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근현대 정치인물사-잊혀진 이름 국회의원 박해충
안동 근현대 정치인물사-잊혀진 이름 국회의원 박해충
  • 권달우(경북기록문화연구원 근현대기록팀장)
  • 승인 2020.12.01 11:3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사람들은 안동을 '야성野性의 도시'라고 불렀다. '보수 텃밭'으로 낙인 찍힌 지금과는 달리,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실제 안동은 정치적 야성이 무척 거센 지역이었다. 안동에서 그러한 성향이 최고조에 달했던 3·4·5공화국 시절, 그 한가운데에 고 박해충이 있었다. 그는 안동에서 당시 야당(민주당·신민당·민한당)으로 5선(5대·8대·9대·10대·12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988년 제13대 총선까지 안동에서 35년 세월 동안 야당과 무소속을 번갈아 가며 무려 아홉 번 출마했다. 그 중 네 번의 선거에서 당선됐고, 마지막은 전국구의원(비례대표)을 지냈다. 박해충은 유신정권과 신군부의 억압과 폭력에도 야당의 이름표를 끝내 버리지 않았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 낙선한 것을 끝으로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안동의 야성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는 지난 2005년 2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당시 향년 78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났다. 현재 박해충에 관한 기록은 의정활동 당시 국회속기록과 언론보도, 유족들이 간직하고 있던 기념사진 몇 장이 전부다. 기록이 점점 빛을 잃어가듯이 그에 관한 기억 또한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남은 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유족과 정치 동지, 지역민들의 구술증언을 더해 엇갈린 기억의 조각을 맞춰봤다. 서슬 퍼렇던 군부 시절,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자신만의 정치 인생을 걸어갔던 인간 박해충의 생애, 그리고 그의 정치적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안동다목적댐 준공식의 일화 / '박정희와 박해충'

"안동 대감님! 나오세요."
1976년 10월 28일 오후. 안동다목적댐 준공식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발전기 가동 버튼을 누르기 직전 단상 아래 있던 박해충 의원을 갑자기 불러올렸다. 시동 스위치를 함께 누르자는 제안이었다.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였다. 당초 박 대통령과 김재규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 안경모 한국수자원공사 사장만이 참여키로 한 행사였다.

"신민당 박해충을 박통이 직접 챙기다니"

"지역구 여당 의원도 있는데…".

참석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행사장의 분위기는 금세 어수선해졌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박 의원은 급하게 양복 단추를 채우고 단상에 올라 한수원 안 사장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이때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지 못한 민주공화당 소속 김상년 의원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같은 지역구 의원 두 명 중 여당인 자신을 배제한 채 야당 의원만을 챙긴 것에 자못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하나, 둘, 셋!"

사회자의 우렁찬 구령에 맞춰 네 명이 동시에 빨간색 스위치를 힘껏 눌렀다. '우우우웅~'. 집채만 한 수차발전기가 거대한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착공 5년 반 만에 완공된 안동다목적댐이 첫 가동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그리는 국가 번영의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중화학공업시대에 영남지역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구미, 창원 등의 단지 조성과 더불어 안동다목적댐 건설로 인한 풍부한 수자원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민당 소속이었던 '박해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뤄낼 수 없는 사업이었다. 지역구에 댐이 들어서는 것을 만약 반대하고 나서기라도 했더라면, 사업은 시작부터 엄청난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1976년 10월 28일 안동다목적댐 준공식 기념행사. (왼쪽부터)김재규 당시 건설교통부장관, 박정희 대통령, 안경모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신민당 박해충 국회의원(사진제공 박원근)
1976년 10월 28일 안동다목적댐 준공식 기념행사. (왼쪽부터)김재규 당시 건설교통부장관, 박정희 대통령, 안경모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신민당 박해충 국회의원(사진제공 박원근)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에 여야가 어디 있습니까."

박해충은 평소 이 말을 자주 했다. 여와 야를 넘어 안동다목적댐 건설을 위해서 두 팔 걷고 협조했던 박 의원은 대한민국 산업화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렇기에 박 대통령은 더더욱 이 순간의 감격을 박 의원과 함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날 늦은 오후 박 대통령은 안동역 광장을 메운 군중들의 박수와 환송을 받으며 경남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대통령 전용 열차에 올랐다. 열차 계단에 오르기 직전까지 박 의원의 손을 잡고 등을 쓰다듬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행사에 모인 안동사람 모두가 대통령이란 든든한 뒷배가 생긴 마냥 의기양양해졌다. 이후 안동에선 "대통령과 박해충이 같은 박씨라 친분이 두텁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한쪽에선 박해충의 친정부 성향 정치 행보를 두고 '사쿠라'(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라며 비꼬아 말하기도 했다.

 

박해충의 생애 / 산골 소년에서 5선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박해충은 1928년 12월12일 안동군 남후면 개곡리에서 태어났다. 안동초등학교(추정), 대구공업학교(현 대구공고)를 졸업, 경희대학교 법대를 수료했다. 6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 대구공업학교를 다니며 평일에는 신문 배달과 고구마 장사로 돈을 벌었고, 주말에는 안동 고향마을로 내려와 가족을 보살폈다. 박해충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 공군으로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전쟁 중 육군으로 편입돼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가 수류탄 폭발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후 공군으로 복귀해 상사로 예편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안동에 살던 가족을 모두 데리고 대구 대봉동으로 이사해 살던 중, 당시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을 와 박해충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의 4살 어린 최혜숙을 만나 그해 결혼했다.

정치의 첫발은 야권 정치인들과의 인연에서부터 시작 됐다. 박해충은 20대 초반 유진산, 신도환 등 야권인사들이 결성한 청년단체(확인불가)에서 활동하며 정치 인맥을 넓혀갔다. 그러다 1954년 만 25세로 피선거권을 얻게 된 박해충은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안동군 을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아쉽게 낙선했다. 낙선 후 박해충은 신익희(제헌·2대 국회의장)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정치적 행보를 본격화했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또 다시 낙선했다. 하지만 젊은 야망가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60년 4.19혁명 이후 그해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세 번의 도전 끝에 당선에 성공했다. 박해충은 선거 막바지 합동 유세를 하던 중 자신이 발언을 할 때마다 구경 나온 어르신들의 갓이 연신 아래 위로 움직이는(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고선 당선을 직감했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 박해충의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의 정치 인생 35년 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시간보다 오히려 낙선하거나 연금 상태로 지낸 기간이 더 많았다. 1961년부터 재선에 성공했던 1971년까지 이 10년간은 박해충의 정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시련기였다. 당시 동대문에서 솜 장사와 배달 일을 하며 힘들게 살았던 박해충은 1963년 제6대 총선, 1967년 제7대 총선에 연이어 낙선하면서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 겨우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서울 노원구 월계동 산을 매입해 집 한채를 짓고 젊은 부인과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궁핍하게 살았다. 와신상담하면서도 박해충은 출마의 꿈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치러진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고, 이후 9대·10대 선거에 연달아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 최전성기를 맞는다.

야권의 거물정치인이었던 그였지만 만년의 삶은 의외로 조용하고 평범했다. 1988년 제13대 선거 낙선 후 박해충은 서울 월계동 자택에 칩거하며 일체의 정치활동도 하지 않았다. 초로에 들어선 자연인으로 살며 밭을 가꾸고 가끔 한강에 나가 낚시를 즐겼다. 몸속에 박힌 수류탄 파편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폐와 간을 괴롭혔다. 선거운동을 하던 중 결핵을 앓으며 피를 심하게 토했던 것이 병세 악화의 징후였다. 박해충은 폐손상이 심해 만성적 폐부전증을 앓았다. 그러다 2005년 심한 토혈로 병원치료를 받던 중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로 별세했다. 사망원인은 간 손상으로 인한 식도 정맥류 파열이었다. 의사인 아들 박원근 교수가 직접 치료를 맡았고, 끝까지 곁을 지켰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이 또렷했다고 한다. 그는 아들에게 “그동안 참 잘했다. 어머니 잘 모셔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고단했던 삶을 조용히 마무리했다.

 

박해충의 정치 인생 / 군사정권에 항거하며 야당 정치 35년

박해충은 정적政敵이 없는 정치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평생 야당에서 정치를 했지만, 여당 정치인들과도 두루두루 잘 어울렸다. 야당 내에서도 특별한 계보는 없었다. 당시 상도동계(김영삼)나 동교동계(김대중)와 같이 특정계파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독불장군처럼 자신만의 정치를 펼쳤다. 국가적 실리를 위해서라면 당을 떠나 여당에도 곧잘 협조했다. 이러한 행보로 '야당의 탈을 쓴 친정부 정치인'이라 비판을 받았고, 같은 야당 의원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실제 박정희 군사정권이 울산 현대중공업 건설사업 등 대규모 국가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야당의 입장과는 반대로 매우 협조적인 자세를 보였다.

박해충의 선거 이력은 화려하다. 한평생 선거를 하며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35년간 총 아홉 번의 선거에 출마했다. 그중 다섯 번 낙선, 네 번을 당선했다. 마지막으로 재임했던 1985년 제12대 국회 때는 민주한국당 전국구의원(비례대표)에 선출되면서 다섯 번째 금배지를 달았다. 역대 안동 출신 의원 중 최다선 기록이다. 1954년 첫 출마 당시 박해충의 나이는 만 25세로 전국 최연소였다. 세 번째 출마했던 1960년 제5대 총선에서 그는 만 31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첫 당선이 됐다. 당시 함께 당선된 야당 내 30대 청년 의원 중 김영삼(부산), 박준규(대구)와 함께 '영남의 3총사'라 불리며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당선의 기쁨도 잠시.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국회가 해산되면서 박해충은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박해충이 국회의원으로 재임했던 제5대·8대·9대·10대·12대 국회 중 제9대 국회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국회가 군사정변, 유신개헌, 신군부 쿠데타 등으로 임기 도중 강제 해산됐다. 제5대(1961년) 때는 군사혁명위원회포고령(61.5.16) 제4호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면서 임기 4년 중 9개월18일, 제8대(1971년) 때는 대통령특별선언(72.10.17)에 의한 국회해산으로 1년3개월17일, 제10대(1978년)는 제8차 개정헌법(80.10.27) 부칙 제5조 제1항(10.26사태 관련)에 의해 임기 6년 중 1년7개월16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박해충이 5선을 지냈던 기간 중 국회의원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13년 남짓에 불과하다. 이러한 수치는 60~80년대 헌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무참히 짓밟았던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성과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세력은 이듬해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기성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1962년 3월16일 이 법으로 박해충을 포함한 모든 국회의원이 직을 박탈당했고, 구정치인 4천374명의 정치활동도 금지됐다. 당시 박해충은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11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돼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69년에는 신민당과 정치활동정화법 해금인사, 재야인사 등이 규합해 만든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위원장 김재준, 총 329명)에 참가하면서 군사정권의 감찰대상이 되기도 했다.

군부와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0년에는 5.17쿠데타 이후 제5공화국 출범에 반대하다 또 한 번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포함한 정치인 800여 명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이 중에는 박해충도 포함돼 있었다. 이때 수많은 정치인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가산을 압류당하는 등 신군부의 갖은 정치압박을 받았다. 박해충은 1984년에야 비로소 정치규제에서 해금된다. 당연히 1981년 제11대 총선(3.25)에는 출마를 할 수 없었다. 정치규제가 풀린 다음 해인 1985년 박해충은 12대 총선(2.12)에 나서 민주한국당 전국구의원(비례대표)으로 선출됐다. 어렵사리 되찾은 의원직이었지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등을 포함한 제9차 합의개헌의 확정과 제6공화국(노태우 정부)의 탄생 과정에서 제12대 국회가 조기 해산하면서 4년의 임기 중 3년1월18일 만에 의원직을 내려놔야 했다.

박해충은 1988년 제13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 곧바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통일민주당 공천에 배제되면서 야권 내 좁아진 자신의 입지와 고령의 나이를 실감했다. 특히 자신의 비서관이었던 오경의(13대 국회의원)의 국회 입성을 지켜보면서 구세대의 퇴진을 바라는 시대적 요구를 자각했을 것이다. 박해충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차세대로 권력의 이양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후 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지역구 국회의원 모두가 여권 또는 보수당 계열로 당적을 옮기게 된다. '보수의 심장'이란 수식어가 싹트기 시작한 때이다. 박해충의 정계 은퇴는 안동에서 ‘야성의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박해충에 대한 기억들 / '잡성' 전략으로 안동 문중정치 극복, 뛰어난 스킨십·카리스마 70년대 '박해충 열풍'

1954년 제3대 총선 당시 박해충의 선거구호는 '잡성도 좀 해보자'였다. 안동에서 안동김씨·안동권씨를 제외하고 '잡성'으로 평가받는 박씨 후보의 소외감과 설움을 부각해 선거전략에 활용한 것이다. 다음 선거인 제4대 총선(1958년)에서도 또다시 '잡성의 권리'를 외쳤다. 안동권씨와 안동김씨는 안동에서 아주 독특한 방식의 연대를 통해 선거 때마다 타 성씨의 진입을 합동으로 견제해 왔다. 실제 제헌국회를 제외한 모든 총선에서 안동김씨·안동권씨 두 문중이 당시 안동군 갑·을 선거구의석 두 자리를 거의 나눠 가지다시피 하고 있었다(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박해충의 이러한 선거전략은 지역사회에서 양대 문중인 안동김씨·안동권씨 혈연공동체의 강한 연대감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안동김씨·안동권씨 후보에 대한 이외성씨 유권자들의 반발심리를 교묘히 자극해 표심을 얻으려는 전략이었다. 언뜻 보면 문중 정치를 타파하자는 주장처럼 들리지만, 이는 안동지역사회 특유의 혈연적 유대감을 절묘하게 역이용한 선거전략이었던 셈이다. 박해충의 이러한 전략은 안동지역에서 큰 화제를 모으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박해충은 뛰어난 선거전략가였다. 그가 재선에 성공했던 1971년 제8대 총선에선 소위 ‘朴-朴 전략’을 사용했다. 총선이 제7대 대통령선거와 한 달 차이를 두고 치러지면서, 당시 대통령 후보 박정희의 위세에 편승해 '대통령은 박정희, 국회의원은 박해충'을 구호로 외쳤다. 박해충은 그해 선거에서 안동권씨 후보(권오훈 6대 의원), 안동김씨 후보(김대진 7대 의원)를 모두 물리치고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당선된다. 박해충은 이러한 전략으로 당시 안동지역 범박씨 유권자들의 결집을 끌어내는 효과도 톡톡히 봤다.

박해충을 곁에서 지켜 봐왔던 이들의 기억 속에 공통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는 바로 '달변가'이다. 마이크 앞에 서면 유창한 언변과 능란한 화술로 청중을 단숨에 사로잡았다고 모두들 기억했다. 선거 유세 때 박해충이 단상에 서면 연설이 끝나기 전까지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입담 좋기로 유명했다. 넘치는 카리스마, 인간적 호감도 등도 일치하는 기억들이다. 그리고 대중적 스킨십이 뛰어나 선거 때마다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

정치인으로서 박해충의 인간적인 면모와 매력적 요소들은 70년대 당시 유신정권의 억압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안동지역 유권자들에게 야당 표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박해충은 8대(1971)·9대(1973)·10대(1978) 총선에 연이어 당선되면서, 안동지역 내 소위 ‘야당 열풍’을 이끌어낸다. 이때 당시 박해충을 따르던 열성적 지지자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 '춘추동지회'이다. 제8대 총선에서 당선된 즈음인 70년대 초반 박해충의 동료, 후배, 비서관(현재보좌관) 등이 모여 결성한 사조직으로, 창립 당시에는 박해충과 측근 인사들의 친목 단체로 운영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목을 넘어 박해충의 당선을 위한 선거조직으로까지 발전했다. 추후 안동군부 각 지역마다 면책을 두고 조직적으로 관리·운영됐다.

 

박해충의 유일한 저서 '민주정치의 지름길'

『민주정치의 지름길』은 박해충이 6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1966년에 출간한 책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담아냈다. 박해충은 책에서 수년 전 투표소에서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민주정치가 정착하지 못했던 당시 선거제도의 폐단을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우민화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던 위정자(군사정권)들의 교활함도 함께 꼬집었다.

책 속 '그만 찍고 나왔다'라는 소제목의 글을 발췌해 소개한다. 이 글에서 박해충은 정치인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책임의식을 강조하면서, 1967년 제7대 총선에서는 민주적인 절차가 인정되고 선진화된 선거제도가 정착되길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희망과는 반대로, 책 출간 다음 해인 1967년 6.8총선 과정에서 저질러진 수많은 부정 선거 행위로 말미암아 정국이 혼탁한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추후 공화당은 일부 당선자와 지구당 위원장을 제명하며 스스로 부정 선거임을 자인했다. 글의 내용 중 일부 옛날식 표현은 지금에 맞게 수정했다.

『민주정치의 지름길』 박해충 저(1966) 中 '그만 찍고 나왔다'(75~77p) 

수년 전에 있었던 무슨 선거 때의 이야기다. 어느 시골의 투표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갓난애를 업은 어떤 젊은 부인이 기표소에서 나오면서 아주 미안쩍은 얼굴로 선거위원들을 보고 한다는 소리가 “애가자꾸 울어서 그만 찍고 나왔어요”라고.

위원들은 의아해하며 “그만 찍고 나왔다니 무슨 말이냐”고 찬찬히 따져 물었더니 부인은 칠, 팔 명이나 되는 입후보자들의 이름 밑에다 모조리 「공」표를 찍을 생각이었으나 갓난애가 울어서 그만 너, 댓 개밖에 못 찍고 그만두고 말았다는 것. 그 말을 듣고 위원 일동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고.

또 하나, 어떤 저명인사의 노모는 선거 때 부탁을 받았으나 정작 투표용지를 펴보았을 때는 그만 그 사람의 이름을 잊었다고. 박 씨인가 방 씨인가 성만은 알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박 씨인가 방 씨인가가 두 사람이어서 망설이던 끝에 마지막 착한(?) 결정을 내린 것이 두 군데에 다 찍어주는 것이었다나. 그러니 그 표는 무효가 될 수밖에.

문맹이 많고 제대로 정치훈련이 안 되어 있는 후진국의 투표란 어떻게 생각하면 그처럼 맹랑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동남아의 모국처럼 작대기 기호도 못쓰고 입후보자급 소수정당을 동물의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보다는 나은 편인가 싶다.

<중략>

일부의 「엘리트」의 책임이라 할까. 후진국에서 민주주의가 되느냐 안되느냐의 관건은, 위정자가 민주주의를 할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적이 되지는 못하지만 맞는 말이라 하겠다. 민주정치에는 민주주의적인 방법과 절차가 따라야 하는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후진국에 있어서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라 하겠다. 이 한마디를 육칠(1967)년 총선에 붙인다.

 

 
특별인터뷰①

아들 박원근(차의과대학 내분비내과 정교수)씨의 기억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라고 들었습니다. 부친(박해충 의원)이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군인들에게 끌려가서 11개월간 옥살이를 하셨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군부독재를 규탄했다는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부친이 수감 되어 계신 동안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어머니가 어린 두 남매를 홀로 키우시느라 갖은 고생을 겪으셨습니다.

유진산, 김대중, 김영삼, 태완선, 유치송, 황낙주, 이상신, 서상린, 김치열 등의 정치인들과 친분이 두터우셨습니다. 이분들은 월계동 집에도 자주 찾아와 함께 식사도 하고 간담회도 가지셨습니다. 특히 상도동계로 통하는 최형우, 김동영, 서석재, 김덕룡 등 정치인들이 자주 오셨고, 여당 쪽 인사로는 김치열 장관과 서상린 의원 등과 친분이 많으셨습니다. 상도동계, 동교동계와 같은 계파 정치를 하지 않으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남다른 인연이 있으셨습니다.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이전인 5대 국회의원 시절(1960년) 국정감사에서 당시 군인 신분이었던 박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유신정권에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여와 야를 떠나서 국가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협조를 많이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70년대 초반 울산 현대중공업 건설에 야당의 반대가 심했던 때였는데, 당시 해당 상임위 소속(건설위원회)이었던 부친에게 야밤에 직접 전화를 해 국가 미래를 위해 도와달라고 부탁한 일이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두 분의 인연이 더욱 각별해지셨습니다. 그 당시 집에 있던 제가 전화를 직접 받았습니다. '저 박정희입니다. 의원님 계십니까'라며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김영삼 대통령과는 제3대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부터 친하게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제5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영남 출신의 두 분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각별한 사이로 저희 월계동 집에도 자주 들리셨습니다. 이후 김영삼 의원의 대통령 출마로 당내 계파 갈등이 심해지자 자주 의견충돌이 있으셨고, 결국 대통령 당선 이후 연락을 하지 않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1979년 10.26(박정희 대통령 피살)이 터지고 나서 얼마 뒤 군인과 경찰들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 부친을 끌고 갔고, 집에 있던 귀중품과 자동차, 가보(호피) 등 값이 나갈 것 같은 물건을 모조리 압수해 갔습니다. 이때 모친 소유의 토지 절반을 압류당하기도 했습니다. 광화문 분실로 추정됩니다만, 당시 보안사령부 특별조사실에서 부친은 군인들에게 부정축재자로 몰려 갖은 수모와 핍박을 당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부친을 뵈러 매일 찾아갔었는데, 부친으로부터 '집안 가보(호피)만은 꼭 찾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제가 직접 서빙고 분실을 찾아가 압수당한 물건을 돈 주고 찾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압수당한 모친의 귀금속을 돌려받았으면서 '이건 가짜니까 가져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부친이 출소한 후 이 같은 사실을 말씀드리니, '길거리에서 모조품을 산 것인데 네 어머니가 모르고 살았으면 그만 됐다'라고 하시더군요. 모친은 그것도 모르고 가짜 귀금속을 평생 소중히 간직하고 사셨습니다. 이후 부친은 수년간 연금 상태로 계셨고, 11대 총선에서도 출마를 못 하시다가 1984년에야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셨습니다.

 

 
특별인터뷰②

'박해충의 비서관' 오경의 전 국회의원(현 한민족평화재단 총재)

박해충 의원의 8대·9대·10대 의원 시절 비서관(보좌관)으로 일했습니다. 박해충 의원은 국회에서 발언권이 상당히 센 분이었어요. 그래서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영향력이 상당했어요. 8대 때 건설위원회 소속이었는데 안동에 도로, 철도 분야 사업을 많이 가지고 오셨어요. 안동다목적댐 건설은 박해충 의원이 태완선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협의해서 추진했었던 사업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안동에 내려와 유세를 하면서 ‘나랑 박해충은 같은 박씨입니다’라며 지역사람들의 지지를 호소했었던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본의 아니게 박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인식되었죠. 실제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야권의 유진산 신민당수나 김영삼 의원, 김대중 의원 등이 박해충 의원을 야당의 대표인물로 내세워놓은 상황에서, 이러한 친정부적 행보는 적잖은 원망을 샀어요.

1975년 8대 총선 때 신민당 공천을 못 받아서 난리가 났었어요. 선거를 얼마 안 남겨두고 공천장이 김충섭(당시 경쟁후보) 씨에게 갔다고 해서, 저와 당원 6~7명이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서울 신민당 중앙당사로 쳐들어가 공천장을 되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중앙당사 앞을 지키고 있던 패거리들이 우리를 막아서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났어요. 그때 저와 안동지구당원들이 30여 명을 단숨에 제압해 버리고는 중앙당 사무실에 올라가 '공천 돌려놔라'며 엄포를 놓고 내려왔지요. 결국에 며칠 뒤 공천은 번복되어 박해충 의원이 받게 됐고, 선거도 이겼습니다. 8대 총선을 함께 치르고 난 뒤 박해충 의원이 저에게 '서울 가서 같이 일하자'며 비서관(보좌관)을 제안하셨어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11대 총선에는 정쟁법에 묶여 출마를 못 했어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안기부와 특별조사실에 계속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았어요. 당시 저도 비서관으로 수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불법자금에 대해 계속 추궁을 하며 사실이 아닌 내용에 대해 인정하라고 강요하더군요. 끝까지 거짓으로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 아닌 내용을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요. 제가 1985년 제12대 선거에 첫 출마를 했을 때 박해충 의원은 당시 전국구로 나오셨어요. 그래서 지역구 선거에 물심양면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하지만 아쉽게 낙선했습니다. 1988년 제13대 때 다시 출마해 당선됐는데, 박해충 의원 도움을 다방면으로 받았습니다.

 

안동의 야성野性 지킨 박해충

유신체제 아래에서 박해충의 연이은 당선은 안동지역에서 큰 이변이었다. 이는 당시 안동의 유권자들이 무조건 여당만을 지지하지 않았고, 또 거대 문중들이 혈연공동체적 연대망을 작동하여 야합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그때야말로 안동의 '야성'이 가장 뚜렷했던 시기였다. 극단으로 치닫는 유신 독재에 항거하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타파하려 했던 안동 지역민들의 기대심리가 만들어낸 결과라 봐야 할 것이다.

박해충에 대한 인물평가는 다양하다.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 자신만의 소신정치를 펼쳤음에도 중앙 정치무대에선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여와 야의 경계가 불분명했고, 야당 내 YS·DJ처럼 자신만의 계파를 키워정치 세력화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국가발전이란 목표를 위해서라면 여야를 초월해 협력적 자세를 취했다는 점은 여타 정치인들과 차별되는 점이다.

박해충은 안동 정치사에서만큼은 뚜렷한 선 하나를 그었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 유신 독재정권의 야만과 폭력 속에서도 민주정치를 향한 희망의 끈을 끝내 놓지 않았다. 야당으로 5선을 지내며 꺼져가는 '안동의 야성'을 지켜냈다.

박해충은 이제 잊혀진 인물이다. 박해충이 활동했던 시기와 달리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환경은 많이 변해있다. 지나간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보다 유연하고 다각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고 박해충 의원 관련 인터뷰에 도움을 주신 박원근, 정창진, 김인환, 오경의, 안승관, 조영수, 권오수, 권오을 님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8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휘태 2020-12-01 20:15:25
모처럼 안동을 생각해보는 좋은기사 잘봤습니다.
어느 시대나 희망도 있고 좌절도 있고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나 그 지역이나 그 사람의 정의로운 정신은 언제나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웅부안동, 대한민국 역사의 횟불 웅도경북, 5천년 유구한 민족자주정신을 자손만대로 이어가야할 시대적 사명을 되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