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생애사 “우야든동 산다”-김영상의 "반짝반짝 내 인생"
구술생애사 “우야든동 산다”-김영상의 "반짝반짝 내 인생"
  • 백소애(기록창고 편집인)
  • 승인 2021.06.02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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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당을 아십니까? 금은방이 흔치 않던 시절, 안동 시내 중앙통에 자리해 원도심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이가 있다. 연고도 없는 지역에 뿌리를 내려 안동사람이 된 창신당 대표 김영상(90). 1931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강원도 강릉에서 보내다 1955년 안동에 ‘창신당’을 개업하고 정착한 그. 모래기에서 금싸라기를 찾아내는 맵짠눈을 하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7남매 장남으로 살아온 김영상 사장의 90년 인생사를 들어본다.

창신당 김영상 대표

금광에서 잔뼈가 굵은 소년

내 고향은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이에요. 거기 운산금광이 유명하죠. 우리 어릴 때 제일 큰 금광이라고 소문이 났으니, 금강 도양에서 젤 큰 광산이라고 했죠. 구한말에 외국인한테 우리나라 왕이 채굴권 허가를 내줬어요. 거기 우리 아버지가 광산 기사로 근무를 했거든요. 그러다 2차 대전이 나고 미국사람이나 서양사람이나 다 떠나버린 거예요. 광산 규모가 상당했거든요. 케이블카 타고 지하로 들어가고 위험했는데 후에 아버지한테 자꾸 무리한 일을 시키는 거라, 고만 광산 기사직을 그만뒀어요.

그렇게 1940년 왜정 때, 강원도 강릉으로 갔어요. 그 당시엔 강릉군인데 연곡면 삼산리 송천광산이라는 금광엘 친구분이 오라고 해서 갔어요. 아버지 친구분이 개인 광주鑛主로 채굴권을 맡았지요. 근데 그런 걸 전혀 안 해본 사람이라 우리 아버지가 합류한들 뭐 일이 되나요. 그러다 일본사람들이 와서 경영을 하게 됐나 하여간 좀 복잡했어요, 해방이 되니 광에 주인이 없어진 거라. 큰 광산은 아니라서 인구는 한 천여 명 살았던 걸로 기억해요. 내 나이 15살 무렵이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민첩하고 머리가 좀 비상한 면이 있었지요. 가만 보니깐 그 동네서 그동안 채굴을 한 금광 광석을 광장에 다 쌓아 무져놓더라고요. 근데 여기다가 조금씩조금씩 자꾸 무지니깐 금가루가 떨어질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하루는 그걸 파봤어요. 파갖고 왜 옛날에 큰 국그릇 있잖아요, 대접. 대접에다가 망치로 이제 톡톡~ 깨가지고 갈아요. 갈아가지고 요렇게 착착 만지면 시금석이 돼버려요. 그래놓이 뭐가 올라오거든? 내가 그걸 해보니깐 금가루가 있더라고!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내 생각에 ‘야 그래, 이거는 금을 채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공짜로 끌어모아, 쓰레기 끌어모아 가지고 하는 거랑 똑같다’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호메이로 가서 끌어모았죠. 그걸 금광석 찧는 그 막방앗간이 있었어요. 물레방아가 돌아가면 올라갔다 퉁 내려오면서 찧는데 거기다가 수은을 넣어요. 온도계 만들 때 쓰는 수은 알죠? 수은이 뜨거우면 올라가고 차가우면 내려오고, 그 수은이 금을 잡아먹는 거라 해서 수은을 넣고 방아를 찧으니 돌가루는 나가고 금이 밑에 가라앉고 수은이 들어가서 그걸 흡수해 버리거든요. 그걸 함지 같은데 일면 돌가루는 들고 하얀 수은 금이 나와요. 송천광산에 금 색깔은 30% 정도 밖에 안돼요. 은끼가 많고 딴 광물이 많다는 건데 금속 광물은 플러스가 상당히 낮은 광산이라 보면 돼요. 송천광산이 요새는 다 없어져 흔적도 없어졌더라고요, 아마 오대산 국립공원이 되었을 거야. 옛날 살던 사람들도 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뭐 근거가 없더라고.

 

전쟁 속에서

전쟁 땐 6월 25일 당일부터 피난가기 시작했어요. 그게 우리가 있는 데가 산으로 가로질러 가면 삼팔선이 50리 밖에 안 돼요. 1950년 6월 25일 오후 한 3~4시쯤 가마소재에서 군인이 총을 둘러메고 내려오더라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보따리 짊어지고 그 오대산 월정사로 넘어가는 길로 해서 연곡으로 가는 국도로 해서 거기서 재를 또 넘어 밤중에 진부에 도착해 거기서 하루를 자게 됐어요. 거기 있다가 제천 짝(쪽)으로 갔지요. 근데 거서 못 가게 하더라고, 우리를 받아주질 않아요. 피난민을 어디로 보내냐 하면은 충주 짝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경상북도에 선이 그짝 라인에 들어가지고 피난민은 그짝으로 오지를 못하게 하더라구요. 그래가지고 충주 짝으로 가다 괴산 짝으로 갔지. 글고 괴산서는 또 내리 그짝으로 못 가고 충주로 나와갖고 대전으로, 대전에서는 남쪽으로 못 가게 해서 그렇게 한 달 만에 전주까지 가게 됐어요. 근데 거길 가니깐 아유 거긴 벌써 적색분자가 얼마나 많은지 영 안되겠는 거야. 다시 이거 우리 고향으로 들어가서 살던 대로 살아야지 싶어서 다시 또 한 달 있다 짐 짊어지고 8월 14일까지 우리 살던 광산으로 돌아왔어요.

나갈 때는 많이들 나갔지만 들어올 땐 우리 식구들밖에 없었지요. 아버지, 어머니, 우리 7남매. 오는 길에 인민군 의용대 뽑는 게 동네마다 있더라구요. 지금은 세상을 떴는데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보따리 위에다 짊어지고 가니깐 날 붙잡아갈 순 없었겠죠. 내가 스물이고 동생이 열다섯 아래로 다섯 살짜리랬어요. 8월 14일에 도착을 하니깐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마을서 노동자하는 친구들, 어렵게 살던 사람들이 총을 둘러메고 있더라고. 그래서 “야, 저 사람들이 왜 저래 빨갱이가 됐나”그랬지. 세월이 그랬어요.

송천광산에서 한 십리 떨어진 초등학교가 있는데 다음 날 거기서 이제 8.15 해방기념식을 한다고 가자는 거라 나를 보고. 그게 무슨 초등학굔동 거 멀쩡하게 알다가도 이제 자꾸 잊어버려네 그래. 어쨌든 우리 여동생들도 가고 나도 가만 생각해보니깐 안 갔다가 괜히 해꼬지 당할까 엄한 생각이 들어갖고 강냉이, 감자를 넣은 점심을 싸 가지고 같이 갔어요. 그 사람들 중에 신일남이라고 동네 친구인데 야가 총을 둘러메고 있어. 그 학교 교정에 가니 사람이 많이 모였는데 마침 안내방송이 나오더라고. 주문진에서 그까지 한 십리 되거든요? 거기서 상부에 아주 높은 분이 못 오고 있는데 조금 기다리면 온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남자는 남자 줄에, 노인들 따로, 여자는 여자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그렇게 남녀노소를 분리 시켜서 서라 하더라고. 번뜩 생각이 들대. ‘아, 이건 틀림없이 징용이다.’ 그래서 신일남이를 붙들고 얘기를 했지.

“일남이 이 사람아, 자네가 알다시피 내가 피난 갔다 어제 왔지 않나, 내가 지금 많이 고달픈데 자네가 내 점심을 먹게나. 나는 식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가기가 너무 힘드니까 고마 이제부터라도 슬슬 가야 되겠어.” 그러니 이 친구가 아 그래라,고 얘길 해요. 그래서 내가 그 옥수수랑 다 줬어요. 그래 학교 인근에 조그만 재를 하나 넘어 있는 주막집에 들어가 너무 피로해서 잠깐 잠이 들었다 깼는데 멀리서 아이들 노랫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때 주막집 아들이 왔기에 “어예 됐노” 물으니 “지금 젊은 사람들은 따로 빼서 가더래요.”이래. 아이고 그러마 날샜네 싶어서 우선 막 집으로 왔지요.

 

이상이 있으면 검은 빨래, 이상 없으면 흰빨래를

내하고 어울리던 백영섭, 김훈일, 이시준 이렇게 우리가 다 대한청년단 간부였거든요? 내가 나이가 젤 어리지만은 그래 거기서 안 되겠다고 8월 17일에 음식을 싸 가지고 우리 집에서 한 오백 고지 되는 산꼭대기에 올라갔어요. 멀리서 우리 집이 가물가물하게 보여요. 그게 가서 이제 움막을 짓고 나무 쭉대기 같은 걸로 삼판을 해 가지고 네 사람이 잘 수 있게 만들어 숨어 지냈어요. 그래, 상황도 살피고 식량을 가지러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내려왔어요.

어머니보고 ‘이상 있으면 빨랫줄에 검은 거를 걸고 아무 이상이 없으면 항상 흰 빨래를 갖다 걸라’ 했거든요? 같이 있는 이시준이는 송천광산 임시병원 의사 조카라. 그 광산에는 ‘싸이나’가 많았거든요? 싸이나는 독약을 말해요, 청산가리죠. 금이 녹아내리는 장치가 있으니까 당시엔 쉽게 구할 수가 있었어요. 내가 55년에 안동 왔을 때도 장춘당약국에서 싸이나를 팔더라고. 하여튼 그걸 교갑에다 다섯 알씩 넣어가지고 넷이서 노나 가졌어. 만약 우리는 붙들리면 죽는다 하고. 무서웠기도 했지만 참말 비장했죠.

그렇게 산에 올라가서 숨어 있다가 아이고 9월 28일인가 내려왔어요. 그때 막 공중으로 비행기 막 날아다니는 소리가 굉장해요. 이게 아무래도 뭔 일이 났는가 싶어 소식을 들어보니 전세가 갈렸다고 해요. 내려오니깐 벌써 지서에 있던 애들이 다 철수하고 없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청년단에서 광산에 다이나마이트를 꺼내가지고 삼팔선이 불과 오십리 밖에 안 되니깐 인민군들 폐전병이 가는 통로에 터트렸지.

 

의용경찰이 되었지만 동료는 죽고

동해안 마을 연곡면에 오니깐 그 광산지서에 주임으로 있던 사람이 연곡지서 주임으로 와 있더라고요. 그이 날 보고 반가워하며 마침 경찰직원이 부족한데 지서 일 좀 봐달라고 해요. 그래 이시준이하고 나하고 지서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이제 총도 한 자루 주고 주의사항을 몇 가지 가르쳐 주더라고. 그러면서 의용경찰이 된 거지. 거기서 보초도 서고 그랬는데 동해안에 철수 못한 북한군이 많이 숨어 있었어요. 그 폐잔병이 집착돼 연대 병력으로 쳐들어오는데 감당이 안돼요. 공병대만 군데군데 있고 옳은 전투병력은 없었지. 어느 날 친구 이시준이 독감인지 열이 막 나고 앓았어요. 우리 분대장이 “어이 자네, 이 사람이 지금 상당히 위급한데 가보라”고 그래서 약을 구하러 나갔어요. 와중에 교전이 일어나고 중대에서 같이 의용경찰 된 사람 여덟이 그 산 밑에 조그마한 농가에 들어가서 밤을 새우고 거기 잤다고 해요. 근데 총소리가 나니깐 거기서 모두 튀어나왔지. 보니깐, 이 사람들이 아유 그게 그 인민군들이 복장이 다 낡고 하니깐 들어오면서 국군피복장을 습격을 해서 고마 국군복으로 갈아입고 위장한 거라. 그래 “당신들 뭐야”, 하니깐 “주문진 경찰대”라고 해서 싹 다 붙잡은거 아니에요. 그중 한사람은 새벽에 화장실에 가려고 나섰다가 보니 일곱이 붙잡힌 거라. 밑이 움푹 빠진 화장실에서 그 모습을 본 거지, 이 사람이 겁이 나서 거기서 숨었다가 거기서 도망을 친 거라. 나머지 일곱 사람이 모두 고만 무참히 희생을 당했잖아요. 거기 참말, 친구도 있었어요.

 

경찰에 합격했지만

후에 주문진 연곡경찰지서로 왔지요. 그 지서 주임이 ‘자네는 이제 어차피 군대 갈 나이도 됐고 하니 그럴 거 없이 가서 요새 경찰관 모집이 있었는데 거길 응시하라’고 해. 주문진 경찰서에 여섯이 시험 치러 갔다 다 떨어지고 나 혼자 합격이 됐어요. 합격 통지문 받고 한 달 정도 교육을 받고 1.4후퇴가 일어나 삼척까지 오게 됐어요. 어느 날 주문진 경찰대가 주둔한 곳에 경사 한 사람이 오더니 “자, 요번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어차피 경찰학교를 가야 되는데 경찰학교를 가려면 대구 경찰학교가 있으니 거기 갈 사람은 손을 쳐들라” 하더라고. 내가 가만 생각하니깐 나야 담배도 피울 줄 몰라 고스톱하고 노는 것보단 미리 가서 교육받는 게 낫겠더라고, 그래 손을 쳐들었죠. 아침에 보니 트럭이 와 있더라고. 같이 손들고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이 한 3·40명이라 트럭에 꽉 찼어. 그래 이제 대구를 왔다. 대구에 왔으면 당연지사 경찰학교를 가는 줄 알았죠. 날이 저물어 컴커무리하이 잘 안보이대, 근데 경찰학교라는게 무슨 놈의 간판이 붙은 거 보니깐 ‘제일장정대기소’라고 떡 써있더만요.

제일장정대기소가 뭐 하는 곳이라, 군대 아이라. 아,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고만에 들어가자마자 신분증이고 뭐고 싹 다 뺏어요. 대번에 ‘야 이거 틀림없이 군대 아니라’ 낭패스럽더라고. 내가 어릴 때 우리 외사촌 형님이 나를 자전거 태워가지고 가다가 체인에 살이 닿아 가지고 이게 깎이면서 탈이 났다고요. 이 다리가 아프지는 않는데 희한하게 한눈에 봐도 부었다고요. 가만 보니 안되겠어, 이제 내가 꾀를 써야 되겠다 싶었지. 절지도 않는 다리를 일부러 절면서 생다리 아파서 걷지를 못하는데 보니깐 다리가 막 부어올랐거든. 안되잖아요. 그래서 그땐 치질도 있고 하니깐 거기서 날 불합격을 시키더라고.

불합격된 사람 한 4·50명을 데리고 나오는데 도청서 역으로 직통 도로가 있더라고요. 나중에 세월이 흘러 가보니 거기가 홈플러스 자리 같아요. 그 옆에 제일모직 창고가 있더라고, 그게 우리가 갔던 자리야. 근데 또 불합격된 사람을 부르더니 귀향증을 안 써주고 또 딴 데로 끌고 가더라고요. 이야 안되겠데, 쭉 가는데 냉천이라는 도랑이 있는데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옆에 나 있길래 글로 해서 냅다 혼자 도망을 갔지. 내가 불합격돼서 간다니까 같이 있던 친구가 자기 윗도리 몇 가지를 ‘이거 좀 집으로 보내줘’ 하면서 주더라고. 그래 받아 나온 그걸 한 가방 들고 칠성시장에 가서 다 팔아버렸지. 그걸 파니깐 요새 돈으로 한 오만 원 돼요. 군인 장교병들 윗도리거든요? 번쩍번쩍 하잖아요. 그래 국밥 한 그릇 사 먹고 이발하고 나니깐 돈이 남은 것도 없어.

그래 이제 주문진으로 가야 하는데 신분증이고 뭐고 다 뺏겼잖아. 근데 내가 수료증을 갖고 있었거든. 주문진경찰에서 서장명의로 수료증을 써주더라고. 정복희라고 딱 해가지고 뻘건 도장을 찍어서 누리꾸무리한 종이에 써주더라고. 그래 그거는 내가 다행히 잘 숨겨놓았었지. 그거를 신분증 삼아가지고 사실 이러이러한데 지금 이래서 집에 가는 길이라 하니깐 나를 끌고서 동장실에 가거든. 동장한테 가가지고 얘기를 해서 이제 숙소를 정해주더라고, 그렇게 해서 고생 끝에 찾아 왔지요. 강릉에 와서 아는 집에 우리 그 가족들이 어디로 피난을 갔는지 알고 싶다 하니깐 후포서 조금 올라오면 기성이라는 조그마한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 우리 가족들이 있다 그래요.

어린 여동생이 입성이 말이 아닌 내 옷을 받아가지고 더러우니까 고마 주머니도 뒤지지 않고 물에 담가버리네. 그러니 그 수료증이 죽이 됐을 거 아니에요. 증명서는 오직 그거 하나뿐인데 빨아버렸으니깐 이걸 말릴 수도 없고, 근데 한편으로 ‘아이 됐다 그래 내 버려라’ 그래 생각했지요. 이제 나는 다시는 고마 경찰이라는 생각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속일 수가 있느냐 싶었지요.

 

김형, 안동에 가서 금은방을 여소

그때도 아버지는 광산에 가 집에 안 계시더라고. 그래 이제 내가 우에든동 가장 노릇을 해야 했지요. 한 일주일 동안 내가 할 직업이 뭔가 배회하니 할 게 없어요. 돈이 있나 아무것도 없지. 금은방에 가서 시계 줄 하고 뭐 뚝딱거리고 부인들 돈 주고 하는 걸 보니 내가 금반지 만드는 기술만 배우면 어떻게 살길이 안 생기겠나 싶어 들어가서 물어봤어. 내가 금은방 기공을 좀 배우면 안되겠나했죠. 그때가 21살이죠. 그러니 그 사람이 자기도 돈이 없어 남의 자본을 대서 들어왔다 해, 근데 알고 보니 그 광산에 병원 하던 이시준이 작은아버지가 돈을 대고 같이 동업을 하는 거라. 나랑 아주 친애하던 사람이거든요? 그분이 아 좋다, 자네가 하면 나야 좋지 그렇게 승낙을 해서 일을 배우게 됐지요.

6.25 나가지고 당시 밤 9시만 되면 불이 가는 거예요. 촛불을 켜놓고 뚜드려 가며 연습을 했죠. 한 3개월 해보니 어느 정도 하겠더라고요. 그래 이제 그 사람한테 배워 가지고는 안 되겠어 좀 더 큰 데서 배워보자 싶었지. 강릉 보산당에 갔다가 자본을 댈테니 동업하자는 사람이 나오네. 이후에 묵호에서도 동업하고 이래저래 기술은 있었어도 크게 돈 번 거는 없었지요. 당시 은수저 은핀같은 걸 가지고 사방 각천을 돌아댕기는 행상꾼이 있었어. 어느 날 이 사람이 말하길, “아이고 김형 같으면 저 안동으로 가면 된다. 안동에 금은방이 있는데 한군데는 금을 다루고 한군데는 은을 하는데 다 노인들이라 김형이 가면 성공할 수 있는데 한번 가봐라.” 그래.

 

안동에 입성한 ‘금쥐’

내가 1955년도에 안동에 왔어요. 당시엔 시내라 해도 앞엔 밭이고 집도 그렇게 없었어요. 여기 와서 첨엔 세들어 살다가 지금 삼산동 집을 65년도에 사서 68년도에 지었지. 그때 인근에 낙동다방이 있었고 그 위에는 은하미장원이고. 연고지도 없이 안동엘 왔어요. 55년 7월 8일에 우리 집사람하고 이불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왔어요. 그해 봄에 강원도에서 결혼을 했지요. 우리 집사람은 강릉사범 나온 엘리트였지. 교학사 간판 붙은 자리는 옛날 경북여객버스터미널이라 제일 요지였어요. 낙동다방 밑에 시계점이 하나 있더라고 그래 거 들어가니 그 사람이 십오당 김시현 사장이래요. 김 사장이 사람이 잘생겼어. 삼산동에 동인당 옆으로 디피점(성광칼라), 경안약국 그 세 채가 옛날엔 쪼록이 죄수가 2층으로 세 동을 똑같이 목조건물로 지은 집이라요.

어른이 광산에 금광에 들어가서 금맥을 찾아서 들어가 쇠보하는 거 해봤고, 제전소에 금을 빻아서 체금하는 것도 알고, 그 다음에 이 일반 색금을 순금으로 만드는 그것도 내가 분석을 하는 거도 배웠고, 광산에서 캐내 산더미같이 쌓아놨던 돌무지에서 내 손으로 금을 채취하게 된 거잖아요. 어려서 이어진 인연으로 성인이 돼서도 금으로 이제 돈을 벌 수 있게 된 거죠. 그래놓으니 광산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이 고마 나를 ‘금쥐’라고 별명을 붙이더라고. 희한하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금을 찾아내니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붙여 “금쥐, 저거 영상 금쥐 왔네.”이래요.

내가 여기 왔을 때 안동에 금은방은 딱 두 군데, 지금 노스페이스 자리랑 목성동 중소기업은행골목에 하나 있었어요. 상호는 기억이 잘 안나네. 첨에 와서 ‘창신당’(현재 성광칼라 옆 아마라멘집 자리)을 채려가지고 거 딸린방에서 살림을 시작했어요. 강릉에서 도금하는 기술을 배웠거든. 옛날에는 시계 귀할 때 시계 문자판에 글자 새로 쓰고 뭐 몇 개 해가지고 새 걸로 만드는 도금을 했었어. 내가 경찰생활 몇 달 밖에 안 했지만은 강릉에 우리 장모님이 강릉서 있다가 안동으로 온 김성기 경찰서장한테 전화를 넣으니 사흘만에 가게 허가가 나더라고. 그래 가지고 이제는 내가 선전을 해야 하잖아? 당시 경찰관은 검은 창 있는 모자에 다 비둘기며 무궁화가 박혀있어, 근데 그게 주석이라 시커멓게 빨리 변하거든 그걸 닦아 가지고 도금 해주면 노란 게 번쩍번쩍하니 좋잖아요. 그렇게 바꿔주니 이 사람들이 좋은 거라 ‘그 집에 가면 이렇게 해준다고’ 입소문이 났지.

 

창성하고 신용 있어서, 창신당

이름은 ‘창성하고 신용있다’ 하는 뜻에서 창신(昌信)이라고 한자로 그래 내가 지었어요. 바지런히 어예 하다보이 금방 자리 잡았어요. 다른 금은방 사람은 내가 금을 하니깐 자기네도 금을 한다 해가지고 은 다루던 줄 가지고 금을 쓰니깐 금에 은가루가 떨어질 거 아니에요. 그걸다시 녹히니깐 플러스가 약해질 수밖에, 은이 들어가니 약간 희끄므리한 게 색깔도 별로 좋지 않거든, 그게 이제 입소문을 타서 선전이 되는 거야. 내가 지금 생각하면 현재 금은방하던 사람 치고 금을 광산에서 채굴해가지고 순금 만들어 가지고 장신구 만든 사람이 내 하나밖에 없을 거에요. 누가 어떤 사람이 광산에 있다 금은방하고 순금 만들어 가지고 장신구까지 만들어, 내가 실제 브로치며 반지며 다 만들었거든요. 55년도에 개업해서 내가 일흔여덟 때까지 했으니 한 자리서 40년 넘게 운영을 했지. 근데 일이란게 큰 활동 없이 꼼짝없이 앉아서 손님 받고 하다보니 위장병이 와서 기술자를 두고 했지요.

 

분실한 백금 되찾은 사연

초창기엔 사람을 안두고 혼자서 일을 해서 좀 바빴지요. 반지 만들다가 손님 오면 손님도 받아야 되고 또 기공도 해야 되고 했어요. 어느 날 그런 와중에 손님이 왔어요. 한참 장사가 잘될 때였어요. 그때 막 백금이 나왔을 때거든 나온 지 얼마 안됐어요. 반지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제 손님이 가고 조용해서 진열장에다 넣다보니 가만, 이렇게 보니깐 백금반지 하나가 없어진 거라. 몇 사람이 다녀갔는데 찬찬히 혼자 생각 끝에 그분이 점잖고 괜찮은 분인데 그분이 그랬을 리가 없는데 나중에 만지작만지작 한 게 틀림없이 그분밖에 없어. 딴 의심 가는 사람이 없어. 그땐 거기 안동대학이 없었지만 송천 저짝 안동대학교 있는 그 위에 산다는 얘길 들어갖고 송천에서 장보는 겸에 왔다고 그런 얘기가 기억이 나요. 입성도 그렇고 아주 그 촌 노인이 아니고 그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분이었어요.

송천엘 자전거를 타고 갔네. 버스 정류장 옆에 거기 주막집이 하나 있었는데 물건도 팔고 그래요. 여기 동네에 산다는데 그 아주머니를 찾았지. 생긴 것도 차려입은 것도 괜찮은 사람이어서 설명을 하니 주막집 주인이 “아 어저께 장 본 아줌마”를 알려 주더라고. 그래 가보니 큰 기와집이야. 그래 거길 들어가니깐 그 안에 할머니하고 아주머니하고 몇이서 수돗가에서 뭘 하고 계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을 어떻게 해야될까 한참을 고민했지. 그래 들어가서 이렇게 말했어 “아주머니, 글쎄 엊그제 가져가셨던 반지가 그게 은반지가 아니고 백금반집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아 그래요?”하면서 방안에 들어가서 반지를 들고 나와. 그래 날 보내면서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해. 내가 머리를 잘 썼지? 아주머니도 망신 안당하면서 반지는 되찾았으니.

 

뛰는 금쥐 위에 나는 사기꾼

또 한번은 동성루라는 중국집이 있었어요. 요새 대륙사진관 건너편에요. 그땐 지금같지 않고 1층짜리 건물이랬어요. 눈이 푸실푸실 오는 날 “아유 지금 우리 집에 누가 금을 사러 왔다하는데 그래 금을 좀 가지고 오면 안되겠나”이래요. 본시 그렇게 물건을 가져가면 안 된다고요. 근데 그날따라 금을 팔지 뭐, 하고 10돈짜리 하고 팔찌 10돈짜리 하고 거 한 30돈쯤 되는 걸 합해서 그걸 가져갔어. 그런데 저울하고 같이 가져오라 하더라고요. 저울을 가져갔더니 달아보고는 돈을 준다고 여기서 있으라고 그래. 아유 내가 어떻게 어리석게도 짝이 없지요. 그걸 그래주면 안되잖아요. 저울하고 물건을 가지고 갔는데 여기있으라 그래놓고 나한테 그 우동 한 그릇을 보내 주는 거라, 잠깐 식사하고 기다리라고 손님이 있으니깐 얘기한다고 어쩌고 그래. 그래서 뭐 아무리 기다려도 이놈이 오질않아 그래 아차 싶었지. 나가 보니깐 벌써 없지 뭐. 아이고 사기친놈이래 그때 금 30돈 요새로 치면 750만 원 돈이죠. 아이고, 참 그런 일도 있고 참 재밌는 일도 많았지요.

혼수 하러도 많이 오고, 옛날엔 금 한덩어리로 반지를 만들면 밥사발에 그득 했어요. 그걸 얼마나 많이 팔았게요. 그런데도 금 장사는 박리래요. 이문이 없어요. 금액만 왔다갔다하지 남 보기엔 돈 세고 뭐 하고 금주고 하니까 많이 버는 거 같아도 이문이 박했어요. 보석은 그래도이득이 있죠. 안동초등학교 후문쪽으로 금은방 거리고 형성된 거는 내가 안동에 오고도 한참 후예요. 한 집 두집 생기다보니까 그짝으로 그렇게 모이데요. 한창 장사가 잘 되던 시기는 70년에서 80년대 그때가 제일 호시절이었죠.

 

늘어나는 장사수완

금은방에서는 솔직히 소득이 크게 없고, 이웃의 강권(?)으로 창신당 옆 명복전기상회 그걸 사게 됐어요. 그때가 한창 석유난로가 유행할 때였어요. 은하미장원에서 여자들 머리에 고데 하는데 그 연탄가스 냄새가 말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야~ 이게 어 냄새가 이렇게 나면 미장원이 이게 하 안되겠다 말이야. 내가 서울에 물건 사러 일주일에 한 번씩 갔거든요. 그 미장원에 이걸 사다가 고데기를 거기다 하면은 냄새가 안나지 않게느냐 그래서 석유 난로 10대를 사왔어. 은하미장원은 물론이고 지금 중파 옆에 그 미장원에서도 사고 거기서 또 다른 미장원을 소개해주고 하니까 2~3일 되니 10대가 다 나가부랬어. 야 이거 장사되겠다, 싶었지. 서울에 가서 수입상을 찾아봤어요. 후지까 수입상이 있더라고. 거길 찾아갔다. 아주 커요. 촌놈이 거 가가지고 내가 안동 사는데 이걸 좀 사다가 팔았으면 좋겠는데 대리점 하나 해주면 안되겠어요? 하니 아 좋다고 하면서 대번에 막 돈도 안 걸고 내한테 100대를 보냈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떼어 파니깐 저 용상사람 하나가 그걸 구루마를 끌고서 판다고 많이 가져가 팔아요. 그때 2천 얼마밖에 안되는데 4천 몇백 원씩 파니깐 배를 판 거죠. 그러다 이게 많이 팔리게 되니까 하나가 뭐 8천원 이렇게해서 만원 가까이 되버리니깐 2~3배 남잖아요. 거 돈이 되지요. 그래 그 석유 스토브를 사가지고 돈을 벌었던 시절도 있었지요.

 

강원도에서도 삼산, 안동에서도 삼산동에 뿌리 내려

어른이 미국사람 광산에서 일을 보면서 기술직으로 있었으니깐 그 당시에 월급 받는 거라서 살림이 괜찮았어요. 근데 거길 나오면서 돈을 다 없애고 그때부터는 내가 열여섯부터 가장노릇을 했지요. 안동 와서 정착하면서 부모님, 동생들 다 데리고 왔고 북한에는 사촌이 있는데 소식은 전혀 몰라요. 왜정 말에 강원도 오대산 밑 삼산리에 온 거라 고향이 북한이긴 해도 철들고 강원도서 자라고 20대에 안동에 정착해서 이북 말씨 강원도 말씨 안동 말씨 다 섞였지요. 경북지구 평안북도민회 회장 활동도 열심히 했고 그덕에 대통령 국민포장도 받았어요. 영덕삼사해상공원에 이북도민의 망향을 달래기 위해 1995년 세운 망향탑 건립을 위해 영덕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몰라요. 그렇게 고생해도 결과가 뿌듯해서 다행이었지요. 세상살이 모든 게 그렇대요. 치열하게 살아왔고 지나고 나니 고생돼도 보람있었어요.

 

부인 손종숙 여사는 2013년 세상을 떠났다. 고희연을 한 딱 10년 후였다. 부인이 떠나면서 오래된 사진을 많이 없애 옛날 사진이 거의 없다. 오랜 친구가 권해서 성당을 다니면서 작년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요셉. 아흔 나이가 무색하게 그는 건강하고 젊어 보였다. 믿음 갖고 건강하게 지내려는 그의 젊음의 비결 중 하나는 한번 들으면 계속 듣고 싶어지는 걸출한 입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반짝이고 빛나는 금을 만지고 살아왔지만 반세기 넘는 세월 가족을 이끌고 낯선 도시에 정착해 야무진 삶을 꾸려온 자신의 인생도 반짝였다는 것을 아무래도 모르는 눈치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9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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