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위한 스토리텔링이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시민을 위한 스토리텔링이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 유경상
  • 승인 2021.01.2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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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창고, 아홉번째 문을 열면서
유경상/기록창고 발행인
유경상/기록창고 발행인

석 달에 한 번씩 예천 출신 보통사람의 구술생애사를 모천사회적협동조합에서 발행하는 계간 『예천산천』에 수록하고 있다. 질문을 거듭하며 한 사람의 생애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눈에 뻔쩍 띄는 이야기들이 두 귀를 파고들어 온다.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왔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인생 여정엔 교훈이 되고도 남을 스토리들이 흘러넘친다.

내친 김에 지난 10여 년간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맘모스 제과점’ 1세대 이석현 대표의 생애를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었다. 예천읍 왕신리 출신인 그의 맘모스 상점은 안동 신한은행 앞 문화의 거리에 위치한다. 너무 겸손한 목소리로 ‘제가 무슨 자랑할 게 있습니까?’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안동에 가면 구시장 골목에 가서 꼭 ‘찜닭’을 먹고, 안동댐 ‘월영교’에 가거나 조금 멀리 떨어진 ‘하회마을’ ‘도산서원’을 구경해야 한다는 게 안동을 찾는 관광객의 일반 코스이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맘모스’ 빵집 앞에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토박이 시민 입장에서야 오래전부터 이 빵집은 그냥 ‘맘모스’에 불과했다. 그러나 관광객들의 환호를 목도하는 순간 빵집 하나가 안동지역 브랜드를 엄청 크게 제고시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늦게 맘모스에 얽힌 스토리를 잘 다듬으면 지역을 더 지역답게 만들 스토리텔링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왜 ‘맘모스’ 라는 상호를 달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참고삼아 대전의 유명한 ‘성심당’ 빵집을 소개하는 책을 펼쳤다. 책 제목은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이다. 앞부분을 읽으며 왜 ‘성심당(聖心堂)’일까? 궁금증이 풀렸다. 성심당을 설립한 1세대 임길순은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예수의 마음을 상호로 삼았다. 1956년 밀가루 두 포대로 대전역 노점 찐빵집을 시작한 이래 평생을 어려운 이웃에게 빵을 나누며 살았다. 그런데 본격적인 나눔을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당시 대전 대흥동성당의 20대 젊은 신부를 만나면서부터이다.

그 신부는 바로 젊은 날의 ‘두봉 주교’였다. 성심당 빵집 1세대인 임길순과 대흥동성당의 젊은 두봉 보좌신부의 만남은 성심당 빵이 대전지역사에서 향토음식으로 사랑받게 되는 스토리텔링의 오메가이자 알파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새로운 지평을 창조하는 하나의 밀알로 작용했다.

이후 두봉 신부는 1969년 천주교안동교구청의 초대 교구장을 맡게 된다. 50여 년간 성당 울타리를 넘어서며 지역사회에 수많은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올해로 92세인 두봉 신부가 안동지역과 인연을 맺기 이전 대전에서의 젊은 날 행적을 알게 해 준 이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2007년 5월 작고한 동화작가 권정생이 소설 『한티재 하늘』을 출간한 때는 1998년 가을 즈음이다. 서너 권이 더 집필됐으면 좋으련만, 건강상 중단되어 아쉬움이 큰 미완의 자전적 소설이다. 1895년 을미의병 무렵부터 한티재 너머 삼밭골 소작농들의 신산스런 삶을 경북북부권의 아름다운 사투리로 형상화시켜 내어 문단에서도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권정생 작가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삼밭골 할매 할배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다가 작품소재로 썼다고 밝혔다. 창작의 허구성을 넘어서서 당시 민초의 삶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기록적 가치가 매우 크다.

소설 등장인물인 조석과 분들네는 붙잡힌 빤란구이(의병대) 두 명이 마을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즉결로 총살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두려움과 절망을 느끼지만 분노의 움을 가슴에 틔우게 되는 장면이다. 손바닥만한 땅 뙈기를 가진 농민과 무토지 농민의 생존력을 굴곡진 식민조선의 근대적 삶과 일치시킨 소설을 읽다보면 사회과학적 지식이 없더라도 공감이 일렁이게 된다.

1910년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1909년 안동·예안의 농민 인구수는 6만4천7백여 명이었다. 한 가구 당 평균 경지면적은 990평으로 대부분이 영세 농민이었다. 1928년에 이르러서도 한 마을에 무토지 농민은 약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식민지배 아래 소작지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농민 다수가 절대 빈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안동에서 소작농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 발생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탈이 더욱 가혹해지는 가운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새로운 시대이념을 받아들인 수많은 젊은이들이 새 사회를 위한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후 새롭게 조성한 군자마을에 들어서면 기적비(紀績碑) 하나가 서 있다. 항일애국지사 김남수 선생 비석이다. 3.1만세운동 당시 예안장터 만세시위에 앞장선 후 노동·농민운동에 참여하는 등 계급노선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민족독립 운동가이다. 가장 밑바닥 천민이었던 백정의 해방을 위한 형평사운동이 경남 진주에서 발원하자 당시 조선일보 기자와 청년회 간부 신분으로 경북지역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민족해방의 길을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민중의 조직, 전력화를 통해 이루려 했지만 8.15광복 직전인 1945년 3월에 운명했다.

아버지 김남수에 대한 기억을 편린으로나마 남긴 서울대 국문학과 故 김용직 교수의 자전적 글을 읽으면 1930년~40년대 안동지역사의 일부가 펼쳐지고 있다. 역사와 시대의 정신에 충직하고자 노력했던 한 인간의 삶의 여정에는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 사변 또한 많았을 것이다. 아들 김용직은 아버지 김남수와 권오설과의 만남, 이상룡의 손자 이대용과의 인연 등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이 지점에 머물다 보면 지역과 도시, 사람과 사건에 숨겨진 채 헐떡이다가 사라져가고 있는 수많은 스토리들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근현대 지역사회에서 공동체에 헌신하거나 시대를 앞장섰던 인물스토리가 묻혀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더 나아가 보통사람으로 살았던 인물들이 숱하게 펼쳐놓은 이야기에 가치와 교훈을 본격적으로 입히는 스토리텔링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은 모두들 떠나가고 아무도 없을지라도 늦었다고 판단될 때가 가장 최적기일 수 있다.

시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데에 민관학(民官學)이 함께 정성을 모아 나아갔으면 한다. 현재는 물론이고 근대시기 공동체에서 명멸해 간 인물과 공간, 도시와 문화의 이야기가 집단적으로 발굴되고 조탁됐으면 좋겠다. 시민을 위한 스토리텔링이 지역을 더 지역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담론이 강물처럼 흐르는 신축년 새해가 되길 희망한다.

[본 칼럼은 계간 기록창고 9호(2020년 겨울호)에 게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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