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삼경 읽으며 일제가 박은 쇠말뚝 찾아 낸 공무원'
'사서삼경 읽으며 일제가 박은 쇠말뚝 찾아 낸 공무원'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1.05.28 15: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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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 前 경상북도 문화예술과장 김규탁(76세)

경북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1995년도에 ‘지명유래와 쇠말뚝 찾기 사업’을 열정적으로 추진한 분이 퇴직 후 다시 고향 예천에 터를 잡고 한학에 몰두하며 지낸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규탁(76세·金奎卓, 前 경북도 문화예술과장)씨가 살고 있는 자택 겸 연구실은 석송령을 지나 폐교된 지 오래된 삼천초등학교 뒷마을 첫 집이었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길가에 나란히 줄을 지어 핀 코스모스가 돋보였고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파란 잔디가 정성스럽게 깔려 있었다. 두툼한 고서가 빼곡하게 꽂힌 장서 아래에서 김규탁씨는 고전번역에 몰두하고 있었다.

2006년부터 감천면 천향1리에 집을 짓고 들어와 지낸 지 15년 세월이다. 원래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은 인근 감천면 대맥2리이다. 1946년 대맥2리에서 태어나 소년, 청년기를 보낸 후 1971년부터 예천군청에서 공직을 시작, 1975년 대구에 위치한 경북도청으로 전입해 33년을 공무원으로 봉사했다. 2003년 퇴직 후 3년 임기의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사무처장으로 봉사를 끝내자마자 마치 연어처럼 모천회귀(母川回歸)한 것이다.

김규탁(76세, 전 경북도청 문화예술과장). 2003년 퇴직 후 2006년부터 고향 감천 천향1리에서 한학 연구에 집중하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김규탁(76세, 전 경북도청 문화예술과장). 2003년 퇴직 후 2006년부터 고향 감천 천향1리에서 한학 연구에 집중하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경북도청 문화재계장, 관광진흥과장, 문화예술과장으로 근무한 경력이 문화연구 분야에 도움이 될 거라고 본거죠. 공무원 업무가 워낙 바빠 좋아했던 한학을 들여다볼 틈이 하나도 없어 정말 공부하려고 고향에 집을 짓게 됐어요. 편찮은 아버지도 모시면서 책 읽고 글을 쓰고 싶었는데....”

7살부터 한문 배우다가 독학으로 공직에 들어서다

김규탁씨는 7살 때부터 외조부 송전(松田) 박한균 선생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외조부는 신라시대 박재상의 후손인 영해 박씨이다. 안동 서후면에 살며 한학을 공부했지만 일제의 간섭과 그들의 교육방식이 싫어 학가산을 지나 내성천을 건넜다.

예천 감천 대맥으로 이주 한 후엔 마을에서 서당을 열었다. 신식학교 가는 걸 반대해 외손주 김규탁과 동갑의 친손주를 칠월 칠석 날 앉혀놓고선 글을 가르쳤다. ‘천자문’과 ‘소학’을 배웠다. 하지만 주위에서 초등학교는 보내야 한다고 강권해 9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했지만 책값이 없어 1학년을 마치고 쉬었다. 일 년이 훌쩍 지난 뒤 4학년으로 재입학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원래는 3학년부터 다녀야 하는데 한 마을에 살던 안진영 교감선생님이 4학년으로 편입시켜 주었어요. 한문 배운걸 아니까 한 학년을 올려 준 것으로 짐작할 뿐이죠. 외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한자공부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는 걸 살면 살수록 새삼 느꼈어요. 어릴 때 ‘한자를 중국글자로만 보지 마라’, ‘오랜 시간 여러 민족과 사람이 만들어낸 글자이고 글자에 담긴 4음절을 발음할 수 있는 민족은 동이족이다’ 라고 해주신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1958년 초등학교 졸업식 때 수여한 1등 표창장.
1958년 초등학교 졸업식 때 수여한 1등 표창장.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은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신 집안 농사를 거들며 지냈다. 17살 되던 즈음 안동 임하 내앞마을 출신의 친척어른이 다니러 왔다가 ‘닌 뭐하노?’ 묻고선 ‘쓸데도 없는 한문만 배우면 뭐 하노, 동생들 학비라도 벌어라’며 추천해 줘 감천우체국에 2년간 임시직으로 취직을 했다.

1970년 6월 군대를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 있을 때 감천중학교 이하구 교장이 ‘학교에 와서 일하라’고 권유했을 땐 ‘아이고 임시직은 안 할랍니다’ 했지만 결국 임시직 일을 맡았다. 학생 시험지에 글씨 써서 등사판으로 인쇄하는 일을 6개월 하던 중 공무원 시험공고가 났다.

9급 공무원 시험과목에는 영어와 수학이 포함돼 있는데, 군 복무할 때 통신보급을 맡아 영문 부품 만지고 영어타자기를 다루어 영어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수학은 경북대 수학과를 나온 동갑내기 친척으로부터 한 달 교습을 받았다. 그때 권기순(72세)을 만나 결혼도 하게 된다.

1971년 권기순을 만나 결혼을 했다. 2남1녀 자녀들은 잘 성장했다.
1971년 권기순을 만나 결혼을 했다. 2남1녀 자녀들은 잘 성장했다.

95년 경북도청 문화재담당 때 ‘쇠말뚝 찾기사업’ 추진

1971년 9월 예천군청 공무원에 당당히 합격했다. 감천면사무소와 군청 농림과, 새마을과, 재무과 근무를 거쳤다. 1974년 4월 경상북도 국가공무원으로 전입이 이루어져 대구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1995년은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당시 경상북도에서는 광복50주년을 맞아 지역특성에 걸맞는 기념사업 아이디어를 찾고 있었다. 이때 경북도 문화예술과 문화재계장으로 재직하던 김규탁씨는 기념사업으로 ‘지명유래 및 쇠말뚝 찾기사업’ 계획을 입안하게 된다. 심우영 당시 경북지사는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

사실 이 사업은 전국에서 경북도가 처음으로 실시하는 것이었다. 사업의 목적이 광복 50주년을 맞는 시간적 주기와 부응하면서도 일제잔재청산운동 취지에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평가받았다. 이에 도에서는 일제 식민정책에 따라 변경된 행정구역 명칭과 자연지명을 고유지명으로 환원시켜내고, 일제시대 풍수지리설에 따라 쇠말뚝을 박거나 도로·수로·터널(굴)을 내고 산허리를 자르는 등 고의로 지맥을 훼손한 지점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2월부터 기초자료조사와 함께 주민제보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쇠말뚝 지점과 지맥훼손지점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큰 이변이 작용했다. 당시 대구매일신문이 쇠말뚝사업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는 바람에 모든 언론이 대대적으로 호응하기 시작됐다.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건 잠시 잠깐이었다.

경북도내에서는 공무원과 군인, 향토사학자들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쇠말뚝 수색작업에 나섰다. 2월 초 김용태 내무부장관이 경북도청을 초도순시했을 때 도지사가 이 사업을 보고했다. 그때부터 경북도의 자체 사업을 내무부가 본격적으로 챙기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이 이의근씨(1995년부터 경북도지사 3선 역임) 이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도 보고를 했다. 2월15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전국단위의 광복 50주년 기념 역점사업으로 채택되었다.

1995년 2월 경상북도 문화예술과 문화재계장 시절, 지명유래 및 쇠말뚝 찾기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동료들과 산에 올랐다.
1995년 2월 경상북도 문화예술과 문화재계장 시절, 지명유래 및 쇠말뚝 찾기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동료들과 산에 올랐다.

25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지명유래 및 쇠말뚝 찾기사업’에 대해 김규탁씨는 겸손하게 술회했다.

“이 사업아이디어는 문화 분야에 계신 당시 선배공무원들의 의견과 자문을 받아 종합한 것이죠. 그 해 5월말까지 사업을 마무리하고 보고서를 편집해 교열까지 다 받아 놓았는데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미루다가 인사이동으로 보직이 변경됐어요. 3년 후 늦게나마 발간을 하려고 원고를 찾으니 시·군으로 다 돌려줬다고 하잖아요. 언젠가는 사비를 들여서라도 꼭 발간하겠다고 마음만 먹었죠.”

2003년 퇴직을 한 후 김규탁씨는 당시 아쉬움을 마무리하기 위해 보고서 발간을 서둘렀다. 스스로 다짐한 약속도 있었지만, ‘왜놈들이 혈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민들 사이의 구전사실을 자료로 정리해 일제침략사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남기고 싶었다. 아내와 2남1녀 자녀들이 십시일반으로 출판비를 보태어 줘서 2005년 8월 『지명유래조사 및 쇠말뚝찾기사업 결과보고서』를 발간했다.

1995년 경북도청 근무 당시 추진한 ‘지명유래조사 및 쇠말뚝 찾기사업 보고서’를 10년 후인 2005년 자비를 들여 발간했다. 보고서 표지엔 1995년 당시 뽑아낸 쇠말뚝 모습이 선명하다.
1995년 경북도청 근무 당시 추진한 ‘지명유래조사 및 쇠말뚝 찾기사업 보고서’를 10년 후인 2005년 자비를 들여 발간했다. 보고서 표지엔 1995년 당시 뽑아낸 쇠말뚝 모습이 선명하다.

민족 열패감 심으려 한 풍수침략행위 기록한 것 큰 보람

1995년 조사 당시 경북의 지명이 개악(改惡)당했다고 제보한 것은 12개 시·군에서 26건(里명칭 23건, 자연지명 3건)이었고, 이후 9건(里명칭 8건, 자연명칭 1건)이 변경이 되었다. 예를 들어 상주시 이안면 구미리 경우 구미리(九味里)는 구미리(龜尾里)로 지명이 바뀌었다.

혈맥훼손 사례는 경북에서 무려 77건이 접수되었다.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이 61건, 지맥을 잘랐다는 것이 16건 이었다. 현장을 답사해 쇠말뚝 4개소를 제거하고, 지맥이나 바위파괴 4개소 등을 파악했다.

이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비판도 제기되었다. 지기(地氣)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사항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쇠말뚝이 정말 많이 박혀 있었느냐고 묻자, ‘숫자는 중요하게 아니다. 분명하게 박혀 있었다’고 딱 잘라 말했다.

“역사적 고증에는 문헌(文證), 구전(口證), 사건고증(事證)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일제가 인재배출을 막기 위해 전국 주요 명당에 쇠말뚝을 박고 혈을 잘랐다는 구증(口證)이 있고요, 실제 쇠말뚝과 혈을 자른 사증(事證)까지 있잖아요. 문헌근거가 없다며 미신적 행위라고만 비난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고 봐요.”

1931년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이 발간한『조선의 풍수』에는 우리나라 묘지업무를 관장했던 각 경찰서장이 전국 명당에 대한 보고를 했고, 이를 근거로 한국인의 뿌리 깊은 풍수신앙을 역이용하여 자학과 패배감을 심어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인 경찰서장이 조선인 풍수를 동원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구전내용을 주요 단서로 볼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우리민족에게 열패감을 심어주기 위한 악랄한 풍수침략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70년대 예천군청 근무 당시 아내 권기순과 예천읍내 남산공원에 올랐다.
1970년대 예천군청 근무 당시 아내 권기순과 예천읍내 남산공원에 올랐다.

재미있는 일화도 들려준다. 평생을 쇠말뚝 뽑기운동을 해온 소윤하씨가 참여정부 출범직후 찾아와 보고서 몇 권 챙기더니 북한에 가서 쇠말뚝 뽑는 활동계획을 말했다. 함께 가자는 제안이었는데 무산이 되었다. 33년에 걸친 김규탁씨의 공직생활 중 쇠말뚝 찾기 사업은 사회적 반향도 컸고 나름 큰 보람으로 남아 있다.

1976년도 예천군 인구가 거의 16만 명에 육박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때 이농현상이 한창 시작되고 있었고 도농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공무에 바빴지만 이러다가 우리농촌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걱정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고향의 정겨운 지명과 골짜기·바위·하천 이름을 다 모아 놓자는 생각을 가졌다. 유래는 다 몰라도 일단 수집을 해놓으면 훗날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였다. 그런 평소 생각들이 지명유래 찾기, 쇠말뚝 찾기사업으로 자연스레 연결됐을 것이다.

경북도청 근무 시기 가족사진. 2남1녀를 두었다.
경북도청 근무 시절 가족사진. 2남1녀를 두었다.

유림활동 후회 없고, 지금도 책 읽으면 행복하다

도청이 있던 대구에서 생활하는 동안 한학과 유림 활동 단체로 연결이 되었다. 청년유도회대구지회, 박약회(博約會)대구지회, 담수회 등 활동이 유림사회에 참여하는 깊이를 증폭시켰다. 대구는 경남 서북부와 경북권의 유림후손들이 일찍부터 공부를 하러 오다보니 유학적 분위기가 많이 남아있었고 교류도 활발했다. 자연스럽게 대구 쪽 유림사회에 인맥이 두터워졌다.

그런 저런 생각이 깊어지던 1997년에 경북북부권 종합개발사업기획단 소속으로 임용되었다. 당시 북부권은 개발지표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낙후지역으로 손꼽혔다. 지방자치시대의 시작과 함께 사회적 에너지를 빌려 개발계획을 세우려고 11개 시군을 다 돌아다녔다. 어느 계절인가 산꼭대기를 올라서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퇴직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33년 동안 공직을 마무리 하던 2003년 6월 받은 훈장증.
33년 동안 공직을 마무리 하던 2003년 6월 받은 훈장증.

산골짜기에 집 짓고 들어앉으면 한적한 곳에 지인들이 매일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여유는 커질 것이라 믿었다. 퇴직이후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예천 고향으로 이전을 감행하게 된다.

“당시 저는 인생을 3등분해야 한다고 봤어요. 30년을 기준으로 공부와 취직, 돈 벌고 자식 키우는 일, 그리고 퇴직이후를 대비하자는 거죠. 산에서 바라보면 경치가 좋다는 감상을 갖지만 막상 퇴직이후 살아야 할 터를 찾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죠. 그때 고향 지인이 집 지을 터를 찾아 주겠다면서 그 대신 감천면을 벗어나면 절대 안 된다고 했죠. 그런 인연으로 이곳에 살게 됐어요.”

현재 살고 있는 감천면 천향1리 집터는 2000년 경 매입했다. 맏이로서 편찮은 부모님을 모시겠다는 생각해 서둘러 착공을 하지만 곧 아버지가 별세했다. 예천군에서 함께 근무했던 건축직 친구가 천천히 짓자고 제안해 준공까지 여덟 달이 넘게 걸렸지만 집은 튼튼하게 지어졌다며 웃었다.

병환 중인 아버지를 모시며 한학공부에 몰두하려고 지은 감천면 천향1리 자택 앞에 서 있는 김규탁씨.
병환 중인 아버지를 모시며 한학공부에 몰두하려고 지은 감천면 천향1리 자택 앞에 서 있는 김규탁씨.

2006년부터 이 집에서 한학에 더 몰두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난치병에 걸려 투병생활이 병행되었다. 완치는 힘들지만 증상을 서서히 늦추는 치료를 하고 있다. 의사가 몸 중에 어느 부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책 읽고 번역을 하려면 머리와 눈이 중요하다. 뇌를 다치지 않게 보존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책을 읽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해진다. 2천여 권이 넘는 고서적 목록도 작성해야 하는데 마음만 앞서고 있다. 공직생활 시절 미뤄둔 책 더미를 하나씩 꺼내어 읽으며 번역하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스스로 입지를 세워 공직에 진출해 국가에 대한 봉사를 끝냈고, 유림사회에서 고금의 지식을 배우며 문화 창달에 노력했지만 한학을 더 깊이 읽으며 공부에 전념하지 못한 세월에 조금의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형 책장에는 2천여 권이 넘는 한학 관련 고서적 자료가 꽂혀 있다.
대형 책장에는 2천여 권이 넘는 한학 관련 고서적 자료가 꽂혀 있다.

[위 기사는 계간 예천산천 3호(2020년 가을호)에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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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숙 2021-05-28 21:29:05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