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음식열전⑤-낙지연포탕
향토음식열전⑤-낙지연포탕
  • 김순희(방송작가)
  • 승인 2021.06.0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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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을 데워주는 낙지연포탕

집콕의 방구석 레시피

연말연시 가족과 함께 떠나는 밥상 여행

언택트, 랜선 시대다.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집콕의 겨울밤은 길고 무겁지만 그렇다고 방구석 식도락을 멈출 수는 없다. 이 불안과 우울의 터널을 통과하자면 뭔가 입맛, 살맛을 돋우어주는 나름의 비방 하나쯤은 지녀야 할 것 같고. 어쩌면 가장 손쉬운 것이 달콤하고 씁쓸하거나 매콤하고 짜릿한, 맛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콕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가정의 엥겔계수는 계속 치솟고, 앞치마 두른 자의 과업도 갈수록 커져만 간다. 하지만 기온이 뚝 떨어진 겨울 저녁, 매서운 칼바람이 거리를 휩쓸면 우린 망설임 없이 총총거리며 서둘러 돌아간다. 바로 그곳!, 나의 ‘스위트 홈’으로 말이다. ‘식구’라는 이름으로 밥상에 둘러앉은 그 시간이 주는 기쁨과 위로를 생각하면 오늘도 우리의 주방만은 절대 셧다운 할 수 없다.

연포탕_(ⓒ김순희) 

탱글탱글 낙지연포탕, 집콕의 겨울밤을 데워주는 부드러운 식감

엄혹한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온전히 안전한 유일한 그곳. 주방에 뽀롱포로롱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탕이 끓고 있다. 쫄깃쫄깃하고  야들야들한 낙지를 푸릇노릿한 채소와 곁들여 먹는다. 깊고 깔끔한 탕국물을 떠서 얼어붙고 메마른 속으로 내려보낸다. 뜨뜻한 것이 흘러 들어가면 스르르 긴장의 갑옷이 벗겨지고 마음은 금세 촉촉이 젖어든다.

연포탕의 주인공은 낙지다. 기력보충 ‘보양 음식’ 타이틀을 지닌 낙지는 끓는 국물에 오래 두면 질겨지기 때문에 가장 나중에 넣어 재빨리 익혀 먹어야 한다. 낙지의 쫀득쫀득 부드러운 식감도 매력적이지만 연포탕은 역시 깊은 국물 맛이다. 맵지 않은 맑고 시원한 지리 형태의 국물이라면 나트륨 섭취량도 줄이고 부족하기 쉬운 채소도 듬뿍 섭취할 수 있다.

바다 내음 가득한 낙지와 바지락에 시원함을 더해주는 무와 미나리, 배추와 같은 각종 채소가 어우러진 따뜻한 연포탕. 전골냄비를 소형버너에 올려놓고 샤브샤브처럼 먹어도 재미있다. 살짝 익힌 채소와 낙지를 건져 먹으면서 입맛따라 계속 추가하면 된다. 남은 육수가 아까우면 밥을 넣어 간편죽으로 먹거나 칼국수를 넣어 얼큰한 풀코스 대미를 장식할 수도 있다. 물론 고슬고슬 갓 지은 밥 한공기와 톡 쏘는 빨간 김치하고만 먹어도 훌륭한 탕국이 바로 연포탕의 매력이다.

 

두부와 낙지 사이? 연포탕의 비밀

오래전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연포탕을 접하고 주재료가 낙지라는 사실에 좀 놀랐다. ‘연포탕’이란 음식명이 왠지 고급스럽고 멋스러웠다. 맑은 국물요리라는 것도 개인적 기호에 맞았다. 요리법이 지극히 간단한 것도 고마웠다. 하지만 이 낙지탕을 왜 연포탕이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낙지’와 ‘연포’의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다. 경상도 안동 우리 동네는 명실상부 문어의 고장이 아닌가! 크고 작은 집안 행사든 명절이든 빠질 수 없는 문어를 늘상 먹어왔던 토박이 문어 촌민,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탕국으로 문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낙지가 획득한 이 우아한?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그런데 더 의아한 것은 있었다. 연포탕은 사전에 “쇠고기, 무, 두부, 다시마 따위를 맑은 장국에 넣어 끓인 국. 초상집에서 발인하는 날 흔히 끓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초상집에서 먹는 육개장?’ 고개가 갸웃해졌다. 호기심은 더 커졌다. 하지만 한참 동안 그런 궁금증을 가졌다는 것도 잊고 살다가 우연히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두부의 다른 이름이 ‘연포軟泡’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됐다. 원래의 연포탕은 낙지가 아닌 ‘두부탕’이었다. 그리고 연포탕과 구분해서 “낙지를 넣어 맑게 끓인 국”을 ‘낙지연포탕’이라고 따로 설명해둔 것을 보게됐다.

 

조선 양반들의 두부, 연포탕 그리고 연포회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조선 말기의 요리책인 『시의전서』에 ‘연포국’이라는 음식이 나온다. 『시의전서』의 연포탕은 꿩이나 닭고기를 넣고 끓인 국이다. 낙지는 없다. 부드러운 두부인 연포로 끓였다. 안동 오천군자리 탁청정의 김유와 그의 손자 김령이 한문으로 쓴 요리책 『수운잡방』에는 두부 만드는 법이 소개되어 있고, 김령의 일기인 『계암일록』에는 두부 요리 먹는 모임인 연포회에 관한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산 좋고 물 좋은 산사에서 두부 요리를 먹는 ‘연포회軟泡會’라는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연포회 식탁의 메인 요리는 ‘연포탕軟泡湯’이다. 양반들의 특별한 자리, 식도락 여행의 별미를 두부가 차지하고 있다. 물론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연포탕엔 두부는 사라지고, 연포탕은 바닷가 마을의 향토음식이 되었지만 말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연포탕은 주로 닭 국물이나 쇠고기 국물에 두부를 넣어 끓인 두부장국이다. 연포탕이 흔한 두부장국이라니……. 의외였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면 조선시대 연포탕은 양반들의 야외모임을 돋보이게 한 멋스러운 고급요리였다. 두부와 무, 닭과 쇠고기, 북어 같은 식재료는 지금이야 지극히 평범한 식재료들이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귀한 식재료였던 두부가 차지했던 역할을 지금은 상대적으로 비싼 낙지가 대신하고 있는 느낌이다. 원래 두부요리였던 연포탕이 낙지요리가 된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시대가 변하고 사회적 환경과 요구가 달라지면서 오늘의 낙지연포탕까지 오게 되었으리라.

 

랜선모임이 줄 수 없는 포만감. 집에서 여는 뜨근뜨근 연포회

호젓한 산사에서 펼쳐진 양반들의 식도락 문화 연포회가 따끈따끈한 방구석 가족파티로 변했다. 두부와 각종 채소를 담백하게 끓여낸 두부탕이든, 바닷가 향기 머금은 낙지연포탕이든 어떤 선택도 실패는 없다. 건강하게 긴 겨울을 날 수 있는 자력갱생, 영양만점의 밥상 선수들임엔 틀림없으니까. 보글보글 맑은 거품을 내며 끓고있는 탕국을 가운데 두고 가족들의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가 익어간다. 계절의 한기는 물론 관계의 공허마저 채워주는 포근한 평안이 찾아온다. 봄은 아직 멀지만, 기다릴 수 있다는 용기와 꼭 다시 찾아올 거란 희망이 살포시 움트는 것만 같다. 국물 맛이 진해지듯 그렇게 겨울밤이 깊어가고 우리의 기도는 더욱 담백해진다. 일상회복. 소확행.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9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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