도 선교사(경상북도 지역선교담당), 조상국 장로(필자의 부친)(ⓒ조창희)
1954년, 뒷줄 왼쪽부터 2대 담임목사 이성환 목사, 우인철 목사, 최해석 장로.
1954년, 뒷줄 왼쪽부터 2대 담임목사 이성환 목사, 우인철 목사, 최해석 장로.(ⓒ조창희)

장로교는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이렇게 4개 장로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다. 백태성 씨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후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할 때 서울중앙감리교회에 다니며 유사직분을 받았고 교회 재무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이때 성소병원에서 조선인 의사를 스카웃해서 안동성소병원 부원장으로 안동에서 생활하게 했는데 백태성 씨가 물망에 올랐다. 비록 직함이 부원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원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리였다. 백태성 씨는 1933년 결혼하여 신혼생활 중에 있었다. 처음에는 시골로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어쨌건 1935년에 안동성소병원에 가게 되었다. 백태성 씨는 안동에 있는 동안에 교도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4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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