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산책-안동의 원도심 삼산동
동네산책-안동의 원도심 삼산동
  • 서미숙(작가)
  • 승인 2021.06.02 17: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집이 어디~껴?”“시내래요.”

“어디서 만나면 좋을리껴?”“시내서 보시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사이에는 지금도 통용되는 안동 표준말이다.

“시내래요.”에서 시내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기 전 안동시 전체를 의미한다.

“시내서 보시더.”에서 시내는 주로 안동시에서도 삼산동 일대 원도심을 지칭한다.

삼산동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먼저 기록으로 존재하는 근대 삼산동을 찾아보았다. 근대는 일제 강점기에서 6.25 전쟁 이전까지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기억하는 안동 삼산동은 대부분 1960대부터였다. 오래 그곳을 지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시대 이야기를 기록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삼산동 근현대 이야기로 폭을 넓혔다. 삼산동은 동부동, 서부동, 남부동, 북문동에 둘러싸인 안동의 원도심이다. 안동시 보건소 앞에서 동쪽으로 삼뭇들, 장거리들이 있어서 삼뭇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사묘 앞에서 내려오며 이 지역에 망호루, 제남루, 문루 등 누각이 서 있었다. 안동부 당시 고을 수령이 제남루 앞에 많은 백성을 모아 놓고 죄인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일벌백계의 교훈을 일깨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종루가 있는 거리라 하여 종로라 불렀다. 현재 신한은행 앞, 차 없는 거리에서 중앙파출소에 이르는 통로를 말한다. (출처: 안동의 지명유래)

드론으로 내려다 본 삼산동(ⓒ구자을)

3.1독립운동의 성지, 삼산동 신한은행 앞

일제강점기에는 신한은행 앞에서 옛 스쿨서점 방향으로 난 도로를 본정통이라 불렀다. 본정은 일제가 잠식한 거리,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가 모여 있었던 곳이다. 금융조합, 대구은행 안동지점, 식산은행 등이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안동 지역에 금융기관의 지점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1973년 안동농업 협동조합이 업무를 시작했다. 삼산동 신한은행 앞은 3.1운동의 성지다. 1919년 3월 13일 안동에서는 처음으로 이상동이 혼자 만세운동을 했던 곳이다. 그다음 장날인 3월 18일(음력 2. 17.)에 그곳에서 다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안동우체사 – 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 – 안동우편국 – 안동우체국 – 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 – 삼산동우체국

안동의 체신업무는 1895년 12월 07일 ‘안동우체사’로 출발했다. 1902년 6월 10일 ‘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로 바뀌었고, 1907년 6월 12일 ‘안동우편국’으로 개칭했다가 1950년 1월 12일 ‘안동우체국’이 되었다. 과거엔 안동우체국이 지금의 삼산동 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1984년안동우체국이 당북동으로 이전하고 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이 되었다가 이듬해 ‘삼산동 우체국'으로 개칭했다.

휴대전화와 이 메일과 택배가 없던 시절, 우체국은 우리 생활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군대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요즘 청춘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화가 없는 집이 많았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우체국이나 전화국에서 시외전화를 신청하고 상대방과 연결시켜 주는 교환원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연말연시가 되면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부치러 오는 사람들로 우체국이 성시를 이루었다.

 

2대에 걸쳐 운영하는 동인당 한의원

동인당은 2대에 걸쳐 한의원을 운영 중이다. 작고한 권오규 원장은 1918년생이다. 일제강점기 태화오거리 근처에서 한약방을 하다가 삼산동 우체국 건너편으로 이사했다. 88세로 생의 마지막 날까지 일하고 밤에 돌아가셨다. 슬하에 13남매를 두었다. 부친의 권유로 넷째인 기종 씨가 한의학을 공부하여 가업을 잇게 되었다. 2004년 12월까지만 해도 동인당 한약방 1층은 부친이, 2층은 아들이 진료했다. “막상 공부해 보니 한의학은 매력적인 학문입니다. 다만 정부에서 뒷받침이 안 되고, 양의사들 파워가 세서 기를 못 펴는 실정이지요. 한방을 모르는 양방 의사들은 무시하고 미신화하니까.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한약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는 편견을 갖고 터부시 하지요. 옛날부터 한약을 먹어온 사람이 자식 데리고 꾸준히 찾습니다.”

동인당 한약방 앞이 예전엔 비포장도로였다. 소달구지가 지나다니고, 소 지르메에 똥통을 싣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길에 소똥이 밟히기도 하고, 가끔 말도 다녔다. 지게에 솔잎을 지고 팔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갓 쓰고 한복 입은 어른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길가에 리어카 짐꾼들이 햇볕을 쬐며 쭉 늘어서 있었다. 당시 짐 싣던 분이 요즘 동인당에 오기도 한다. 그는 1968년 5월 18일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안동시 운흥동 ‘문화극장’에 수류탄 폭발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휴가 나온 육군하사가 애인의 변심에 앙심을 품고 극장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즉사 5명 부상자 44명이나 되는 대형 사고였다. 동인당 바로 옆이 시내 유일한 외과였던 ‘광제병원’으로 가는 작은 골목이었다. 환자를 업고 바삐 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동인당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경안약국’, ‘노라 양장점’, ‘창신당’ 그리고 코너가 구멍가게였다. 조흥은행 옆 왼쪽 코너에 ‘클레오파트라’ 옷가게, 다음이 ‘스쿨서점’, 학용품을 팔던 ‘광문사’, 코너에 ‘영창피아노’가 있었다. 스쿨서점 맞은편에는 ‘수미사’란 양복점이 있었다. 동인당 오른쪽 코너엔 철물점 ‘대창사’가 있었다. 대창사 옆 골목 안에는 유명한 중국 요리집 ‘경회루’가 자리했다. 동인당 바로 맞은편에는 ‘안동우체국’이었다. 지금은그 자리가 삼산동 우체국이다. 삼산동 우체국 옆 코너엔 일식요리점 ‘공주식당’이었다. 공주식당이 사라지고 교학사가 들어섰다가 최근 가게가 비어있다. “예전에 구시장이 번화할 땐 시장 가깝고 편리했는데 요즘은 외곽지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다소 불편해졌지요.” 권 원장에게 삼산동은 고향이자 안식처이다. 어릴 적 눈이 오면 눈 속에 연탄재 넣어 친구들과 눈싸움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는 삼산동을 떠나면 불안할 정도로 삼산동 토박이다. 현재는 용상동에 거주하지만, 한의원이 있는 삼산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동인당 한의원 2대 권기종 원장(ⓒ서미숙)     

조선 최초 여성 치과의사가 개업한 삼일치과

일제강점기 안동에는 최매지(이명異名 최봉금, 1896~1983)라는 신여성이 활약했다. 그녀는 민족과 여성, 그리고 기독교 운동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삼산동에서 삼일치과병원을 개원하여 전문직 여성으로서 직업의 전문성을 봉사활동에 활용하였다. 최매지는 인천 출생이다. 3남매 중 장녀이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할머니의 영향으로 개화된 환경에서 성장했다. 상업으로 생활이 넉넉한 부친 최봉진은 자녀들을 모두 학교에 보냈다.

1906년경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주하여 감리교 계통의 삼숭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이화여자중학교를 거쳐 1916년 일본 광도廣島고등학교에 유학을 갔다. 귀국 후 진남포 3.1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던 삼숭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삼숭학교 재학시절부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그녀는 교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진남포를 중심으로 교육 활동과 여성 계몽운동을 주로 했다. 대한애국부인회 연합회 서기 겸 진남포지회 회장도 맡았다.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것과 임시정부 연락원 김정목과 김순일의 국내 은신처를 제공한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1921년 2월 평양 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더는 조선에서 교직 생활 및 기타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28년 일본에서 치의학을 공부했다. 동경여자치과의학전문대학 본과, 전공과를 졸업 후 진남포에서 남포치과의원을 개업했으니 조선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였다.

그녀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무료 진료를 했고, 의료진이 부족한 시골에서는 외과와 소아과 의사 역할까지 감당하였다. 1938년 최매지는 42세에 안동 남자 이재유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안동으로 내려왔다. 안동 읍내에 삼일치과병원을 개업하고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한글을 모르는 부인들까지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공민학교에서 남의집살이하는 여성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남편은 1945년 사별했다.

‘내 일신과 내 가정을 생각하기보다 나라를 위해서만 몸을 바치라.’는 하늘의 명령을 깨닫고 일생 나라와 국민을 위해 살 것을 결심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안동애국부인동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대한애국부인회 안동군 지부장을 겸하였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최매지가 안동군 대표로 뽑힌 것은 고무적이었다. 4단계의 간접 선거를 거쳐 최종 도의원에 뽑히는 민선의원이 되지는 못했다. 이후 제헌국회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방했다. 한국전쟁 후 대한기독교 여자 절제회 회장을 맡아 여성 구제와 보호, 금주 금연과 사치 금지 등에 주력하였다. 말년에는 YWCA와 교회 활동을 통해 사회봉사로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국가보훈처 공훈록, 최매지의 민족운동과 사회활동/윤은순, 「여성과 역사」 30, 2019.06 참고)

 최매지가 개원했던 치과는 삼산동 우체국 맞은편이다. 당시엔 동인당 한의원과 광제병원 사이 단층 한옥이었다. 안동교회 김대성 장로에 의하면 후에 그곳은 황병원이 인수해 양옥으로 단장하여 경안약국이 들어섰다. 지금은 동인당에서 서쪽 경안약국 건물을 사들여 동인당 한의원을 확장했다. 건물 벽에 유서 깊은 장소를 알리는 명패라도 걸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동에 컬러 사진 시대를 연 성광칼라

성광칼라는 삼산동의 아이콘이다. 만주에서 사진관을 하던 형 이인홍의 영향으로 이인호가 1963년 안동에서 처음으로 ‘성광사’란 사진관을열었다. 1970년대에 서대교 씨가 인수하여 ‘성광칼라’로 상호를 바꾸었다. 1980년부터 성광칼라 사진 기사이자 책임자로 근무했던 남성진씨가 1999년에 인수하여 23년째 3대 대표이다. 현재 아들이 사진 영상학과를 졸업하고 4대를 이을 준비를 하며 출근 중이다.

성광칼라는 경북북부지역 처음으로 컬러 현상을 시작했다. 아날로그로 암실 작업을 하던 시절에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 남 대표가 인수할 무렵이 성광칼라 전성기였다. 졸업시즌이면 필름사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과자를 사 놓고 기다렸다.

“옛날에는 삼산동이 최고 상권이었는데, 시내가 죽어가니 많이 처졌지요. 주거지역 지어주고, 주민이 있어야 장사가 되지, 외지 사람 상대로만 장사하면 상권에도 신경을 덜 쓰게 되지요. 상권이 살아나려면 인구가 늘어나고 지속적으로 구도심을 살려줘야 합니다.”라는 남 사장말이 절박하게 들린다.

 

삼산동 성결교회

성결교회는 2019년에 66주년을 맞이했다. 1953년 10월 20일 교단 십자군 제3 전도대에 의해 설립한 교회이다. 당시 삼산동 136번지에서 천막을 치고 장기 부흥 중에 본부의 보조로 192평의 대지를 구입했다. 설립유공자는 천세광 목사, 이성봉 목사이다. ( 『사진으로 보는 안동 성결교회 60년사』 )
 

일공공일 김옥현

 김옥현 사장(69세)은 예천 보문이 고향이다. 열여덟에 시계기술을 배우러 안동시 삼산동 ‘남방상사’를 찾았다. 안경과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시계 배울 자리가 없어 안경을 익혔다. 가게주인 아우는 신시장에 ‘남방시계점’을 열고, 형님인 민병필 씨가 지금 일공안경점 자리로 옮겨서 ‘남방안경점’을 개업했다. 그는 남방안경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스물 다섯에 당시 소 40마리 시세로 남방안경점을 인수했다. 민 사장의 아우가 하던 남방시계점에서 안경을 취급했기 때문에 상호를 ‘동방안경’으로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왔다. 정밀한 기기를 다루는 만큼 그는 세심하고 철저하다. 업무일지는 기본이고 개인일기도 날마다 쓴다. 업무일지 여백에 안동 사투리 메모가 빼곡하다. 안경 맞추러온 고객들이 일상으로 쓰던 말을 바쁜 일과 중에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개인정보가 담겨 일지 원본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사투리 몇 개를 옮겨본다.

‘안경 쓰면 첩에 집에 간 것 긋다.’

‘내가 87이래. 나이 많은데 전좌 보고 잘 복키는거.’

‘안경이 작꾸 내리왓사’

‘호부레비 뒤따라 옥까봐 식겁했다’

‘옛날에 여무까시라고 백내장 비슷한거 있었는데 걷어내는 의원을 만나야 되는데….’

‘얄브제라? 했다 잘 안 보이드라.’

‘본방치기 한 동네 남자와 결혼’

‘마커 18 금이껴’

김 사장은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오래된 책과 사진도 수집한다. 지금까지 수집한 스크랩북이 수십 권이라 한다. 보여준 파일에는 안경 쓴 유명인들 사진이많다. 정작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사양했다. 2002년 1월 9일 프랜차이즈점 ‘일공공일’로 상호를 바꾸었다. 현재 가게 면적은 예전의 다섯 배 크기로 늘어났다. 김사장 외에 직원이 세 명이다. 43년째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딸 김남 씨도 안경학을 전공하고 합류했다. 넷째 아들도 안경학과 재학 중에 군에 입대했다니 얼마나 든든할까. 앞으로 자녀들이 가업을 이어갈 테니 ‘일공공일’은 삼산동에서 건재할 것이다.

 

삼산동의 산 역사 권오걸 사장

 권오걸 씨는 이천동 출신이다. 서울에 가서 오전엔 라사라, 국제복장, 오후엔 노라노 식으로 치열하게 양장 기술을 배웠다. 큰누이가 경비를 대주었다. 디자인 공부, 재단을 배우고 이대 앞에서 재단사 보조를 거쳐 고향으로 내려왔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1970년대 안동에 의상실이 120여 개나 있었다. 그는 19세 때 삼산동 우체국 앞 ‘노라 의상실’을 거쳐 1972년 ‘유 의상실’로 내 가게를 시작했다. 중고생 교복 잘하는 집으로 소문이 났다. ‘하얀집’ 재단사, ‘동아양장점’ 미싱 재봉도 했다. 1976년부터 삼산동 삼방사 옆에서 ‘고우네 의상실’을 열었다. 만19년 간 호시절이었다. 기성복이 나오면서 맞춤옷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 기성복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헌트’, ‘쉐인’, ‘휠라클래식’ 순으로 품목을 바꾸어 가며 삼산동에서 오래 버티었다. 삼산동에서 집을 팔든 임대를 하든, 권오걸 씨에게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삼산동의 산 역사이다. 어디 가서 누굴 만나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도 훤히 꿰고 있다.

 

옛 삼방사 주인 김건종

 1949년생 김건종 씨는 의성김씨 집성촌 내앞마을이 고향이다. 그와 삼산동은 일찍부터 인연이 깊다. 그의 선친(고 김시박)이 삼산동 삼방사 자리에 일찍이 터를 잡았다. 6.25 사변 후 1950년대 초반 선친이 건물을 매입하여 ‘상공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당시 사옥으로 사용했다. 인쇄업을 하다가 문경 시멘트 경북북부지구 총판 대표이사였던 부친은 2대, 3대 무소속 경북도의원을 지냈다. 부친과 삼촌 김경종이 ‘상공인쇄소’를 운영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안동 시내로 왔다. 삼방사 자리 뒤에 한옥이 삼촌 댁이었다. 그곳에서 자취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훗날 삼촌으로부터 한옥을 매입하여 결혼 후 그 집에서 살았다.학교를 졸업하고 삼산동 140-5, ‘상공주식회사’가 있었던 부친의 건물에 1973년 3월 3일 ‘삼방사’를 개업했다. 1973년부터 2000년까지 29년간 그렇게 문구점 삼방사를 운영했다.

“아버지가 안동에서 의성김가 우리 일가가 하지 않는 업종을 찾아봐라 해요. 찾아보니 다 있는데 문방구가 없어. 우리 조상이 선비인데 학자들한테 필요한 게 지필묵이다. 그래서 문방구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작은 문구점으로 시작해서 1984년 부친으로부터 그 건물을 구입했다. 33세에 건물주가 되어 건물을 신축했다. 삼방사를 개업하고 나서 문구점 관리는 부인이 주로 맡다시피 했다. 이후 삼산동의 ‘마켓 21’부터 ‘베스킨라빈스’, 옛 상공인쇄소 자리 ‘CNA’ 까지 건물을 사들여 임대업을 한다. 아들이 건물관리를 하고 노후를 보내며 뒤를 봐주는 편이다. 김건종 씨는 “우마차가 다닐 때 소 엉덩이에 소똥 떨어질까 봐 가마니를 받치고 다녔어요. 삼방사 맞은편 가게였던 대구전기 함동훈 씨 부친이 먼지 날지 말라고 날마다 길에 물을 뿌렸지요.”라고 기억한다.

 

광제병원과 호연 장학회

광제병원 설립자는 의학박사 허동섭이다. 병원 건물은 원래 일본사람이 지어서 사용하던 2층 적산가옥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 군정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휴전 직후에 허 박사가 불하받아서 보수하여 병원을 열었다. 한국전쟁 직후 1953년경부터 1978년경까지 운영했으며, 개설된 진료과는 외과, 산부인과였다. 특이한 점은 일찍이 X선 장비도 도입하여 골절 등의 정형외과 진료도 했다는 것. 입원실이 20에서 30실 정도 규모였다.

1985년 5월, 유지를 받들어 재단법인 호연 장학회를 설립했다. 허 박사의 장남 허욱열 이사장이 재단을 운영중이다. 초기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반반 정도, 지원대상은 안동시 관내에 있는 고등학교로부터 졸업생 중 대상자를 추천 받아서 면접을 통하여 선발했다. 지금은 한 해에 5~10명 정도 대학생 중심으로 지원한다. 장학금은 허 박사가 그간 운영하던 광제병원을 헐고 신축한 안동호텔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와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을 주 재원으로 한다. 

 

삼산동 멋쟁이 인간문화재 이상호

인간문화재(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백정 역) 이상호 씨는 삼산동에 대한 추억이 많다. 1945년 해방둥이다. 남부동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삼산동에서 놀았다. 다섯 살때부터 구두 신고 가죽가방 메고 남부동에서 삼산동을 거쳐 대건유치원에 다녔다. 김수환 추기경이 목성동 성당에 신부님으로 오셨을 무렵이다. 안동초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도 하고 끼가 다분했다. 경안고등학교 시절에는 양복점에서 제일모직 바지 맞춰 입고, 흰 운동화 대신 백구두를 신고 폼 잡았다. 당시 삼산동에는 구두점이 많았다. “국제양화점이 중소기업은행 앞에 있다가 삼방사 옆으로 옮겼지. 김창현이 서울 가서 수제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워왔는데 안동 시내 건달들은 국제양화점 구두를 다 신었어. 6.25사변 전에는 농협에서부터 대구은행 뒷길로 해서 맘모스 제과 뒤쪽에 큰 거랑이 현재 홈플러스 앞쪽으로 흘러갔거든. 농협 자리가 버스터미널인데 삼환여객 하나뿐이었어. 삼환여객 버스도 우리 집(현재 남부동 최유근 안과 맞은편, 당시 대동식당) 앞으로 해서 철도국(현재 홈플러스)을 거쳐 갔지. 오가다로 원동기 돌리듯이 손으로 돌려서 시동을 걸곤 했어.” 버스터미널은 중소기업은행 자리로 이전했다가 홈플러스 자리를 거쳐 현재 송현 시대를 맞이했다. ‘대구전기’ 옆에는 70년대 중반 안동에서 유명한 ‘8.15 제과점’이 있었다. 맘모스 제과점이 생기기 전에 중고생들의 데이트 장소였다. 80년대 중반에는 ‘대구전기’ 옆에 숙녀복과 잡화를 주로 취급하는 ‘신라백화점’이 있었다.

1970년 9월 12일, 안동시 삼산동 99번지 대구전기상회(현재 중앙시네마 맞은편) 건물 4층에서 안동방송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처음에는 AM 라디오 중심이었다. 1970년대 후반 ‘별이 빛나는 밤에’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청춘들을 잠 못들게했다. 건물 2, 3, 4층을 임대해서 5년간 방송업무를 수행했다. 1971년 한국문화방송의 가맹사가 되면서 안동문화방송으로 상호를 바꿨다. 이상호는 1980년경 안동 MBC 1기 전속 가수로 활동했다. 돌아가는 삼각지, 비 내리는 명동거리 등 배호 노래를 주로 불렀다. MBC에서 성우 제안이 들어왔다. 매주 일요일 아침 가십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광복 20년 연속 소설 낭독도 했다. 가수, 성우, 춤까지 재주꾼이었던 그는 하회별신굿과 인연을 맺고 인간문화재로 우뚝 섰다. 삼산동을 주름잡았던 그는 무용담을 들려주는 내내 화양연화의 주인공이었다.

 

문화의 거리에 걸맞은 중앙시네마

중앙시네마는 삼산동 문화의 거리 자존심이다.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안동 사람들의 문화 갈증을 해소해 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2000년 8월에 정사영 씨가 개관한 극장을 2014년 2월부터 한철희 씨가 인수했다.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바뀐 건 2009년부터이다. 최근 예술영화 지원 사업으로 감독을 초대하고, 테마별 영화상영과 기획전, 시나리오 입문과정도 진행했다.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서미숙) 

 

집밥 생각날 때는 태함식당 골부리국

 ‘태함식당’은 집밥이 생각날 때 가는 단골집이다. 중앙파출소 뒤에서 임치순 할머니가 53세부터 20년째 운영중이다. 메뉴는 골부리국 하나뿐이다. 반찬도 모두 할머니가 손수 만든다. 사계절 빠지지 않는 반찬이 콩가루 무쳐 찐 부추 무침이다. 토속적인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골부리국 가격은 개점 이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가격이 착한 대신에 한 그릇은 팔지 않는다. 둘 이상은 함께 가야 할머니도 상 차린 보람이 있다니 기억할 일이다. 막내아들(43세)이 요즘 와서 가게를 도와준다. 앞으로 가게를 이어받으려고 배우는 중이다.

“오래 해야 된다고 손님들이 그꾸 나싸. ‘6시 내 고향’에도 세 번이나 소개하라 그는데 아(안) 했어.”

 

문화의 거리에서 서점이 사라지다

 한때 삼산동에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스쿨서점’과 ‘교학사’가 나란히 같은 통로에 있었다. 스쿨서점이 삼산동 중앙파출소 옆 버스승강장 앞으로 옮겼다가 2011년 끝내 문을 닫았다. 55년 전통의 서점, 교학사도 2018년 6월, 삼산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새로 옮겨 간 곳은 남부동으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교학사는 장사숙 사장이 1965년 예천에서 창업해서 안동으로 와서 47년 운영했다. 장남 장우영이 5년 가까이 부친을 도왔다. 장사숙 사장이 돌아가시고 2010년 11월부터 처남 손질걸 씨가 인수했다.

교학사 손 대표는 “서점이 온라인 업체에 이길 수 없어요. 책방 하나 없는 도시는 너무 삭막하지요. 젊은 친구들이 책을 너무 안 읽어요. 책 사러 오는 분들은 연세가 있고 책 읽는 게 몸에 밴 분들입니다. 오십 년이 넘는 가게를 찾아서 스토리를 만들면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시에서는 표시를 해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다.

 

더위가 한풀 꺾일 때부터 찬바람이 불 때까지 수시로 삼산동을 돌았다. 삼산동 터줏대감들과 대를 이어가는 오래된 가게주인, 옛 삼산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삼산동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만났다. 코로나 19 전 문화의 거리에선 깜놀 이벤트도 하고, 버스킹 공연도 했다. 천만 관광객 유치를 위해 플래시 몹 댄스도 했다. 반짝 이벤트는 그때뿐이다. 지속적인 뭔가가 필요하다. 경제가 어려우니 소비가 위축되고 악순환이 거듭된다. 날이 갈수록 거리에는 빈 점포가 늘어만 가니 답답해진다. 자본주의 논리로만 방치하기엔 심각하다. 문화의 거리에 걸맞은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을 해법은 뭘까. 아 옛날이여! 흥성거리던 시내가 그립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9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