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⑧>서예가 김태균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⑧>서예가 김태균
  • 강병규(안동MBC PD)
  • 승인 2020.11.2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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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스스로를 낮추는 바른글씨
삼여재三餘齋 김태균

가을 녘 서예가의 집은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남매의 여름밤>에서 남매가 갑작스레 아빠를 따라가게 됐던 옛날 2층 양옥 같은 풍경이었다. 정원 한 켠에는 커다란 수석과 함께 노란 국화가 가득했고, 단풍든 모과나무는 소나무 곁에 오랫동안 서 있는 듯 제법 굵은 나이테를 두르고 있었다. 거실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쌀쌀해지고 있다는 증거인 듯 다 타버린 연탄재가 몇 층을 이루고 쌓여 있었고, 정원 가운데 걸려있는 빨랫줄에는 잠자리들이 가끔씩 쉬어가곤 했다. 집을 지키고 있는 노부부의 손길이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한 가득 느껴졌다. 제작진을 먼저 반겨주던 분은 화가이신 안주인 이민자 선생이었다. 2층 서실에서의 이야기는 한참 동안 이어졌고, 두 부부는 저녁 대접은 꼭 해야겠다며 넉넉한 국물 가득한 밥 한 그릇을 내주셨다. 오랜만에 따뜻한 밥이었다.

김태균, 이민자 부부(ⓒ강병규)
김태균, 이민자 부부(ⓒ강병규)

2층 서재에 올라오니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선생님의 글씨가 아닌 오래된 사진입니다. 누군가요?
막내아들 사진인데 한 30년 넘었습니다. 내가 찍은 사진은 아니고 아내가 찍어서 저기에 걸어 둔 겁니다. 자기 아들은 저렇게 이쁘게 찍고 내 사진은 영 옳지 않게 찍어요. 나도 가끔씩 찍어주긴 하는데 별로 옳지 않아요 허허.

사진과 몇 가지 소품들 덕에 선생님 댁이 예술가의 집이라는 걸 물씬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붓글씨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글씨쓰기를 좋아하셨나보죠?
어릴 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쓰는 걸 늘 봐왔기 때문에 그게 계기가 돼서 그런지 뭐 소꿉장난 할 때도 옛날에 나뭇잎 같은데 물로 글씨를 쓴 다음에 모래 같은 걸 뿌리면 글씨가 나타나곤 하는 장난을 했어요. 또 어른들이어릴 때부터 채본을 한 줄씩 써서 이렇게 써보라고 해서 쓴 적이 있는데, 내 기억으로 그 글씨를 받아서 그렇게 써보면 어른들이 보시고 잘못 썼다고 야단맞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서 어릴 때부터 늘 글씨를 써 왔던거죠 뭐. 어른들은 글씨를 잘 못쓰면 이놈아 이게 비뚤다 어떻다 야단을 치시는데 그런 꾸지람을 들어본 기억은 없어요. 그렇게 글씨를 늘 접하다 보니까 글씨 쓰는 게 싫다거나 뭐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쓰셨던, 고향은 어디세요?
안동 녹전입니다. 신평 2동이라고 하는 곳인데 듬벌이라고 불리던 마을이었어요. 지금도 큰댁은 거기에 있구요. 내가 어렸을 당시에는 마을에 한학 하시던 어른들이 많았지요. 그렇지만 나는 서당에서 한문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고, 집에서 어른들이 천자문을 가르쳐 주시던 기억은 압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고부터는 학교 다니고, 또 객지에 나가 있고 해서 한문 공부는 많이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게 글씨를 쓰면서도 제일 아쉬운 점이지요.

천자문은 아버지께 배우셨습니까?
맞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제 아침으로 일어나면 조금씩 가르쳐주셨어요. 아버지도 한학을 하셨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무척 엄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아버지 앞에 앉으면 매사에 조심이 되었습니다. 안 그러면 불호령이 떨어지니까. 그래도 내가 써 놓은 글씨를 보고 잘 못 썼다고 꾸지람 하는 것은 못 들어봤어요. 내가 34년 생인데 소학교 다니면서 일제강점기라 그런지 학교에서는 주로 공부가 아닌 일을 했고 천자문은 주로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는 외지로 나가셨다구요?
소학교 졸업하고 안동에 나가서 안동중학교를 다녔어요. 처음에는 아버지 친구 되는 분의 집에서 하숙을 좀 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자취를 했지요. 그 당시에는 버스가 없었으니까 토요일이 되면 집까지 걸어왔다가 일요일에 한 달 먹을 양식을 싸 짊어지고 안동까지 다시 걸어 나갔어요. 녹전서 안동까지 걸어가면 한 50리 될 거예요. 그런 길을 걸어 다닌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같이 다니는 동무들도 없었어요. 그때 촌에서 중학교 간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참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쌀을 짊어지고 거의 하루 종일 걸었던 것 같은데 힘은 들었어도 무겁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어요. 그렇게 중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전쟁을 만났어요.

그럼 피난을 가셨겠네요?
아닙니다. 그때 피난을 못 갔어요. 그때는 그냥 녹전 집에 와서 6.25를 겪었습니다. 집에서도 우리는 이웃 동네로 잠깐 피해서 갔는데, 아버지께서는 집에 사당이 있으니까 신주를 두고 피난 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혼자 집에 계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 위치가 인민군들이 통과할 일이 없었었나봐요. 전부 다 돌아서 가야할 그런 위치였는지 6.25때 군인들을 보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옛날부터 집터를 잡을 때, 피난지라고 해서 잡았다고 그러던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게 일리가 있는 소리 같아요 우리는 전화를 면했으니까.

전쟁 이후로는 어떻게 뭘 하셨어요. 학교는 다시 못 돌아가셨습니까?
집에 있는 농사 일 거들면서 집에 있었지요. 농사를 하면서도 늘 글씨는 써나갔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글씨 쓰는 거는 지루하거나 싫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타고난 것 같지도 않습니다. 타고 났으면 좀 잘 써야 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도 내 마음에 잘 썼다 싶은 글자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재주가 모자라는가 봅니다.

그렇게 복학 못하고 글씨만 쓰시다가 어떤 계기로 입문하시게 됐나요?
지금은 대구에 계시는 분인데 남석 이성조 선생이라고 있어요. 그분이 안동에서 교직에 계실 때인데 내가 글씨를 좋아하니까 서로 교류를 하게 됐습니다. 그분이 서울에 계시는 시암 배길기 선생님한테 소개를 내줘가지고 이제 정식으로 입문을 해서 글씨 공부를 하게 됐지요. 그때가 서른 즈음이었는데 늦게 시작한 셈이지요.

시암 선생님 처음 뵈었을 때는 느낌이 어땠나요?
그때 그 어른은 한 50대 정도였고 나하고는 이십 년 넘게 차이가 났죠. 시암 선생님은 성격이 대쪽 같은 분이야. 처음에 봬온 인상은 뭐라고 할까? 굉장히 근엄하시고 성격이 날카로워 보이시고 그래서 처음에는 조심을 많이 했지요. 어쨌든 선생님 밑에서 글씨를 쓰게 됐는데 선생님 생각에 글씨를 좀 가르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그래도 입문을 시켜 주시더라구요.

시암 배길기 선생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일본 유학을 하셨는데 법학을 전공하셨어요. 돌아와서는 동국대 교수를 하셨습니다. 국전초대작가이시고, 전서를 잘 쓰셨는데 내 생각으로는 아마 전서로 현대 작가는 그만한 분이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쉽지만 벌써 돌아가신 지가 17, 8년 됐을 겁니다. 돌아가시기 전 편찮으실 때도 늘 자문을 받고 작품에 대한 얘기도 듣고 평생을 그렇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30년도 넘었지요.

스승님께 30년을 배워도 다 못 배우신 겁니까?
글씨는 배운다는 게 뭐 스승이 가르친 그대로 쓰는 게 아니고,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가 쓰고 있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작품이란 건 스승님의 지도를 받아 가면서도 자기가 공부를 해야지 그게 진정한 배움의 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스승님이 꾸지람은 안하셨어요. 스승님은 잘못된 것만을 지적해 주시곤 했지요. 그리고 잘못된 거는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것이고 그걸 뭐 일일이 꾸지람하거나 이러지는 않으신 것 같아요. 뭐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는데 글씨를 써가지고 가서 교정을 받을 때 선생님께서 글자 형태가 좀 잘못 됐다든가 또 회귀점 잘못됐다든가 이런 데를 주먹으로 지적을 해주시는 정도였어요.

사실 시암 선생님께 지도를 받은 분들은 많지만 실질적으로 끝까지 선생님께 배운 분들은 크게 많지 않습니다. 뭐 내 글씨를 다른 곳에서라도 보시는 경우가 있으면 그거는 어디가 좀 미흡하다 이런 지적도 늘 해주시고 했지요. 그게 사제 간의 도리죠 뭐 참 애틋하셨네요, 돌아가셨을 때 남다른 심정이셨겠습니다. 선생님 살아계실 때 연세가 70을 훌쩍 넘기셨을 때인데 글씨 쓰는 획에 힘이 전에 보다 좀 빠지는 것 같아 그때 ‘아, 이 어른이 근력이 자꾸 떨어지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 마음에 좀 애틋한 생각이 들었죠. 옛날에 왜 부모가 매질할 때 덜 아프니 부모 근력을 걱정 했다는 그런 얘기도 있었잖아요? 그런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시암 선생님의 지도 외에는 고향에서 계속 혼자 글씨를 쓰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글씨 쓰면 뭐라고 할까요 그냥 재미가 있으니까 딴 생각은 안 해봤어요. 글씨 쓰면 한 자 쓰다가 잘 되면 마음이 아주 흡족해지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글씨 쓰는 거 지루하거나 싫거나 그런 일은 없어요. 사실상 생활도 그렇게 신경을 안 쓰고 살았습니다. 글씨 쓰는 것 말고 딴 거는 못해봤으니까요. 그래서 안동에다가 안동서도회를 설립해서 동호인들끼리 모여서 글씨 쓰고 그렇게 지냈지요.

그럼 살림은 사모님께서 다 하셨겠네요?
뭐, 그랬겠지. 집사람한테 고맙다는 말도 안해봤어요. 본데 경상도 사람은 그런 소리 잘 안 하잖아요. 내가 스물 다섯인가 결혼을 했는데 상처를 하고난 다음 저 사람을 만났어요. 한 40쯤 됐지 싶어요.

<부인 이민자 여사> 내가 72년도 가톨릭상지대학에 부임해 왔어요. 그때 난 혼자였구요. 그때만 해도 우리 나이는 대학 나온 사람이 없었잖아요. 두봉 주교님이 저를데리고 오셨죠 안동으로. 근데, 이제 난 혼자고 그러니까 딱 맞았죠. 학교 재직 중에 동양화를 전공했다고 하니까 류한상 선생님이 안동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안동서도회를 따라갔었는데 그렇게 시작해서 자꾸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76년 2월 12일에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삼여재 김태균> 근데, 안동 사람들은 여자 대할 때 뭐 이래 얼굴을 쳐다보거나 그러지 않잖아요. 그런데 지금 봐서는 그 당시에 뭐 어땠는지 잘 모르겠어. 허허

작품 얘기를 좀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주로 쓰시는 글씨체가 어떤 거죠?
초서를 제일 많이 썼고 또 그 서체를 제일 좋아합니다. 글씨를 써보면 초서체가 제일 변화가 많고 또 매력이라고 그럴까 하여튼 저는 초서체에 제일 마음이 가요. 그렇지만 뭐 딱히 초서체를 난 써야 되겠다 이런 것 보다는 많이 쓰다보니까, 말하자면 '초서체에 가장 변화가 많고 예술적인 표현이 제일 나타낼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요사이는 들어요.

선생님이 입문하셨을 때부터 그러진 않았던 거죠?
처음에는 선생님이 전서 전공이시니까 전서를 처음에 배웠고, 그 다음에 다른 서체도 선생님한테 배웠고 그랬습니다. 초서는 선생님한테 채본 받아서 쓰거나 이러진 못했고 내 나름대로 공부를 했지요. 근데 어쨌든 옛날에도 보면 법첩을 하나 선택하면 그 법첩을 50번 이상 반복해서 공부를 한 기록도 있고 그런 예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이 몇 번 정도만 써서 글씨가 된다고 하면 생각 안 하거든. 그래서 초서를 공부하면서 보니까 변화도 많고, 이 서체를 공부를 좀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었죠. 당대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를 한 번 백 번 정도 쓰면 초서가 안 되겠나 싶어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 법첩이 초서로서 글자가 제일 많고 또 글 내용이 서예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에 그걸로 시작했지요. 그러긴 했는데 내 기억으로 백 번은 못 썼고 한 팔십번은 썼지 싶어요. 그 책이 분량이 많아요. 1, 2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쓰고 나니까 이제 초서 붓 가는 데를 대강 할 수 있더라고. 그러다 보니까 늘 초서를 쓰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행인 것이 만약에 선생님 전공이셨던 전서를 공부했다면 과연 내가 우리 선생님보다 낫게 쓸 수 있겠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초서를 잘 선택했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럼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분의 서체는 어떤 것입니까?
지금까지 써온 것도 그렇지만 왕희지 체를 많이 썼어요. 내 성격이 단순해서 그런지 몰라도 왕희지 서체를 공부해보면 그 서체가 온당하고 또 유명한 서가들도 나름대로 자기 서체를 갖고 있지만 근본은 왕희지 서체에서 나온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체보다는 특히 왕희지 체를 좋아하는데 거기서 내가 역량이 부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평하기는 내 글씨가 너무 교과서 적이라고 그러죠. 그런 결함도 좀 있습니다. 내 글씨체가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쩐지 아직도 생각은 그렇습니다. 마음에 쏙 드는 글씨가 없어요.

이 방에 들어와 보니까 전부 다 책입니다. 한학을 공부하셨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게 주로 어떤 책들입니까?
대부분 문집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내가 한문을 많이 해서 책을 구입한 게 아니고 작품을 할 때, 자료가 필요할 때는 찾아서 자료 하려고 준비를 해 놨습니다. 실지로 내가 다작을 못하기 때문에 자료를 다 찾지는 못하고 그저 필요할 때 자료 찾아서 쓰고 그래요. 주로 시 중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유익한 문장이나 그런 것을 골라 쓰지요. 나는 주로 퇴계선생 문집에서 많이 인용을 하는데 그 중에서도 학문에 대한 시구라든가 또는 살아가는데 귀감이 되는 문장 같은 거를 발췌해서 쓰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글씨로 그 어른들의 생각이 발현될 수는 없는 거니까 그저 좋은 문장이 있으면 그걸 잘 써보려고 노력은 하지요.

유려하게 글씨를 쓰시는 분들도 있던데, 선생님 작품이 '교과서 적이다'라는 말씀을 하셔서요. 제가 보기에 선생님은 조금 더 본질에 이렇게 치중하시는 편이 아닌가 싶은데, 어떠십니까?
그거는 성격 탓이지 싶어요. 뭐 변화를 많이 시킨다든가 뭐라고 그럴까 좀 더 힘차게 쓴다든가 이런 생각은 더러 해보는데 그게 성격 탓인지 그게 잘 안 돼요. 어쨌든 쓰면 정직하게 옛날 법첩에 나오는 기준에 맞게 자꾸 쓰게 되고. 그러니까 교과서적이라는 그런 평을 받지. 근데 그게 좋은 평은 아닌데 말입니다 허허. 사람 성격을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게 글씨라고 그러잖아요. 사실 글씨를 써보면 그 성격이 이렇게 보여요.

그런데 좀 활달하게 쓰고 싶고, 힘차게 쓰고 싶지만 그 사람의 성격이 따라주지 못하면 그렇게 표현이 안 되거든. 그럼 나는 늘 써놓고 이렇게 보면 그런 불만이 있어요. 너무 교과서적이다, 그런 평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변화를 주고싶어 시도를 해봤지만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마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작업 할 때는 그게 표현이 안 되지. 마음만 그런 거죠. 그게 표현이 될 것 같으면 변화를 가져왔겠지요.

이렇게 오랫동안 작품을 하셨는데 그에 비해 전시회는 많이 안하시는 편인 것 같습니다. 1985년인가 처음 전시였죠?
아마 그럴 거야. 물론 뭐 역량이 못 미쳐서 그렇겠지만, 전시라는 게 많이 하는 것도 나무랄 일은 아닌데 사실 전시 할 때마다 작품이 발전한 단계를 나타내야 되는 건데, 좀 달라져야 되는데 똑같은 거 가지고 자꾸 하는 게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나는. 그러니까 나는 뭐 많이 하지는 않았어도 사실은 전시를 해보면 달라진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구요. 작품 하는 사람들 보면, 다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고 그런거죠 뭐. 근데, 뭐 특별이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혹시 법첩처럼 '글씨는 이렇게 쓰면 좋을 것 같다'라는 그런 기록을 하나 남기시거나 이럴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뭐 기록할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내가 또 문장력이 없어가지고 글 쓰는 건, 기록 남기는 건 잘 못하니까. 작가들은 작품으로 남길 수밖에 없지요. 근데, 내가 이렇게 글씨를 남겨서 그걸 보고 공부하는 거야 뭐 되겠지만. 이론적으로 이렇게 기록을 해서 뭐 할 계획은 아직은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내 사전에 그런 일은 없지 싶어요. 근데, 참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 기록이라는 것이 있는 동안에는 수백 년도 내려가고 그러는데 그게 기록할만한 것이 되어야 되는데 나는 그런 역량이 아직 못 미쳐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선생님께 배우려는 분들도 많지요?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분도 계십니까?
뭐 더러 있어요. 교남서단이라고 2년에 한 번씩 전시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금도 서도회에 나가면 글씨 배우는 사람들한테 채본 써주고 그리고 작품 하는데 자문도 하고 그렇죠.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인데 대부분 여가선용으로 하기 때문에 뭐 크게 활성화 되진 않고 있고 그냥 친목 단체로 봐야지요. 그 분들한테 딴 소리는 할 게 없고 그저 열심히 해라고 하죠. 열심히 하는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거거든요.

내가 경험한 바로는 딴 방법이 없고 글씨면 글씨, 한문이면 한문 그저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 없지 뭐, 나이가 다 4,50대 이상인데 자기 나름대로 다 생각과 생활이 있을 것 아닙니까? 딴 거는 모르겠고, 공부하는 거는 욕심을 좀 내야 됩니다. 그냥 공부 해가지고는 못 미치고 욕심을 좀 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요. 열심히 하는 것은 욕심을 내야 합니다.

선생님 아호가 석계石溪였다가 요즘은 삼여재三餘齋를 쓰신다구요?
시암 선생님이 '석계'라고 호를 지어주셨는데 지금 영양에 가면 갈암 이현일 선생의 부친이신 이시명 선생의 호가 석계라고 합디다. 같은 지역에서 옛날 어른들 호를 쓰기가 미안해가지고 삼여재로 호를 바꿨어요. 삼여재는 보통 일반적으로는 '세 가지 여가에 공부하라' 이런뜻인데 말하자면 겨울의 나머지, 또 비올 때, 그 다음 저녁 여가에 공부하라 그런 뜻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 뜻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발 뻗고 잘 수 있으면 되고, 또 가문에 얼마의 토지 있으면 되고, 옷 한 서너 벌 있으면 되고, 뭐 그렇게 사는게 나는 좋은데 모두 알기로는 공부하는 얘기로 알고 있지요.

선생님이 그런 뜻을 세우신 이유는 뭡니까? 그것도 선생님 성격과 비슷한가요?
아마 그럴 거예요. 뭐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저 주어진 대로 사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는 거죠 뭐. 글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요새는 더러 그런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내가 글씨 쓸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작품을 보고 불만스러울 때 그러지요. 작가들 고민이 다 그렇겠지만 하여튼 나는 그런 생각이 있어서 그냥 주어진대로 평범하게 살다 가자 뭐 이런 생각입니다.

방금 말씀 하신 거, 정말 겸손한 말씀으로 하신 건지 아니면 실제로 한 번도 선생님께서 만족을 못하신건가요? 이 정도면 난 뛰어나다 스스로 자부한다 이런 마음은 정말 안 드신 겁니까?
그런 거는 아주 생각을 안 해 봤어요. 뭐 이렇게 딴 사람 글씨와 비교해서 잘 썼다 못 썼다 이런 것 보다도 내가 내 작품을 해놓고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다 이런 얘기지요. 아무래도 재주가 미천한 게 맞나 봐요 정말.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요즘은 소위 디지털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래 전부터 붓을 들고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씨에 선생님의 어떤 세계가 담겨있습니까?
뭐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저 하고 싶어서 한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 마음이 그대로 표현 된 것뿐이지. 글씨에 특별히 뭐 어떤 의미를 부여할 만한 특별한 생각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미천한 사람한테 이야기를 청해주시니. 그런데 살아가자면 남한테 도움 될 일을 해야 되는데 글씨라는 건 남 도와줄 일이 없어가지고. 그게 좀 아쉬울 따름입니다.

삼여재 선생의 말씀은 세 시간 가까이 일관된 흐름을 갖고 있었다. 선생의 생각과 성격이 다를 바 없었고 그냥 그대로를 이야기해 주시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참으로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글씨에 스스로 지은 호 ‘삼여재’가 담겨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부디 건강하셔서 삼여재 선생의 글씨를 보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새기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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