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의 현장 그곳③-권정생의 시련기와 부산
근현대의 현장 그곳③-권정생의 시련기와 부산
  • 안상학(시인)
  • 승인 2020.11.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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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벼랑 끝에서 얻은 백척간두의 삶

권정생의 10대와 20대 시절 약사
권정생(1937~2007)의 인생에서 10대 시절은 뿌리 뽑힌 채 떠도는 신세였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태평양 전쟁으로 동경을 떠나 전전하던 권정생은 열 살 들던 해(1946년) 봄에 귀국했다. 아버지 권유술(1892~1965)과 작은누나 차분(1930~2015)은 안동 고향 마을(일직면 광연리) 근처(일직면 조탑리)로 가고, 권정생은 큰누나 귀분(1928~), 남동생 정(1940~)과 엄마 안계순(1898~1964)을 따라 청송 외갓집 언저리에서 살았다. 떨어져 지낸 가족은 이듬해 12월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터를 잡은 안동으로 옮겼다. 외롭게 지내던 할머니 박희(1872~1950)의 품속으로 18년 만에 가족들이 안겼다. 그러나 칠 남매 중 둘째 형 목생(1923~1938)은 열여섯 살에 죽었고, 일본에 남기로 한 맏형 일준(1918~1998)과 셋째 형 을송(1925~2010)은 끝내 함께 하지 못했다.

생활의 안정을 찾기 위해 온 가족이 노력했지만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난한 집에 입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작은누나(1947), 큰누나(1948) 순으로 시집을 갔다. 할머니는 1950년 8월 한국 전쟁으로 피난살이 도중에 객사했다. 갖은 고초를 겪은 전쟁은 끝났지만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열일곱 들던 해인 1953년 3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가축 기르기, 나무장수, 점원을 해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집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그해 12월의 일이었다. 열여덟 살이 바로 코앞이었다. 부산 생활 또한 만만치 않았다. 4년간 고단한 객지살이에 늑막염과 결핵에 걸려 1957년 2월에 안동으로 돌아왔다. 가난과 병고로 그토록 꿈꾸던 고학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스물한 살 들던 해였다.

권정생의 20대 시절은 가족이 해체되는 아픔을 차례로 겪으며 한편으로는 병마와 처절하게 싸우던 극한 시련기였다. 귀향해서 어머니의 지극한 병구완을 받았다. 6년 만에 병세가 호전되어 일직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할 정도로 나아졌다. 1963년,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깐이었다. 지극정성이던 어머니가 덜컥 병석에 누워버렸다. 아들이 호전 기미가 보이자 마음을 놓은 탓일까. 이듬해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권정생의 병세는 다시 악화되었다. 병시중의 고단함과 사별한 슬픔 탓이 컸으리라. 이듬해는 설상가상 아버지마저 병석에 누워버렸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권정생에게 잠시 집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막내아들 혼사를 시키려면 폐병쟁이가 있는 상태로는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3개월간 유리걸식하며 떠돌다가 초주검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막내아들 장가보내는 것도 실패하고 전신 결핵으로 초주검이 된 권정생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부산성분도병원
부산성분도병원

1966년 6월에 권정생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성분도 병원을 찾았다. 오른쪽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병후가 좋지 않아 그해 12월 부산대학병원에서 재수술을 받고 소변기를 달았다. 이듬해는 하나 남은 피붙이인 동생마저 결혼해서 부산으로 살림을 났다. 심지어는 같은 병을 앓던 동네 사람들도 모두 다 죽고 없었다. 동경을 떠나 청송을 거쳐 1947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로 들어온 지 딱 20년 만에 혼자 남게 되었다. 마치 혼자 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산 것만 같은 세월이었다. 일직교회 문간방살이도 이때부터다. 이후 줄곧 혼자 살았다. 아니, 소변기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살았다.

권정생과 부산
권정생은 부산과 인연이 깊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부산은 권정생의 인생이 한번 죽은 곳이자 또 다른 인생으로 부활한 땅이다. 산문과 소설에서 여러 번 부산 시절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첫째, 부산에는 어떤 연고로 가게 되었을까. 부산에 이모가 살고 있었는데 왜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을까. 재봉기 상회 점원으로 일했다는 '동화미싱'은 이종사촌 형이 운영하는 것이었다. 당시 머물렀던 집은 이모 집이었다. 두 번의 수술을 하기 위해 부산에 갔을 때도 이모 집 신세를 졌다. 그런데 왜, 단 한 번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까. 둘째, 고아나 다름없던 그가 어떻게 두 번의 대수술을 받을 수 있었을까. 궁핍하기 짝이 없던 그 시절에 막대한 병원비는 어떻게 조달했을까. 다행히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한 셋째형 을송의 후원이 있었다. 이 또한 한번도 대놓고 밝힌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둘 다 답을 찾기는 어렵다. 당사자들은 이미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자취를 추적하며 답을 짐작할 뿐이다.

초등학교 졸업해서는 부산 가서 4년을 살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어요. 6·25 직후라 살기가 너무 어려웠고, 책을 읽고 싶어도 구할 길이 없어, 일하던 가게집 주인이 차비를 주면 그걸 아껴 헌 책방에 가서 책을 사게 되면 밤을 새워 읽었는데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나와 비슷하면 위안을 받았지요.

이 좌담에서도 이종사촌 형은 그저 '가게집 주인'이다. 왜 그렇게 시치미를 뗐는지 밝히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낱 가겟집 주인이 아니라 어엿한 이종사촌 형으로 돌려놓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자는 뜻이다. 또한 부산은 권정생이 평생 멍에처럼 짊어진 지병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도 이 범위 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권정생은 1946년 봄 시모노세키항을 떠나 처음으로 부산 땅을 밟았다. 1930년에 아버지가 일본으로 노동 징용을 끌려간 지 16년, 어머니와 형제들이 일본으로 가서 살림을 합친 지 1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맏형 일준과 셋째 형 을송만 일본에 남고 나머지 식구들은 함께 귀국했다. 

1946년 3월에 귀국을 했던 것이다. 조국 해방의 감격은 어린 내 가슴에도 벅찬 기대 속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찾아온 조국의 품은 어처구니없게도 모든 기대를 허물어뜨렸다.

1946년 4월, 내가 부모님의 고향 나라인 한국에 온 것은 태어나서 8년 7개월 만이었다. 밤새도록 화물 열차의 구석 쪽에 앉았다가 조그만 시골 역에 내렸을 때, 너무도 세상이 삭막해서인지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벌거숭이산과 키 낮은 초가집, 그 초가집 골목길에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얼굴도 입은 옷도 온통 때투성이였다.

열 살배기 권정생 눈에도 "찾아온 조국"은 보기에도 민망했던 모양이다. 얼마 뒤 뒤따라 들어온 스물두 살 난 셋째 형 을송의 일화 한 토막. 누나들의 증언에 따르면 을송은 기찻길 옆으로 듬성듬성 자리한 초가집들이 처음에는 가축을 키우는 우리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죄다 사람 사는 집이라는 것을 알고는 두말 않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권정생에게 부산은 일본에서 태어나 열 살에 처음 밟은 조국의 땅이었다. 그 땅이 훗날 병 주고 약 주는 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로부터 근 8년 만에 부모 품을 떠나 고학의 꿈을 꾸며 다시 밟았던 땅, 학교 문턱은 고사하고 몹쓸 병에 걸려 등진 땅, 고향으로 돌아온지 십 년 만에 초주검이 된 채 생명을 구걸하러 다시 찾은 땅, 신장과 방광을 떼이고 오줌주머니를 차고 돌아서게 만든 땅. 과연 부산은 권정생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무슨 인연이 그를 그리로 끌고 들어갔을까.

소설 『한티재 하늘』 속의 부산
권정생 소설 『한티재 하늘』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권정생 가계의 기록이다. 권정생이 기록한 어머니의 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년 3월 9일 권정생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이름만 변경했을 뿐 외가, 친가, 친척, 이웃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썼다고 했다. 집필 당시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배려한 것이라고 했다. 가계도(단 한 가지만 실제와 다르다. 그것은 훗날 다른 지면에서 밝히겠다)를 그려 놓고 글을 썼다. 하나같이 실존 인물이었으며 생몰연대까지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 호적보다 오히려 정확했다. 하여간 그는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차마 밝힐 수 없는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두어 달 뒤인 5월 17일 작고했다.

그 날 나눈 대화는 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죽거든 이야기해도 좋아."라는 말을 받아 새겼다. 소설 속에서 권정생 어머니 역할을 맡은 인물은 안이순이다. 외삼촌은 이석(본명 안반석), 이모는 이금(본명 안순금)이다. 이순은 1930년에 남편 장득을 일본으로 보내고, 동생 이금은 놋갓장이 남편 정재용(본명 강차석)을 따라 딸 행이, 아들 성준(본명 강대송)을 솔거하여 부산으로 이사 보내고 만삭의 몸으로 홀로 남겨졌다. 이미 오빠 이석은 도망쳐 나온 종의 신분인 달옥과 청송으로 '난질'을 떠난 뒤의 일이다.

그렇게 이금이네가 떠나갔고 그 해 섣달 그믐도 지나고 신미년 정월이 왔다. 장득이네가 떠난 지도 두 달째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순은 시집 와서 처음으로 아무 것도 없는 설을 지냈다. 조석이 죽고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았다. 아침 저녁 빈소에 밥한 그릇 떠놓고 곡소리도 못 내 봤다. 빈소를 차릴 자리도 없고 그럴 정신도 없었다. '미련한 놈 잡아들이라 카마 없는 놈 잡아가마 된다.'이순은 차옥이를 낳고 한 달이 조금 지났다.

1930년은 이순에게 지옥이나 다름없는 해였다. 의지가지없는 이순은 해산한 지 삼칠도 안 된 몸으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허허벌판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여기까지 소설 속의 이야기다. 권정생이 어려울 때 부산을 선택한 것도 이때 부산으로간 이모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정생이 부산으로 갔을때는 이모네 집 가세가 상당히 안정이 되었을 때다.

부산 권정생 이모 집
권정생 이모 안순금은 동래 유기전에서 일하는 남편 강차석을 도와 한복을 지어 살림을 꾸렸다. 딸은 열여섯살에 잃었다. 아들 강대송(1925~1985) 하나 바라보고 살았다. 이모는 한복을 지어 살림에 보탰다. 솜씨가 가근방에 소문날 정도로 좋았다. 권정생보다 열두 살 맏이 띠 동갑인 이종사촌 형 강대송은 부산 출신의 밀양손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딸 홍자(1945~), 금자(1949~), 아들 석훈(1951~) 삼 남매를 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기업 아사히에서 일을 했다. 해방 이후 일본 사람이 하던 공장을 인수하여 '동화미싱'을 차렸다. 전쟁 통에 고물로 나오는 재봉틀을 수리해서 되파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돈을 상당히 많이 벌어들였다. 화폐 가치가 없는 때이기도 했지만 하루 매상이 미군용 더블 백으로 가득이었다고 한다. 장롱에 돈다발이 가득 쟁여져 있었다고 한다. 외종질 강석훈의 증언이다.

부산이모집
부산이모집

우리들 소년 시절은 신파극 대사처럼 청춘도 낭만도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1953년부터 1956년 봄까지, 나는 부산에서 살았다. 당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아이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갔다.

권정생 산문 중에서 가장 권정생다운 산문이다.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어 갔는지, 왜 반전 평화의 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권정생 세계관의 정수가 깔려 있다. 일말의 군더더기도 하나 없는 문장이다.

1953년 겨울, 나는 또다시 집을 떠났다. 그때, 우리 집은 농토도 집도 없어 결국 스스로 살아갈 길을 개척해야 할 형편이었지만, 그것보다는 고학이라도 해서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중략)4년 뒤에 내가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결국 30년이 넘도록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이로 열여섯 살이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첫사랑 이야기며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졸업 후 진학을 하지 못하고 고학하기 위해 전전하는 모습도 고스란하다. 실패담이다. 물론 당시 또래 아이들과 교육을 생각하며 쓴 글이지만 말이다. 이모 집은 현재 부산 동구 고관로77번길 16번지에 있었다. 1953년 찾아갔을 당시에는 이모와 이모부, 이종사촌 형과 형수, 외종질 삼 남매가 있었다. 거기에 형수의 친정 생질녀인 최순자가 부엌살림을 맡고 있었다. 권정생 보다 한 살 아래였다. 최순자도 권정생이나 다름없는 불행을 겪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유복자 동생과 살다가 이모 집으로 흘러왔다. 권정생과는 처지가 같았다. '경수(권정생의 아명) 총각'이라고 부르며 허물없이 지냈다. 둘 다 책을 좋아해서 밤새 책을 읽기 일쑤였다.

"경수 총각, 수정 이모 댁에서 같이 지냈죠. 점포에 나가 수리도 거들고, 조용하면 책 보고, 집에 와서도 그랬죠. 밤 열시면 전기가 나갔는데, 호야불 켜놓고 책을 봤죠. 책을 읽으면 보고 읽는 듯이 이야기를 들려줬죠. 이모네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동화 같은 걸 들려주면 아이들이 쏙 빠졌죠. 3년 정도 같이 지냈나 싶은데, 어느 날 자다가 기침을 심하게 하더라고. 결핵인가, 늑막염인가, 약 지어 먹고 했는데 모친이 오셔서 보고는 안 되겠다 싶어 데리고 갔지. 경수 총각 엄마가 그랬어요. 돈이 있으면 아들 중학교 보낼 텐데. 그러나, 사촌 형은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그랬죠. 경수 총각, 참 착했어요."

권정생 이모
권정생 이모

"네다섯 살 무렵 권 선생이 오셨죠. 제게는 진외종숙이죠. 오실 땐 건강하셨죠. 그때 우리 집은 잘 살았어요. 라디오, 선풍기, 심지어는 탁구대까지 있었어요.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라디오 들으러 모여들곤 했죠. 수정동 집에서 초량동 43번지에 있는 동화미싱을 걸어서 출퇴근했죠. 저는 권 선생등에 업혀 살았죠. 그러다가 권 선생이 결핵에 걸렸죠. 엄마는 저희들에게 옮길까 봐 걱정을 많이 하셨죠. 어느 날 권 선생 어머님이 오셔서 데리고 가셨죠. 나중에 수술하러 두 번왔어요. 두 번째 수술하고 돌아가실 때 할머니가 새벽에 부산진역으로 배웅을 갔어요. 할머니께서 그렇게 보내는 게 무척 마음이 안되었던가 봐요. 굉장히 추운 날이었는데 그날 돌아오시는 길에 넘어져 가슴을 다쳤어요. 가슴에 물이 차는 병으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고생하셨죠. 그 뒤로 권 선생은 한 번도 부산에 안 왔어요. 저는 몇 번 찾아뵈었죠."

이렇듯 권정생이 고학의 꿈을 품고 내려간 부산은 사고무친의 땅이 아니었다.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한 그곳에서 권정생은 두 가지 복병을 만났다. 하나는 몹쓸 병이고, 하나는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라는 지극히 현실적인이종사촌 형의 권고다. 그는 돈이 없어서 학비를 못 대준 것이 아니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을 버는 것이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신문 연재소설에서 시장 바닥에서 파는 삼류 대중잡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고 읽었다. 내 소년시절은 눈과 귀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 였다. 완전히 잡식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권정생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이종사촌 형의 권고를 무시하기 어려웠으리라. 속내를 털어놓기는 더 어려웠으리라. 상급 학교 진학하는 꿈이 멀어질수록 공부에 대한 목마름은 커져만 갔을 것이다. 책이란 책은 '잡식동물'처럼 닥치는 대로 뜯어먹다시피 했다. 공부에 대한 욕망도 욕망이지만 문학을 하려는 욕망 또한 컸다. 소설을 써서 투고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몸부림도 몹쓸 병에 걸리면서 허사가 되고 말았다. 권정생의 인생이 죽은 것이다. 초주검이 되어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권정생은 약 10년 만에 부산을 다시 찾았다. 10년 전에 병을 얻은 곳에 병을 고쳐 보겠다고 간 것이다. 이모집은 베이스캠프나 다름없는 의지처였다. 일본에 있는 셋째 형 권을송은 병원비와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왔다. 덕분에 두 번의 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인생이 죽은 땅에서 되살아난 그. 부활치고는 참으로 초라한 부활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40년을 버티며 글을 쓸 수 있었으니 절처봉생(切處逢生)이 아닐 수 없다.

'꼬마 언니' 셋째 형 을송
권정생 누나들의 증언에 따르면 권정생은 셋째 형 권을송을 무척 따랐다고 한다. 권을송도 유난히 그를 챙겼다고 한다. 소설 『슬픈 나막신』에 나오는 “작은언니걸”이라는 인물의 모델이 바로 권을송이다. 빨간 우체통 저금통을 사 준 그 형이다. 서로 마음을 나누는 장면도 살갑다.

분단조국은 많은 동포들을 이산가족으로 만들었다.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했던 두 분 형님은 일본에 남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6·25전쟁이 일어난 뒤엔 그나마 소식조차 끊겨버렸다. '꼬마언니'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작은 형님과의 이별은 평생을 두고 한스럽게 가슴 아픈 상처가 되어 버렸다.

1946년 해방 이듬해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때, 조선인연맹에 가입했던 형님 두 분은 다음에 돌아오기로 했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울타리에 동백꽃이 피던 3월에 후지오카의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차에 오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떼밀려 태워졌고 차는 떠나고 말았다. 만 8년 6개월 동안 어렵지만 정들어 자라온 땅을 떠난다는 것은 가슴이 쓰리고 서러운 일이었다.

권정생은 셋째 형과 헤어진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나라가 뭔지 조국이 뭔지 알았겠는가. 나고 자란 땅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으리라. 게다가 그렇게 따르는 셋째 형과 헤어지는 일은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그 '꼬마언니' 20년 뒤 수술비와 생활비를 보내 생명을 살린 인연은 이렇듯 깊이 준비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2011년 4월 2일 일본 니가타로 갔다. 권을송이 살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당시 3·11 동일본대지진으로 어수선할 때다. 일본 방문을 꺼릴 때지만 이미 약조한 일을 미룰 수 없어 강행했다. 집에는 부인 이미대자(1935~ )와 딸 송미(1956~ ), 아들 송리(1958~ )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이미 권을송은 2010년 3월 10일 작고 하고 없었다. 대문에 달린 문패에는 '權乙松'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을송 씨와는 1955년 결혼했어요. 어머니 돌아가셨다는 소식 알고 얼마나 우시던지. 송미와 고향 쪽으로 큰절을 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는 울지 않으셨죠. 권 선생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알리지 않았어요.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충격 받을까봐. 권 선생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요. 돌아가실 때까지 몰랐어요. 권선생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사랑했지요. 저 마당에 꽃과 나무들도 손수 다 구해다가 가꾸셨죠. 저 등나무는 을송 씨가 돌아가자 그만 죽어 버렸어요. 참 아낀 나무였는데……."

이미대자는 갈무리해 둔 권정생과 가족들이 보낸 편지를 내주었다. 권정생이 쓴 편지 중 셋째 형과 형수에게 보낸 편지 16통, 조카에게 보낸 편지 13통이다. 그 밖에 동생 권정 3통, 아버지 1통, 작은누나 2통, 모두 35통이었다. 첫 편지(1956. 12. 10.)는 권정이 쓴 것이다. 안부를 묻고 전하며 가족들이 떨어져 지내는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권정생과 권정의 편지 가운데 대부분은 권정생이 수술한 1966년을 기점으로 앞뒤로 집중되어 있다. 주로 병세와 딱한 처지, 병원비와 생활비를 호소하며 대개 말미에는 읽고 싶은 책을 부기해 넣었다.

권을송이 가와사키시川﨑市에서 니가타시新瀉市 옮겨온게 1963년(이 때문에 권정생은 주소를 몰라 어머니의 부고를 1년을 넘기고서야 알릴 수 있었다)이다. 가와사키에서 쇠파이프 만드는 공장을 하다가 망하고 니가타에서 파친코를 열었다. 경제적으로 점차 안정이 되어갔다. 권정생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는 약간의 여유가 생길 무렵이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권을송은 수술비와 생활비를 송금했다. 결코 넉넉해서가 아니었다. 아래는 편지들 중에서 병원 관련한 내용만 추려 뽑은 것이다. 한글 편지는 원문대로, 일본어 편지는 신석기(건양대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때로는 잠꼬대로 어머니의 얼굴을 꿈속에서 뵙고 울 때도 있어, 한심스러워지기도 합니다. 형수님 정말로 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병원에서는 신장결핵이라고 진단을 하여 오른쪽 콩팥을 자르기로 했습니다. 폐는 왼쪽이 조금 나쁘다고 했지만, 약으로 완치할 수 있다고 하네요.  형수님 걱정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더욱이 어머니, 아버지께도 저 때문에 무리해서 늙은 몸을 이끌고 10리의 산길을 넘어 식물이나 약초를 찾아 나서는 고생에 고생을 시킨 것을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워서 눈물이 납니다. 어젯밤에는 묘 앞에서 하얀 한복을 입은 어머니가 "정생아, 엄마 곁으로 오고 싶지 않니?"라며 쓸쓸한 듯 말씀하시는 꿈을 꾸고 울어버렸습니다. (1966. 3. 18. 권정생. 신석기 번역)

며칠 있다가 저는 병원에 입원해야 될 것 같습니다. 신장제 거수술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과는 다음에 알리겠읍니다. (1966. 4. 19. 권정생)

저는 이젠 밥도 조금씩 먹고 가까운데 놀러도 다닙니다. 정말 형님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를 것입니다. 다행히도 형님께서 그처럼 돈을 보내 주셔서 제가 살아난 것입니다. (1966. 8. 20. 권정생)

권정생 어머니
권정생 어머니

이번에 부친 돈은 우리는 정말 뜻밖이었읍니다. 형님은 무슨 돈이 자꾸 있어 보내 주시니 다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돈을 찾게 되면 저는 병원에 또 가봐야겠읍니다. 수술받은 후에 조리를 못해 몸이 너무 쇠약해져 요사이는 꼬빡 누워서 지냅니다. (1966. 11. 16. 권정생)

저의 일은 정생 형님의 입원 후에 생각할 일이고 해서 앞으로 2~3일 내에 내려 갈려고 합니다. 이번 걸음은 다시없는 정생 형님의 건강을 찾아야 할 텐데 어떻게 되어질넌지요. (2016. 12. 3. 권정)

먼저 성분도병원에서 신장 수술을 받은 후 계속 경과가 좋지 않아 이번엔 부산대학부속병원에 입원했읍니다. (중략) 먼저와 마찬가지로 신장수술을 받았읍니다. 이젠 정말 절망적입니다. 오줌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요도(오줌 나오는 줄)를 짤라서 지금은 배 한가운데 고무 호수를 박아서 오줌을 빼고 있습니다. (중략) 이젠 평생토록 그렇게 호수와 병을 들고 다녀야 한다니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읍니다. (중략) 의사에 말에 의하면 만약 수술을 받지 않았으면 단 열흘도 못 살았다고 합니다. (중략) 한 가지 불편한 것은 호수와 병을 들고 다니기가 좋지 못하니 Urinal(소변기 오줌기구) 구해서 차고 다녀야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중략) 한국에는 없다고 합니다. 일본에 있으니 어떻게 구해 보라고 합니다. (중략) 형님 불쌍한 정생 형님을 살려봅시다. 죽는 날까지 나는 몸으로 형님은 돈으로 어떻게 하던지 죽는 날까지 도와 봅시다. (중략) 배구멍 있는데서 약 1cm 3mm 정도 왼쪽으로 구멍이 뚤어져 있읍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는데 하염없는 눈물로 펜을 몇 번이나 멈췄는지 모릅니다. (중략) 구할 수 있거든 지금은 하루가 급합니다. 속히 보내 주셔야겠읍니다. (1967. 1. 10. 권정)

작년 6월에 신장수술을 했습니다만 몸이 더 안 좋아져서 12월 30일에 2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금 체중은 43kg. 왼쪽 배에 긴 고무호스를 넣고 소변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도 운명이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1967. 1. 9. 권정생, 신석기 번역)

이것을 몸에 끼우고 2월 3일 병원 갔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디를 가도 그렇지만 지금은 모두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중략) 오늘은 달걀 한 알과 밥을 조금 먹었습니다. 몸무게는 46키로. 가끔 열이 올라 39도를 넘기고 있습니다. 이게 가장 괴롭네요. (1967. 2. 8. 권정생, 신석기 번역)

공부도 문학도 아닌 다른 꿈이 있었다
권정생은 1967년 2월 3일 부산을 떠났다. 자신이 점원으로 일했다는 '동화미싱'이 이종사촌 형이 운영하는 업체이며, 머물렀던 곳이 이모 집이었다는 것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셋째 형의 도움은 가까운 지인들에게나 몇몇 이야기 했을 뿐이다. 이 또한 공개된 자리에서는 발언하지 않았다.

지난 11월 4일 저녁에 국제전화로 삼십 년 만에 일본에 계신 형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조총련 고국방문과 함께 좀 관심을 가진 모양입니다. 형님은 한국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합니다. 내년에 내한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를 일본에 초청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안동에 계신 큰누님과 함께 전화로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삼십 년 전 옛날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일본에 이주해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전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혈육이라지만 삼십 년이란 공백기간을 무엇으로 메우겠습니까?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더욱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만나서 현실을 서로 알게 되면 더욱 비참해질 것이 뻔합니다. 미야자와 겐지 전집을 보내 줘서 읽고 있습니다. (1975. 11. 15)

부산은 권정생의 한 인생이 죽고 새로운 인생이 태어난 곳이다. 공부가 죽고 문학이 태어난 곳이다. 권정생 문학의 뼈대와 살이 성장한 곳이 바로 애증의 땅 부산이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 전쟁 직후의 폐허와 군상, 수많은 책들, 벗 최명자와 오기훈, 끝 모를 나락으로 치닫던 투병생활, 모든 게 바닥이었던, 깡그리 흩어지고 말았던 그곳에서 문학의 꿈 단 하나 끌어안고 돌아왔다. 권정생은 1937년 9월 12일(음력 8월 8일) 태어났다. 권정생의 여러 글에서 착오가 있다. 이것이 정확한 생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8월 18일'은 호적일 따름이다. 누나들의 증언이기도 하다. 생전에 쓰던 전화번호 끝 자리가 0808이다.

1967년 부산에서 안동으로 돌아가 40년을 문학과 사귀며 혼자 살았다. 2007년 5월 17일오후 2시 17분 대구가톨릭병원에서 사망했다. 정확하게는 의료 사고사였다. 어쩌면 그의 꿈은 공부도 문학도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꿈은 10살 이전에 살았던 그곳,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꿈을 꾸었을까. 남의 나라 땅에서 태어나 '조센징'으로 살면서도 그나마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었던 그곳, 그 시절로 회귀하고 싶었던 게 과연 진심이었을까? 역설이라고 믿기에는 그가 살아낸 이 땅의 현실이 너무나 가혹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지난날 어두웠던 그림들이 끝도 없이 스치고 간다. 일본 시부야의 좁은 골목길에 모여 살던 사람들, 세상에 빈민(貧民)이란 말만큼 성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하늘을 마음대로 쳐다본다.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빈민들이 살던 골목길엔 국경도 없고 인종차별도 없다. 찐동야(광대)집 딸이었던 하나코 누나와 시장 모퉁이 삼류 영화관에 가는 즐거움, 빈터에서 어둡도록 숨바꼭질하면서 놀던 애들, 오시카사마 신사(神社)에 축제가 있는 날은 야시장도 함께 열린다. 온 동네 애들이 몰려가서 공짜로 모든 것을 구경했다. 꽃밭처럼 환한 칸델라 불빛과 거기 펼쳐놓고 파는 물건들, 1전씩만 가지고 가면 대나무로 만든 딱총 하나씩은 살 수 있다. 누나들은 밤 12시가 넘도록 기다렸다가 군고구마를 떨이로 사온다. 전쟁만 없었고 폭격만 없었으면 가난한 그 동네에 평생을 살아도 좋았을 게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7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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