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⑨-故 배선두 애국지사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⑨-故 배선두 애국지사
  • 강병규(안동MBC PD)
  • 승인 2021.06.0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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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타협 없이 오직 나라만 생각했던 독립운동가 故 배선두 애국지사

가을로 접어든 9월 중순, 주말 오후에 걸려온 전화 한 통. 경북 유일의 마지막 생존 애국지사 배선두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어르신을 만나 뵀었던 것이 불과 1년 전이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왜놈들을 꾸짖으며 틀림없이 일본을 앞서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두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충칭 임시정부 시절을 또렷이 기억해 내시며 김구 선생의 암살 소식에 직접 곁을 지키지 못했노라 분해하던 모습에 오로지 ‘나라의독립’만 생각하시던 분이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생전 출연하셨던 뉴스와 프로그램, 촬영되었던 모습을 모아 빈소를 찾는 분들에게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주말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이 난다. 이제 더이상 경상북도에는 생존 독립운동가가 안 계신다는 안타까움에 남아있던 배선두 지사님의 영상을 모두 끌어 모아 급하게 추모 영상을 만들었고, 바로 다음날부터 일주일간은 추모특집으로 제작해 두었던 <영남의 어른–경북 유일의 마지막 생존 애국지사 배선두> 편을 긴급 편성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한 몸 아끼지 않았던 의로운 선생에 대한 마지막 예우라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살아 계신 선생의 모습을 뵈올 수 없지만, 마지막으로 담아낸 그 분의 포효를 지면으로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인터뷰는 지난 2019년 9월 10일 의성 비안에 있는 선생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지사님 고향이 원래 이곳 의성 비안이십니까?

그래요. 여기가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게 한 500년 되지요. 경주배가 경신공이 여기 입향조이십니다. 나도 1922년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라 뺏기고 그때는 뭐 우리 같은 이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았지요. 왜놈들 세상인데 우리를 사람 취급이나 했겠어요?

 

그런 것을 직접 겪으셨군요

내가 스무 살 때 왜놈들 군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끌려가기 전입니다. 내가 열여덟, 열아홉 정도 되었을 거예요. 훈련을 받는데 사람을 훈련시키는 게 아니고 무슨개나 짐승 훈련시키는 것 같았어요. 우리 비안면에 62명인가가 그렇게 훈련을 받았는데 면서기 밖에 안 되는 사람이 마구 두들겨 패도 누가 “왜 때리냐”라는 소리 한번도 못했으니까요. 나는 일제강점기 때 비안지서로 한달에 두세 번씩 끌려갔어요. 면서기가 와서는 집에 가서 새끼줄 안 꼰다고 뭐라 하고 가마니 안 짠다고 두들겨 패지. 그래서 그 짓 하는 것을 보고는 그냥 놔두지는못하고, 속상해서 발로 차면 나는 그냥 때려버렸거든요. 그러면 이튿날 순사가 와서 잡아갔어요. 대나무 꼬챙이로 실컷 두들겨 맞았죠.

또 있었어요. 안순사라는 조선 놈인데 못됐기를 말도 못해요 비쩍 마른 그 사람. 신작로에 패여진 곳 보수를 하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제일 날쌨거든요. 신작로 보수라는데 냇물에 가서 자갈을 씻어서 가져다 부으라는겁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그냥 도랑을 쳐내려가는데 그 안순사란 놈이 오더니만 마구 때리는데 사정이 없어요. 나이도 자기보다 많은 사람을 때리는 거라. 그래서 내가 가서 말렸단 말입니다. 그러더니만 그 다음은 내 차례였어요. 말리니까 나를 두들겨 패는데 나는 그냥 참지 못하고 그 놈 목을 쥐어서 내동댕이 쳐버리고는 두어 번 던져 버렸더니만 고함도 못 지르더라고. 그래서 그 놈 옆구리를 발로 두어 번 차고 집에 와버렸지요. 나중에 집안 형님뻘 되는 우리 동네 동장한테 들었는데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다고, 의성에는 치료할 병원이 없어서 대구로 갔다고 하더라구요. 그 난리를 피해다니느라고 7월 한 달은 집에 없었어요.

 

그래서 계속 피해다니신 겁니까?

피해 다니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래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동네 청년들 몇몇을 규합해서 의성지서를 쳐들어가던지 해야겠다는 생각에 몇몇 동네를 다니면서 한 100여 명을 만났지요. 그런데 겁이 많았던지 내 요청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겨우 여섯 명뿐이라. 그래서 그것도 실패하고 서너 달 산으로만 피해 다녔지요. 나중에 봤더니 붙잡으러 오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만 그렇게 피해 다니고 그랬나 봐요. 산에 가 있으려니 모기는 많지 애 많이 먹었지요. 그러다 영장이 나와서 트럭에 모두 태워서 가는데 나는 또 붙잡혀 갈까봐 의성까지는 걸어갔어요. 의성역에서 기차 떠나려고 할 때 올라타서는 ‘나 이제 왔다’고 신고하고는 군에 갔지요.

 

그렇게 군대에 가서는 결국 탈출을 하셨다구요?

내가 탈출한 동기는 역시나 왜놈 군대에서 견디질 못했어요. 왜놈들하고 같이 군대를 가니 왜놈들 한 100명 중에 조선 애들 한 너댓에서 열셋 끼는 데도 있어요.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기운이 좀 세다 보니 왜놈들을때리고 했거든. 그래서 결국 난 도망치려고 했죠. 그런데 한 놈이 내가 도망친다는 것을 소대장한테 가서 전부 다 일러바쳤어요. 그래서 나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그놈을 죽을 때까지 때렸지요. 결국은 지가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는 하는데 어쩌겠어 그냥 그 정도만 했지요. 소대장은 내가 미워서 하는 것마다 못마땅했었지.

하루는 비가 와서 도로가 묵 퍼 놓은 것처럼 이만큼씩 푹푹 빠지고 그래. 그 옆에 구덩이가 있는지 거기 말이 빠져버려서 마차도 거기 들어갔네. 그거 꺼내고 뭐 하고 하다 보니 시간은 많이 걸리고 그랬지요. 결국 다 하고 나왔더니만 우리 소대 애 하나가 그러는데 건빵이 들어 있는 자루가 없어졌다고 그래요 어느 놈이 도둑질해가 버렸어. 그랬다고 소대장이 가죽 허리끈을 풀어서는 마구 때리는 거라. 나를 홀딱 벗겨 놓고는 때리는데 그냥 맞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이 손으로 그 허리끈을 탁 거머쥐면서 때리려면 더 때려보라고 했더니만 그 소대장이 그러더라구요. “조선 놈은 할 수 없다”면서 계속 때리려고 하고 나는 막아서고 했더니만 결국 발각되어서는 중대장까지 오게 됐어요. 그 놈이 내 모가지를 끊어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또 소금을 팔아서는 조선 사람들 도와주고 했더니만 그 사람들이 아까운 놈 죽인다고 덤벼들 태세였어요. 조선말로 “아까운 놈 죽는다”하면서 반항을 하니 결국 중대장은 나중에 나를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할테니 전부 해산하라 명령을 하더라고. 그러더니만 나를 달래는데, 나도 죽을 고비는 넘겼으니 그 길로 어떻게든 도망을 쳐야겠다 생각했지요. 여기 있어도 죽을 거고 도망치다 죽어도 그만이다 싶어서계속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지요.

 

결국은 일본군에서 탈출을 하셨군요?

그때 나는 무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다고 하는 글을 적어서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 나하고 같이 열둘인가 도망쳤는데 일곱이 따로 오고, 내가 나중에 산에 올라간 사이에 갔는데 몇몇은 가서 죽은걸 봤거든 그러더니만 가면 죽는다면서 날 더러 도로 못 가게하고 울었다니까요. 그래서 나는 여기 있어도 죽을거고 왜놈들한테 어차피 총에 맞아 죽을 것이니 난 가야된다, 그래서 그 사람을 뒤에 두고 그렇게 가니까 일곱명은 없고 넷만 있는 겁니다. 일곱은 시간이 넘어도 내가 안 오니까 가버렸고, 나머지 넷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뭐.

그 후에 밤새도록 비를 맞으면서 산에서 자고는 동네로 내려갔는데 이미 동네는 비었고 동네 사람들은 전부 다 다른 산으로 가 있는 겁니다. 이틀 동안 비를 맞았으니 춥기도 하고 해서 옷도 말리고 죽도 끓여 먹고 하느라 그 동네 안 빈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방문이 확 열리더라구요. 어떤 여성이 다가오더니만 한자를 써가면서 대화를 하는데, 그 여자 오빠가 둘인데 모두 군인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던 중에 그 여자가 고함을 지르니 40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몇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나한테 자꾸 물어보더라구요. 여기 밑에 큰동네가 있는데 거기 가서 젊은 사람들하고 지내면서 두 서너 달 있다가 말 좀 배우고 하거들랑 중국으로 가면 안 되냐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러지 말고 우리를 중국 군대에 입대시켜 달라고 했어요. 중국 군대 가면 전쟁해가면서 가다 죽으면 그만이고 그럼 우리 중경까지 살아가면 다행이다 싶었지요. 결국은 나를 포함해서 같이 다 중국 군대로 배치되었지요.

 

중국 군대에서 5개월 있다가 광복군은 어떻게 만나게 되신겁니까?

우리는 중국 군대 3사단인지 4사단인지 배치되어 있다가 거기서도 탈출을 했어요. 결국 함필동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모이다 보니 한 스무 명이 모였어요.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 연락이 닿았는지 토교에서 한 달 넘게 있으면서 다시 사람을 모았지요. 한국 사람들이 사는 신한촌

이라고 무슨 공장이 있었던 곳이라는데 거기에 결국 한 40명 쯤 모였어요. 좀 기다리다 보니 나보다 두 살 정도 많은 강재성이라는 함경도 사람이 나를 부르는데 따라 내려갔더니만 엄청나게 멀리까지 가더라구요. 배를 타라고 하더군요 그 배를 타고 건너가야 중경이거든. 사실

그때만 해도 임시정부로 간다고 얘기는 안 해줬거든요. 도착해서 어떤 집으로 들어가는데 위에 보니까 국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라고 써 놓고는 그 밑에 한문으로, 그 아래는 미국 글씨로 쓰여 있더라구요. 그 당시만 해도 그 정도 건물이면 기와에 대궐이었지요. 그래서 임시정부라는 걸 알았지요. 중경 임시정부에 드디어 도착을 하셨군요.

 

그 이후에는 어떤일이 있었습니까?

그냥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처음에는 아무도 안 오더라구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때 벌써 광복군들은 한반도 본토에 들어가려고 훈련을 받으러 서안으로 갔었더라구요. 본격적으로 한국 땅을 회복하기 위해 침투 훈련을 받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임시정부라고는 하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고 중국 경찰이 문 앞에 보이더라구요. 나중에 마흔 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전화기를 들고는 “여기 한국 포로 두 명이 임시정부에 와 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벌떡 일어나서 “여기 한국 포로가 어디 있습니까”라면서 의자를 들고 겁을 줬어요. 그랬더니만 전화기를 놓고는 달아나 버리더라고, 그러고 난 후에 그 사람은 못 만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청천 장군 사위였어요.

끼니도 대부분 국수로 때웠는데 아침에는 어디서 왔는지 커다란 밥통이 있더라구요. 거기서 다들 밥을 떠다 먹는데 보니까 노인 한 분은 코가 땅에 닿으려고 하더라구요. 그 분이 바로 이시형 선생이었어요. 그리고 신익희, 조봉암 이런 어른들이 같이 밥을 먹었죠. 배가 너무 고프니 나도 밥을 좀 먹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작은 밥그릇 하나 떠봐야 얼마 안 되니 국 한 그릇 훌훌 마셔버리고 밥 한 그릇 먹고를 반복했더니만 여섯 그릇을 먹어버렸어요. 그 여섯 공기 해봐야 수북이 담으면 두 그릇도 안 되는 걸 말입니다 허허. 그랬더니만 모두들 밥은 안 먹고 나만 쳐다보는 겁니다. 나중에 소문이 나기를 임시정부에 밥팅이가 하나 왔는데 단숨에 아홉 그릇이나 먹어버리더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김구 선생이 나를 불렀어요.

 

김구 선생님이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김구 선생께서 부르시더니만 제일 첫마디가 공산주의는 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임정 청사 2층에 정무실이라고 있었는데 열한 명이 다 못 앉을 정도로 좁았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사실 내 목소리가 제일 컸거든, 한마디로 시끄러웠지요. 나한테 물어보시기를 나중에 뭐하고 싶냐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대뜸 광복군 대장을 할 거라고 했죠. 그랬더니 대대장 됐다 하시더라구요. 그러다보니 내가 김구 선생 경호대장을 했어요. 매일 김구 선생을 만났지요. 그렇지만 임시정부 형편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어요. 명색이 임시정부라고 하는데 자동차 한 대가 있나, 뭐 그래서 김구 선생이 중국 장개석이나 모택동 같은 사람들하고 회의를 하러 가는데도 자기네 차를 보내와서 그걸 타고 갔어요. 안 그러면 인력거를 타고 갔지요. 인력거꾼이 뛰면 나도 옆에서 같이 뛰어가고는 했지요.

옆에서 직접 보셨던 김구 선생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참으로 크신 분이었지요. 나도 중경에 있을 때 같이 계셨던 이범석 장군이나 지청천 장군이나 신익희 같은 분들도 봤지만 김구 선생은 실로 어마어마한 분이셨어요. 의열단 하셨던 약산 김원봉 선생, 공산주의를 하셨던 분이지요. 그분도 끌어넣어서 광복군 만들어 놓고도 우리를 불러서는 첫째가 공산주의는 하지 말 것, 남들을 업신여기지 말 것, 불의를 보고 겁내지 말 것 등등의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물론 그때야 그 이야기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김구 선생은 참 큰 분이구나 싶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있을 때 김구 선생이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겼어도 오히려 중국 사람들이 살려줬다니까. 당시에도 김구 선생은 일본 놈들이 현상금을 크게 걸어놨었어요. 그렇게 현상금까지 걸어놨는데도 중국 사람들이 다 감춰주고 했지 붙잡으려고 한 사람 없었으니까. 지청천 장군도 왜놈들한테 붙잡혀 묶여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 때 중국 사람이 달려와서는 여기 도둑놈 왔다 하면서 고함을 막 내지르니 동네 사람들 다 모여서 달려들 기세이니 왜놈들이 눈치 보면서 정신없는 순간에 칼로 줄을 끊어 버리고 도망을 쳤었어요. 중국 사람들이 그 정도였어요. 독립운동 하는 한국 사람들을 많이 도와줬다니까요. 중국 사람들도 인정하는 아주 크신 분이었지요 김구 선생은.

나중에 암살 당하시고 내가 그 소식 듣고는 곧바로 서울로 갔었지요 그런데 가서 보니 내가 모시고 있던 분인데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곁에도 못가요. 참 말도 못했지요. 주위에 있던 놈들 태반이 전부 친일파였고 그놈들이 일을 다 맡아서 우리는 곁에도 못 가봤어요. 너무너무 슬퍼서 눈물도 안 나더라니까요.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정말.

 

한국에 돌아온 것도 김구 선생과 함께였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늦게 돌아왔어요. 김구 선생은 그해 11월에 임시정부요인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그것도 참 억울한 일이지요. 김구 선생이 떠난 이후에도 중경 시내에는 한국 사람이 많이 남아 있었어요. 박남파로 불리었던 박찬익 선생이 대사 격으로 남아 계셨고 우리는 거기 직원으로 남아 있었지요. 그 후에 모택동군대가 막 밀고 올라오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우리도 한국으로 철수해 오게 됐죠. 그때까지도 왜놈이 운영하던 배를 타고 와야 했었는데 경남 통영 사람이었던 사람이 총사령관을 맡아서 물자를 많이 실어주었어요, 다행히도. 왜냐하면 그 배를 타고는 스물 하루만인가 스무 사흘만인가 걸려서 도착을 했거든요. 광복군이 120명 쯤 탔고, 왜놈 군대에 있던 사람이 한 천 여명, 중국 주민들까지 해서 그 배에 탄 사람이 2,500명 정도나 됐어요. 결국은 물에 설치된 수중포를 피해서 선장이 하자는 대로 오다보니 결국 그렇게 오래 걸리게 되었죠. 부산에서 내리게 되었는데 호열자라는 괴질이 돌아서 결국은 부산에서도 내리지 못했어요. 한 보름이 더 걸려서 인천으로 갔지요. 거기서도 호열자 때문에 검사를 완료해야 내릴 수 있다고 해서 미군들이 막아서더라구요. 우리를 인솔해 오셨던 이범석 장군이 먼저 내려서 미군들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괴질 때문에 못 내린다고 계속 주장을 하니 이 장군은 협상을 했던 미군에게 ‘당신도 나하고 담판을 했으니 호열자에 걸렸을 것이다. 나와 함께 배로 들어가자’라고 기지를 발휘해 결국 이튿날 배에서 내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눈에 불이 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여성들을 옆에 끼고 배에 돌아다니고 하는 것을 보게 됐지요. 광복군 대접은커녕 개인자격으로 돌아온 것도 서러운데 미군들이 그러고 노는 꼴을 보니 사람들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게 되었지요. 그날 저녁에 미군 셋이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광복군 중 일부가 권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나도 두 자루 가지고 있었구요. 그 사건으로 권총은 다 몰수되었지요.

 

한국으로 들어오셔서는 뭘 하셨어요?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더니만 부모님은 아들 죽은 줄 알았다고 그래요 그게 당연했겠지 뭐. 그냥 살아서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하셨죠. 다른 것은 없었고 다시는 내곁을 떠나는 것은 안 된다고 그러시더군요. 그리고 기가 막힌 게 그 악연이었던 조선사람 안순사를 다시 만났어요. 그놈 갈빗대를 부러뜨린 지 2년이 채 안됐었거든요. 이승만이 정권을 잡고 난 다음 안순사가 의성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임명이 되었더라구요. 그때부터는 빨갱이 잡아넣는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 참 많이 잡아넣었을 거라요. 내가 그놈 갈빗대를 세 개나 부러뜨렸으니 잊어버릴 리가 없죠. 그런데 나는 고향에 와서는 대한청년단에 들어갔죠. 그때 이범석 장군이 대한청년단장이었고 지청천 장군은 국민회 회장이었어요. 그때 당시에 대한청년단이나 국민회하면 경찰서장이 별로 두렵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나는 이미 국민회도 조직하고 대한청년단 의성지회도 조직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그 안순사도 내 뒤를 밟아봤겠지요. 그런데 해코지할 정도는 아니었거든, 그래서 내가 살았지 안 그랬으면 나는 빨갱이로 몰려서 벌써 죽었을겁니다. 이승만이 그랬어요. 그런 놈을 다시 경찰서 과장을 시켰으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지요.

 

그런 이승만 정권에 대해 어떤 생각이십니까?

나는 생각하기를 제일 첫 번째 우리 대한민국의 역적은 나라 팔아먹은 놈들이고, 두 번째가 나는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있을 때 안동에 석주 이상룡 선생이나 백하 선생 같은 분들은 그 많은 재산 다 팔아서 만주로 가 학교 짓고 농장도 만들고 군사훈련도

시키고 그 많은 일들을 해 내셨지요. 임시정부가 무슨 돈이 있었나? 어느 나라에 있든 한국 사람들은 모두 다 모금운동을 했어요 그때 당시에. 그렇게 모은 돈을 모두 이승만한테 가져다 줬는데, 이승만이 그놈은 자기 친인척, 자기 친한 사람, 저들만 배불리 먹고 따듯하게 입고 임시정부 요원이라 하는 사람들은 배고파서 굶어죽고 추워서 얼어 죽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게 들통이 나서 이승만이 쫓겨나고 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만 그 사람은 미국으로 도망가서 해방될 때까지 편안하게 살았다고 봐요. 결국 연합군이 승전을 하고는 미국 군대 업고 한국에 돌아오니 자기하고 손잡고 일할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친일파 아니고는 자기하고 일 할 사람이 없다 하는 거야. 그렇게 친일파하고 한 덩어리가 되어가지고 정권도 잡고, 경찰의 경위 이상이 전부 일제강점기에 해먹던 놈들이었어요. 군수고 도지사고 뭐고 전부 그랬던 사람들이니 적반하장이라고 중국에서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이 와도 꼼짝을 못 했지요 전부 다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청산해야 한다고 반민특위 만들고 했는데, 그것도 해체해 버리고 말 안 듣는 사람들 모두 처형시켜 버리고 빨갱이 굴레 뒤집어 씌워서 감옥에 처넣고 했으니 내가 볼때는 이승만이 최고의 역적입니다. 친일파 중에 벌 받은 것은 한 사람도 없고 지금도 요직에는 그 후손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게 나라가 제대로 설 수가 있습니까? 그런 이승만을 국립묘지에 왜 모시냐 소리도 못합니다. 그거 했다가는 또 빨갱이로 몰리는데 말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아직도 이렇다니까.

 

자유당 정권 때였으니 부정선거도 직접 보셨겠네요?

자유당 말씀 마시오. 자유당 때문에 내 몇 번 죽을 뻔 했는데요. 그놈들 깨부수려고 대드니까 그냥 놔둘 리가 있나. 내가 기운이 없었으면 맞아 죽었을 텐데. 저놈들은 이미 날 때려죽이려고 겨누고 있는데 나한테는 미리 연락해 주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하기야 둘 정도는 내가 두들겨 패 놓고 피해서 다닐 수는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자유당 놈들 말도 못했어요. 부정선거 그거 말이죠 내가 장에 갔다 오니까 동네 반장들이 부정 선거를 하라고 지시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들어가서 부정선거 못하도록 책상을 들어다 엎어버렸지요. 그랬더니만 자유당 총재하는 사람은 머리에 피가 흐르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거기에 먼 친척이 있었는데 그래도 위험하니 “아저씨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빨리 도망치세요” 하는 겁니다. 그때는 죽으면 죽고 그렇지 도망칠 생각은 없는데 막 밀면서 도망치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빨갱이로 몰려서 죽으면 할 수 없다 싶어서 도망쳐서 이쪽 산모퉁이로 피해서 달아나고 그랬지요. 그것 피해 다닌다고 내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안 죽고 살았다니까 그렇게 살았더니만 이제껏 이렇게 오래 사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한 번 잡혔으면 빨갱이로 몰려서 죽었을 것이고, 또 한 번은 순사가 투표장에서 민주당 표 찍었다는 영감을 발로 차고 막 때리는 겁니다. 그래서 분통이 터져서 나도 바로 가서 그 순사 놈 뒤통수를 때리고 발로 차고 총 뺏어서 담장 너머로 던져버리고 난 다음 도망쳐서 또 피해다녔는데 그때 붙들렸으면 또 죽었다니까. 세 번째는 군위 장에 가서는 민주당 유세장에서 청년들이 민주당 지지자들을 마구 때리는 것을 보고는 또 참지 못하고 모가지를 잡고는 내다던져 버리고 발로 옆구리를 서너 번 차서 넘어뜨리고는 도망쳤죠. 그때도 붙잡혔으면 죽는 거라. 김대중 대통령 참 험하게 살았다 했지만 배선두도 참 험하게 살았어요. 뭐 잘못된 거 보면 참지를 못해요. 참을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그래도 안 죽고 여태껏 살았다니까. 그렇게 살아온 데는 순전히 김구 선생님 힘이지요. 불의를 보고 겁내지 마라 남을 업신여기지 마라 그 말씀은 잊어버리지를 못합니다.

 

1990년도에 훈장 애족장을 받으셨더라고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무슨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곡절이 있지요. 나하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전부 다 받았었고, 시골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것들 열한 명인가가 못 받은 겁니다. 너무 억울해서 서울을 2년 정도 다녔어요. 그냥 같이 모셨던 분들 도장이라도 받으면 될까 싶어서 상경을 했습니다. 조카뻘 되는 사람이 창동경찰서 서장이어서 그 사람 도움을 받아 조성환, 조병옥 선생 등 중국서 모셨던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도장을 받아서는 보훈청으로 가니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더군요. 사람 보증은 안 되고 물적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구요. 피난 갔을 때 집이 불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광복군하고 임시정부에 있을 적 물품들이 다 있었어요. 김구 선생이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어요. 그런데 불에 다 타버렸으니 뭐 어쩔 수 없다고 처음에는 포기를 했죠. 또 몇 년이 지나서는 대구에 있던 경호대 했던 사람이 연락 와서는 내 사진이 독립기념관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이리저리 찾은 몇 가지 물품하고 그 사진으로 증명이 되어서 표창을 받게 된 겁니다. 그 후에 다시 애국지사가 확실하니 훈장까지 주더라구요. 한없이 고마운 일이었죠. 그제서야 인정을 받게 된 겁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감회와 젊은이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있어요. 지금 왜적하고 우리는 총소리는 안 나도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어요. 독도를 보면 아직도 저 놈들은 영토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지 또 지금은 경제전쟁에 더 치열하게 싸움을 걸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복합적으로 치열하게 전쟁이 있는데 우리 대한민국 지금 인구가 5천만이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왜놈 편드는 사람들이 천 만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3천 만은 옛날처럼 목숨 내놓고 독립 운동할 사람들이라고 봐요. 어찌되었든 우리 민족의 머리가 왜놈들한테 지는 게 하나도 없어요. 10년 전만 해도 왜놈들한테 지는 게 많았지만 지금은 뭐든지 우리가 월등한데 왜놈들을 밟고 넘어가야 되는 것이지 그저 흐지부지 넘어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이제는 5천 만이 단합해서 꼭 왜놈을 이겨야 됩니다. 그럼 지금 10년 20년 후에 가면 왜놈들이 손들고 우리한테 항복할 때가 있다니까요.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어떻게 해서든 최선을 다해서 국력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 5천만이 마음껏 한데 뭉쳐서 국력을 키우면 외세가 넘보지도 못할 것이고 그럴 겁니다. 지금도 왜놈들은 아직 우리를 얕보고 있거든 껍데기는 얕보고 있는데 속은 지금 타는 거야. 속으로 잘 생각해보면 자꾸 저희가 지거든, 그러니 우리 대한민국 백성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왜놈을 밟고 넘어가야 된다. 그게 마지막 부탁입니다 이 노인네.

 

인터뷰 내내 선생께서는 ‘왜놈’들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을 보이셨다. 이 글에서도 선생의 그런 생각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거칠지만 ‘왜놈’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써놓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단 한 번도 불의에는 타협 없이 살아오신 분이었다. 평생을 잊지않고, 가까이서 모셨던 김구 선생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오신 배선두 지사. 인터뷰 내내 참으로 단단하고 큰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북 유일의 생존 독립운동가셨던 애국지사 배선두 선생. 선생이 마지막까지 젊은이들에게 한 부탁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9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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