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폭격에 살아남아 곡물장사로 우뚝 일어서다'
'미군폭격에 살아남아 곡물장사로 우뚝 일어서다'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1.05.14 11: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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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 예천 보문 산성리 출신의 안성기(80세)

지게를 벗어버리고 도망 나가고 싶었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는 약 4백여 년의 유서 깊은 순흥 안씨 집성촌이다. 안동과 예천 경계에 우뚝 선 882미터 학가산 서쪽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골이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에는 107세대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1941년에 태어난 안성기(80세·安聖基)씨가 열 살이 되던 해인 1951년 1월19일, 산성마을에 불벼락이 떨어졌다.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미군 전폭기가 세 차례 걸쳐 폭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마을은 불바다로 변했다.

“열 살 때 당한 비행기 폭격이지만 생생하게 기억해. 그냥 다 탔어. 내 친할매도 그때 돌아가셨어. 그날 우리집안에서는 할매를 포함해 작은집 종조모, 오촌 동생과 숙모까지 8명이 죽었지. 육이오 때 우리 마을은 총소리도 못 들었고 피난 가는 게 뭔지도 몰랐어. 아무것도 몰랐었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자기 퍼부어진 폭격으로 51명이 사망하고 90여 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마을이 파괴된 후 어린 안성기도 가족과 함께 이웃동네로 피난을 가 살았다. 이십 리 길을 걸어 다녔던 우계초등학교 공부도 중도에 그만 두게 된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하듯, 어린아이들도 따라서 성장하게 된다.

안성기는 아버지에게 학교를 보내달라고 자주 울었지만 일만 시켰다.

“열두 세 살 쯤, 아버지가 지게를 만들어줬어. 자꾸 산골을 도망 나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엄해서 꼼짝도 못했지. 그래서 난 할배 방에서 잤지.”

예천읍내 상설시장에서 안전상회를 운영했던 안성기(80) 씨.
예천읍내 상설시장에서 안전상회를 운영했던 안성기(80) 씨.

쌀 열되 매고 예천읍내로 나온 청년 안성기

어느 듯 이십대가 되었다. 농사짓던 아버지는 종종 땔감나무 한 짐을 지고 오십리 떨어진 예천읍내 장으로 팔러나가고 청년 안성기는 감천면 장터에 나뭇짐을 지고 나갔다. 그러다가 몇 번 가출을 시도했다. 집밖으로 도망 나가는 걸 경상도에서는 ‘오입 간다’고도 일컫는다. 대구로 도망을 가서 잠깐 엿장수도 해봤지만 아버지에게 잡혀 되돌아왔다.

1963년 스물세 살 때 혼인을 하게 된다. 장가를 보내면 맘 잡고 농사만 지을 거라 본 것이다. 신부는 읍내 살다가 전쟁 통에 감천면으로 피난을 가 살고 있던 동갑네기 ‘전연옥’ 처자이다. 하지만 첫딸이 태어난 후인 1965년 9월 경 홀로 쌀 한 말을 매고 무작정 예천읍내로 나오게 된다.

젊은 시절 예천읍 흑응산에 올라 선 안성기. 산 아래 읍내를 끼고 흐르는 한천과 오른쪽에는 우뚝 솟은 예천성당이 보인다.
젊은 시절 예천읍 흑응산에 올라 선 안성기. 산 아래 읍내를 끼고 흐르는 한천과 오른쪽에는 우뚝 솟은 예천성당이 보인다.

“산성마을에서 그냥 살면 나무, 풀 베고 농사지으며 그럭저럭 먹고는 살아가겠지만 그냥 싫었어. 읍내 나오니 어디 갈 데가 없어. 밥 몇 끼 해달라고 쌀을 맡기고 빈집 헛간에서 잤어. 대구로 오입 갔을 때 삼발이자전거 짐칸에 꽁치 갈치 싣고 장사를 하려고 했었지. 그 기억이 농산물이 풍부했던 예천읍내에서 콩, 깨, 쌀을 사서 파는 소매장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을 거야.”

그 시절 쌀 한가마니는 3천5백원, 보리와 좁쌀은 2천5백원이었다. 농민들이 장날이면 싸들고 온 쌀 한되 두되를 사서 되파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 12월 쯤 산성리 고향집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맏아들이 미웠는지(?) 손녀를 업은 며느리만 내보낸 것이다. 방을 한 칸 얻어 윗목에 장물단지를 바깥엔 소금단지를 놨다. 장사 밑천이 없고 밥을 굶어 함께 울기도 했다. 맹물에 간장을 타서 두 사발 마시면 견딜 수 있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못 배운 게 한으로 맺혀 내 자식에겐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결심했고 열심히 장사를 하는 게 살아남은 길이라 믿었다. 십 원을 벌어도 나쁜 짓 하지 말고 벌어보자고 결심했다.

일 년이 지났을 때 현금 1만3천원을 모았다. 십 원짜리 지폐를 노끈으로 묶으며 부부는 함께 울었다. 셋방 삯월세를 줄 여력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 처남이 감천면소재지 빈 가게를 공짜로 내줬다. 1968년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5개월을 처남 덕분에 힘껏 뛰어다녔다고 한다.

안성기와 전연옥은 1962년 11월24일 약혼했고 이듬해 1963년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게 된다.
안성기와 전연옥은 1962년 11월24일 약혼했고 이듬해 1963년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게 된다.

서울중앙시장에서 곡물장사를 배웠다

“장사하는 계통은 아예 몰랐어. 엿 열 개를 팔면 한 개 이문을 남기는 건 알았지. 하지만 어차피 고기를 잡을 거라면 큰 거랑으로 가자고 결심했어.”

큰 고기를 잡기 위해 큰 강가 가는 심정으로 서울중앙시장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매장사에서 도매장사를 배우기 전환점이 되었다. 참깨 두 가마를 버스에 싣고 서울로 올라가 나이어린 하주가 됐다. 상고머리에 검정고무신 신은 청년 안성기는 큰 곡물상회 밑에서 상회 일도 봐주고 밤이면 쪽잠을 청했다. 쌀 열 가마 정도의 장사 밑천이 쌓였다.

어느 날 연세가 지긋한 상회 사장이 부르더니 ‘예천 농산물 중 뭐가 제일 좋냐’고 물었다. 콩이 좋다고 하자 현금 1백만 원을 주며 사오란다. 처음 만져보는 두 다발 거액이었다.

“청량리역으로 달려가서 영주역 가는 침대칸을 탔어. 입석만 탔었는데 얼마나 좋튼지. 콩 한가마니에 아마 4천3백원 했지. 그땐 깨달은 건 돈은 나 혼자 벌수 없다는 거였어. 큰 장사를 하고 있는 상인들이 나를 좋게 보고 밀어줘야 한다는 거지. 평생 안고 가는 깨달음을 얻은 거야.”

1969년 12월 곡물장사 5년 만에 상설시장에 세 칸 점포를 마련했다. 점포 상호는 부부의 성씨를 따서 ‘안전상회’라 명명했다.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옛 안전상회 터이다.
1969년 12월 곡물장사 5년 만에 상설시장에 세 칸 점포를 마련했다. 점포 상호는 부부의 성씨를 따서 ‘안전상회’라 명명했다.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옛 안전상회 터이다.

트럭 두 대에 가득 실어 보내니 제법 큰 이문이 남기 시작했다. 예천 농산물 중 ‘콩’과 ‘깨’는 서울 곡물시장에서 최고로 쳐주는 농산물이었다. 특히 나물콩이라 불리는 유태를 많이 찾았다. 참깨와 피마자(아주까리)도 인기가 높았다. 그땐 예천에서 서울로 오고가며 장사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콩을 싣고 동대문 옆 서울중앙시장을 오가며 부지런히 도매장사에 매달렸다.

예천이 자랑하는 콩과 깨를 서울로 팔며 모은 돈이 40만원을 넘었다. 1969년 12월에 읍내 동본동 상설시장 안쪽에 세 칸짜리 허름한 점포를 43만원에 매입하게 된다. 벗집 단층에 세 칸에 불과하지만 내 가게를 낼 수 있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곡물상회 명칭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안전상회’로 작명했다. 안성기의 성씨 ‘안’과 부인 전연옥의 성씨 ‘전’을 따서 상호를 지었다. 부부가 함께 고생한 보람을 계속 지켜간다는 의미를 지키고 싶었고 또 ‘안전하게 믿을 수 있다’는 상호 이미지로도 괜찮았다. 비록 초라했지만 점포 문을 열어놓으니 순풍에 돛단 듯이 밀어주는 큰 상인들이 생겼고 거래가 활발해졌다. 자전거를 타고 용궁, 상리, 감천, 안동의 풍산까지 점심을 굶어가며 쫒아 다녔다.

정장차림을 한 젊은시절 부부의 모습
정장차림을 한 젊은시절 부부의 모습

전국에서 예천 ‘콩’과 ‘깨’를 최고로 쳐줬어

“읍내 시장 통으로 쌀 한 말을 들고 나와 무일푼으로 곡물 장사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내 가게를 샀어. 지금 되돌아보면 장사는 돈을 벌기보다는 인심을 먼저 벌어들이는 것이야. 1만원 인심을 얻으면 열배, 천배의 돈으로 돌아온다는 거지. 또 알고서 거짓말해선 안 된다는 것도 배웠지.”

안성기씨는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곡물을 거래하면 하루 이틀 대금을 미루지 않았다. 즉시 당일에 현금으로 결제했다. 그렇게 보유한 돈으로 장사를 하며 점포 상호처럼 정말 안전하게 운영을 했다. 이후 장사를 지속하면서 카드도 사용하지 않았다. 빚을 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100만원이 있으면 95만원어치를 산다는 것이다. 110만원어치를 사게 되면 평생 빚쟁이로 남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조금 고지식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분수를 넘어서는 거래는 언젠가 실패하게 되고 곧 부도로 이어진다고 판단했다.

소매장사를 계속했으면 굶주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열가마를 거래할 뿐 큰돈을 벌지 못했을 것이다. 도매장사는 차 한 대부터 열 대까지 실어 나르니 돈은 벌리게 되었다.

“난 밖으로 장사하느라 돌아다니다 보니 자식 4명을 먹이고 입히고 대학까지 보내는 일은 마누라가 도맡았어. 사실 돈이 언제 얼마나 벌리는지 모르고 다녔어.”

인터뷰 내내 옆자리에 앉은 부인 전연옥씨에게 “술, 담배는 별로 안 했다고 주장하는데 맞습니까?” 물었다. “아이고, 솔직히 얘기해야지. 술을 전혀 안 했다고 하면 어예노.” 남편의 술, 담배를 전혀 안했다는 구술에 면박하는 주장이 치고 들어왔다. “그럼 남자가 밖으로 장사를 하러 다니는데 술을 전혀 안 하면 우에 사회생활이 가능 하노.”

여행지에서 찍은 노년의 모습
여행지에서 찍은 노년의 모습

장사꾼은 돈보다 인심을 먼저 얻어야 성공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장사 초기에 거래를 도와준 사람을 잊을 수 없다.

“장사라는 건 내 손만으로는 돈을 못 벌어. 장사를 가르쳐준 분 중 기억에 남은 분이 한천정미소 김 사장이야. 이름은 잊었지만, 예천에서 이름난 부자였어. 금전거래가 정확한 사람이었어. 그 분이 나를 많이 밀어줬지. 또 영천의 손용익 사장에게 은혜를 입었어. 장사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니까 젊은이가 기특하다며 도와줬어.”

그때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먹고 살아가려면 상대하는 사람이 밀어주고 팔아줘야 한다는 걸 다시금 절감했다. 장사꾼은 남한테 인심을 얻어 그들의 협조로 먹고 살아간다. 20년 장사를 한다면 그중 10년은 먹고 살아내는 것이고, 나머지 10년은 인심을 얻어야 자연적으로 누가 밀어주게 된다는 건 하나의 법칙이다.

올해로 안전상회를 그만 둔 지 14년째이다. 예순 여섯 살 이던 어느 날 장성한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적극 권유한 것이 계기가 됐다. 모두 다 결혼을 했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버지도 장사를 그만 두고 의미 있는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모든 사업체를 정리해 넘겼다.

시장 통에서 벌어먹고 살았으니 봉사하는 생활을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예천상설시장 번영회장을 세 차례, 양곡조합장을 세 차례나 역임했다. 선거를 여섯 번 출마한 셈이다. 사실 새마을운동 시기 임명제로 대표를 맡은 것과 신용조합 17년의 이사 활동까지 포함하면 봉사경력은 더 많아질 수 있다. 청소년 시절에 배움이 부족한 게 한이 맺혀 상인대학과정, 평생교육원 등을 수료했다.

“내가 잘나 대표를 맡은 건 아니야. 선거에 나서면 잘난 척하면 안돼. 나를 찍어줄 땐 희생봉사를 하겠다는 마음을 보여줘야 해.”

예천상설시장 번영회장을 세 차례, 양곡조합장을 세 차례나 역임했다. 번영회장 시절이다.
예천상설시장 번영회장을 세 차례, 양곡조합장을 세 차례나 역임했다. 번영회장 시절이다.

올챙이 적 가난한 시절 잊으면 사람이 아니다

현재는 예천 농산물 중 ‘쪽파’를 대도시에서 최고로 평가해준다고 말하면서도 ‘깨’는 수입깨 때문에 과거처럼 시세가 없다고 걱정했다. 그러면서 사람은 올챙이 적 시절을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지역사회 봉사직 대표를 맡고 있는 동안에도 늘 트럭을 몰고 다녔다. 젊은 시절에 나무 짐을 지고 팔러 다녔는데 트럭 모는 걸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낭비일 뿐이라고 말했다.

10년 전 네 명의 자녀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10년 전 네 명의 자녀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학가산 산성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면 근근이 먹고는 살았을 것이다. 고향에서 살기를 강권하던 아버지는 오래전 환갑을 앞둔 일 년 전에 돌아가셨다. 읍내에 점포를 얻고 번듯한 주택을 지으니까 ‘지독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다가오고 있다. 어머니는 아흔 살까지 살았다.

지금은 그냥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땡볕에 밭에 나가 일하는 분들에 비하면 복에 겨운 생활이라고 독백하듯 들려준다. 산성리 미군비행기 폭격사건 때 살아남아 이날 이때까지 예천사회의 번듯한 생활인으로 견뎌내 준 것이 고마운 세월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네 명의 자녀가 무난하게 커주었고 모두 결혼해 손주 손녀의 재롱까지 안겨준 일들이 사람 사는 기쁨 아니겠냐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2020년 6월 현재 노부부는 읍내 아파트에서 함께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2020년 6월 현재 노부부는 읍내 아파트에서 함께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위 기사는 계간 예천산천 2호(2020년 여름호)에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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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2021-05-14 11:55:50
유선생님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