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의 기억-1956년 안동 최초의 텔레비전
근현대의 기억-1956년 안동 최초의 텔레비전
  • 조창희(아동문학가)
  • 승인 2020.11.26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재 안동시청 자리에는 6.25 전쟁 직후까지 안동사범고등학교가 있었고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타결되었는데 그 해 4월에 필자는 안동사범부설 화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에는 4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6.25 전쟁으로 사범학교, 안동농림고등학교, 안동중학교 등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어 날씨가 청명한 날은 교정 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공부했다. 이때 안동극장은 현재 삼산동 농협중앙회 맞은편에 있는 커피 전문점자리에 있었다. 삼산동 안동극장 시절에는 아직 무성영화 시절로 <아리랑>, <검사와 여선생> 영화를 상영 할 때에는 변사가 구슬프게 해설을 하므로 장내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배뱅이굿 간판이 그려진 구시장 안동극장 앞에서 선친이 자동샷다로 촬영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 명창, 필자의 아버지(조상국), 만담가 장소팔 씨다. 6.25 전쟁과 휴전협정 직후 상처받은 1950년대, 만담가 콤비 장소팔 고춘자 씨가 전국을 순회하며 웃음을 선사했다. 이때 국악인 이은관 명창이 배뱅이굿을 곁들여 극장을 돌며 공연하던 시기였다. 강원도 이천군이 고향인 선친(조상국)과 이은관 명창은 고향 땅 죽마고우였고 안동극장 공연이 있었을 때 어린 시절의 필자도 특별히 장소팔 씨에게 개다리춤을 사사 받은 기억이 난다. 중절모에 코트, 스웨터 등 지금의 복장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세련된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배뱅이굿 간판이 그려진 구시장 안동극장 앞에서 선친이 자동샷다로 촬영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 명창, 필자의 아버지(조상국), 만담가 장소팔 씨다. 6.25 전쟁과 휴전협정 직후 상처받은 1950년대, 만담가 콤비 장소팔 고춘자 씨가 전국을 순회하며 웃음을 선사했다. 이때 국악인 이은관 명창이 배뱅이굿을 곁들여 극장을 돌며 공연하던 시기였다. 강원도 이천군이 고향인 선친(조상국)과 이은관 명창은 고향 땅 죽마고우였고 안동극장 공연이 있었을 때 어린 시절의 필자도 특별히 장소팔 씨에게 개다리춤을 사사 받은 기억이 난다. 중절모에 코트, 스웨터 등 지금의 복장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세련된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시절 기억나는 것은 화산국민학교에 입학한 해에 사범학교 학생들이 연습하고 준비한 학예발표회를 안동극장에서 할 때였다. 이때 마지막 순서로 연극 공연을 하는데 내용과 제목은 기억이 안 나도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 출연자 전원이 무대에 등장하여 인사하면서 외친 구호가 생생하다. 그 구호는 '세우자! 세우자! 안동대학 세우자!'라는 구호였다. 이미 이 시절부터 안동에 대학교를 세우자는 꿈을 펼칠만큼 안동의 교육열이 대단했음을 보여 주였던 것이다.

이후 국가의 교육정책 개혁으로 사범학교는 폐교되고 교육초급대학이 새로 개교를 했고 그런 과정에서 화산국민학교도 폐교되어 2학년 때에는 안동중앙국민학교(현 안동초등학교)에 편입을 했다. 이러한 과도기 때에 삼산동 안동극장은 구시장으로 이전을 하여 구시장 안동극장 시대를 열었다. 현재 구시장 골목 안동백화점 옆에는 지금도 안동극장자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절에 성행한 영화가 <OK목장의 결투>, <셰인>, <자이언트> 등 서부 활극 중심이었다.

6.25 전쟁으로 파괴되어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선사해 주는 만담가 장소팔, 고춘자 씨 콤비가 코미디의 1세대 주자로 전국의 극장가를 순회 공연할 때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국악인 이은관 씨도 함께 활동을 하였다. 이것이 인기가 있고 보니 여배우 조미령 씨를 주연으로 한 영화 <시집가는 날>에 제작 공연되어 흥행에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은관 씨는 필자의 선친(조상국)과 강원도 이천군에서 태어나서 함께 자란 친구로 실향민이고 보니 공연차 안동극장에 오면 여관에 투숙하여 아버지를 만나 회포를 풀고 가셨다. 장소팔 씨, 이은관 씨, 아버지 이렇게 세 분이 안동극장 앞에서 찍은 50년대 사진이 소중하게 남아있다.

화산국민학교에서 안동중앙국민학교로 전학 편입했을 때 2학년 담임이 최재우 선생님이었다. 최 선생님은 정구 실력이 대단했었다. 3학년 때에는 남학생, 여학생 혼합반으로 담임은 여선생님이었는데 가을에 시집가면서 교편을 사직하게 되니 아쉬운 마음이었고 선생님 성함은 기억되지 않는다. 4학년 때에는 배병선 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그림을 아주 잘 그리셨다. 반면에 음치여서 음악시간이면 풍금치는 여 선생님 음악시간에 양해를 구해서 항상 합반으로 음악시간을 보냈다.

젊은 시절의 오상혁 선생. 안동에 최초로 텔레비전을 보급한 분이다. 훗날 오상식, 오상혁의 선친 되시는 오윤수 선생은 안동읍 읍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오상혁 선생. 안동에 최초로 텔레비전을 보급한 분이다. 훗날 오상식, 오상혁의 선친 되시는 오윤수 선생은 안동읍 읍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4학년 때였다. 안동극장에서 텔레비전을 보게 되는 문화적 충격이 있었다. 1956년 안동에 텔레비전을 최초로 도입하여 보급한 분은 오상혁 선생이다. 안동중앙국민학교 제48회 동기동창생인 오상식의 형님 되시는 분으로 안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에 입학하여 음악가의 꿈을 키워가던 분이었다. 서울에 텔레비전이 있는 것을 보고 구입하여 안동에 귀향하여 안동극장 측에 교섭하여 극장 무대에 텔레비전을 설치해 놓고 안동에 있는 국민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단체로 관람료를 내고 안동극장에 입장하여 텔레비전을 보게 했다. 넓은 극장 무대에 사과 상자만한 텔레비전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 신기했고 호기심이 솟구쳐 올랐다.

이렇게 처음 텔레비전을 보게 된 학창 시절의 실화를 2015년 제48회 동창회 모임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가졌을 때에 참석한 1백여 명의 동창생들 중에서 캐나다에 이민을 간 동기 김윤희의 말로 더 확인하게 되었다. 김윤희는 잠시 귀국 중에 동창회 모임 소식을 듣고 참석하여 안동극장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시간에 자신이 영사실에 불려 들어가서 오상혁 선생과 인터뷰하면서 동요 노래를 불렀는데 그 모든 상황이 촬영되어 무대에 설치한 텔레비전 스크린에 비쳐 나왔다고 했다. 오상혁 선생을 통해서 텔레비전을 처음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기생인 4학년 여학생이 최초로 인터뷰하면서 동요 노래하는 장면이 스크린에 비쳐진 것까지 경험했던 것이다.

안동초등학교 제48회 동창생들로 부산에서 친목을 도모할 때 찍은 사진이다.
안동초등학교 제48회 동창생들로 부산에서 친목을 도모할 때 찍은 사진이다.

김윤희 동기생은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는데 본인은 캐나다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잠시 귀국해 있는 동안에 국학진흥원에서 1박을 하였고 대구에 정착한 동기생들이 주선하여 대구에서 하루 모임을 가졌고 또 부산에 정착한 동기생들이 주선하여 부산에서도 하루 친목을 도모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후부터 안동 지역에서는 격월에 한 번씩 동기생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8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