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게 더 오래된 이야기 ④-마음의 빗장을 푼다 ‘경안열쇠’
오래된 가게 더 오래된 이야기 ④-마음의 빗장을 푼다 ‘경안열쇠’
  • 강수완(시인)
  • 승인 2021.06.02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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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문들은 모두 열쇠가 있다.

아니다.

닫아걸어야 하는 문들이 열쇠를 지니고 있다.

닫힌 문을 여는 열쇠, 모든 열쇠는 각자의 자물쇠를 지니고 있다.

제 몸에 꼭 맞는 열쇠와 자물쇠.

그 일대 일의 배열이 세포의 염기서열 같은 서로의 법칙이다.

각자의 삶에 열쇠가 있듯이, 마음에 가끔 자물쇠가 있듯이.

 

닫힌 걸 먼저 철컥 여는 일이 열쇠의 존재 이유인지, 열어 줄 무엇이 있는 걸 믿어 언제든 꽉 닫아거는 일이 자물쇠인지, 닭과 알의 일처럼 둘 사이 알 수 없으나 오리무중의 자물쇠 속을 한 방에 무장해제 시키는 열쇠의 일은 대단하다. 속을 들키는 일은 쑥스러우나 속을 통째로 내놓는 것은 오히려 후련한 일이니. 열고 닫는 온갖 것들의 이름을 직업으로 삼아 오래 된 곳이 있다.

주위 병원과 큰 마트의 높은 건물 사이로 혼자 낡은, 모퉁이 가게 겉모습. 6차선 도로 양방향 차들이 암만 씽씽 내달려도 의연한 단층 건물. 잠긴 모든 것들을 열 수 있는 집이라면 모퉁이에 있어도 당당한 일이 합당하다. 겉을 보고 기 죽는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자물쇠의 일이 세상의 몫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채려면 열쇠 집에 가 보면 알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자물쇠 열쇠 한 몸의 일을 한사코 무슨무슨 열쇠로 간판을 올리니, 무릇 열쇠의 일이 으뜸인가 보다. 아무렴. 닫아거는 일 말고 열어젖히는 일이 상책이지. 닫힌 문 안에서는 어둡고 습한 곰팡이가 생겨나기 쉽지만 활짝 열어 놓으면 꽃이 피고 새들이 다녀갈 테니.

 

경안 열쇠

가게 이름에 경안이 붙어, 이 지역 경안과 관계있는 학교 졸업생이냐고 물으니 돌아온 대답이 통쾌하다. 전화번호부에 업종을 물으면 친절하게 안내해 주던 시절이 있었으니, 기역으로 시작하면 다른 열쇳집보다 먼저 가르쳐 줄 것 같아 그리 했단다. 말하자면 경쟁업체를 의식한 생각이었는데 듣자니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의미가 깊은 것은 때로 저렇게 단순한 곳에서 출발하는 일이다.

열쇠 두 개를 주문하고 앉았다. 기계가 열쇠를 가는 동안 불똥이 튀는 걸 바라보았다. 부딪히는 일은 서로 상하거나 튀는 순간이지 싶어 아찔했다. 요란한 쇳소리처럼 서로를 상하게 하는 동안 열쇠처럼 무언가를 얻기도 하겠지만, 서로 편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기에 사는 동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열쇠 한 개에 3천 원. 동네 커피 한 잔보다 싼 값에 열쇠 받아 들기가 민망했다. 저 열쇠 하나로 풀 수 있는 자물쇠의 여문 속을 생각하면 헐한 값이었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일은 정겹다. 한곳에서 만나 서로를 애특하게 바라보는 일. 무심한 간격으로 덜어진 듯, 어느 결에 촘촘히 붙어살아 서로를 닮아가는 얼굴들. 물건에도 각자의 표정이 스며들게 하는 일, 그것이 세월이다. (ⓒ강수완) 

처음부터 열쇳집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태화동 옛 전화국 앞에서 어렵게 마련한 백오십만 원으로 쌀장사를 처음 시작했다. 타이탄 트럭 한 대에 쌀을 가득 실으면 60여 가마니쯤 되었는데 값으로 치면 곱절인 삼백만 원이었으니 쉬운 밑천이 아니었다. 젊은 혈기도 있어 밤낮 열심히 일을 했다. 쌀장사로 돈을 좀 벌어 전업을 생각할 때쯤 축산 바람이 안동에 불었다. 그때 축산에 손을 댔으면 떼돈을 벌거나 망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고 했다. 곰곰 생각하다가 축산보다 열쇳집으로 바꾸었다. 많은 돈보다 안정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많이 벌려면 많이 투자하던 때, 힘들여 번 돈에 빚까지 보태 시작하기에는 고민이 있었다.

밑천이 좀 있는 사람은 안될 때 버티기라도 하는데, 버틸 힘이 부족한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지하는 일이 어려운 건 한가지라는 말에 코로나로 힘든 요즘의 사정이 겹쳐져 쓸쓸했다. 안되는 일이라도 중간에 접으면 장사는 적자라는 말이 돌아왔다. 애 먹는 사람, 그만둘까 고민하는 사람, 그러다가 결국 엎어지는 사람이 생겨도 기어이 붙잡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 요즘에도 맞나 싶어 갸우뚱하니, 그 속내를 알았는지 “우야든동 오래 붙잡고 있다 보면 결판이 나니더” 확신 같은 말이 의심의 꼬리를 냉큼 잘라 주었다.

3년 걸리면 된다는 말. 첫해 견디고 이태 벌어 보태면 된다는 말. 두 번 엎어지다가 세 번째는 일어선다는 말이 경안열쇠 한자리 30여 년 세월을 지탱해 온 힘일까싶었다. 부지런히 한 길만 파다 보면 해결이 난다는 신념 같은 저 말이 요즘의 힘든 시절에 위로가 될까 독이될까 여전히 애매하긴 했지만, 오래 꾸준히 무언가에 집중하여 보살피라는 말로 여겨져 쓴 시절을 보낸 부모님 세대의 교과서 말씀처럼 달게 새겨들었다.

축산에 손 댄 사람들은 전성기를 지나 파동이 왔다. 공급은 많고 수요는 줄어 여럿이 도산하는 걸 봤다. 눈뜨면 고등어 한 손에 오백 원, 돼지 한 돈도 오백 원이라는 한탄이 술자리에 돌던 시절이었다니 “그 파도를 못 견뎠으면 망하고, 용케 살아남아 자리 잡은 사람은 나중에 큰돈 벌지 않았을니껴.” 얼굴의 주름이 먼저 웃었다. 짧은 밑천이 그나마 그때는 다행이었다. 미련이 없냐고 우둔하게 물으니 사람 살 길은 따로 있는 거 같다며 지금의 자리에 열쇳집을 열어 여태까지 살아온 일이 오히려 평탄했다 한다.

넉넉지 않은 5백만 원으로 시작한 열쇳집은 그럭저럭 만족한 삶을 누렸다.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시대를 막 지났기에 집집마다 맞춤형처럼 둘만 낳던 시절, 그래도 딸 둘에 아들 하나는 두고 싶어 연년생 내리 셋을 낳아 다복한 집을 만들고 꾸려오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마침 영월 사는 맏딸한테서 온 안부전화에 함박꽃이 폈다. 자식은 커서 늙은 부모의 울타리 일부가 되는 모양이었다.

 

안동에는 오래 된 열쇳집이 세 군데 있다

경안열쇠, 안동열쇠, 국제열쇠가 그곳인데 그중 국제열쇠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천리천 복개도로 안에서 열쇠 업을 시작하여 이 지역 열쇠 업의 맏이 노릇을 하던 국제열쇠 주인은 지금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안동도 경기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열쇠 업으로 자리를 얼른 잡았다 하니 성실하게 일해 반짝 시절을 잘 탄 모양이었다. 흑색 전화기 몸통에 붙은 손잡이로 태엽을 감듯 돌려 걸고자 하는 번호를 말하면 그곳으로 회선을 연결 해 주던 전화 교환원을 거친 후 통화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시절, 흑색 전화기보다 몸값이 나가는 백색 전화기와 청색 전화기가 대접 받던 무렵, 무려 거금 백사만 원을 주고 백색 전화기를 샀다. 투박한 흑색 전화기조차 집집마다 귀하던 때였다. 그때 전화기 가격을 아직 또렷이 기억하는 비결을 묻자 크게 웃었다.

“아, 비싼 전화기 산다고 내심 어깨에 힘 잔뜩 주어 끝다리 사만 원을 아무리 깎아 달라고 해도 전화국에서 안 깎아 줍디다, 긴급전화가 한 달 요금 이만 이천 원 하던 때였으니 얼마나 비쌌는지 생각 해 보소.” 긴급 전화 2년 사용하면 청색 전화로 바꾸어 주던 시절, 아직도 자랑 말에 힘이 들어 있다. 백색 전화는 전화국을 거치지 않고 개인끼리 서로 명의를 양도할 수 있는 일종의 재산 개념의 전화기였다. 그때의 중, 고등학교 공납금이 십만원 정도 안팎이었으니 뿌듯함이 실리기에 맞춤이었다.

요새 별 손님이 있니껴, 말과는 달리 드나드는 출입문이 가끔 열리고 열쇠를 복제하거나 도장을 파는 사람이 오갔다. 열쇠 한 가지 일을 하기엔 무리가 있어 도장 새기는 일을 겸해 한 지 몇 년 되었다. 열쇠나 도장이나 기계가 하는 일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열쇠 아니면 도장이라니 성업의 시대는 아닌 듯 했다. 열쇠로 여닫는 시대가 지나고 전자식으로 바뀐 요즘 한번 손이 오면 단가가 나가는 물건을 팔기도 하지만 재미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나마 출장으로 수입을 유지하고 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은빛 열쇠가 빛을 냈으나 구석구석 손때 묻은 물건들이 지난 시절을 오래 간직하고 있어 가게 안은 얼추 조화로웠다.

시간이 흐르는건 저렇게 처음의 이름표를 닳게 하여 순해지는 일이다. 갈수록 쓸데없는 힘을 빼고 한자리에 고요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일이다. 아직도 할 일이 많고 갈 곳이 많아 바쁘다는 건, 오롯이 내면을 들여다 볼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일이다. 오래된 것은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명해지는 것이다. (ⓒ강수완) 

국제열쇠와 안동열쇠에 비해 늦게 출발한 경안열쇠로서는 판매 전략을 바꾸었다. 두 가게보다 조금 싸게 파는 것. 먼 거리도 마다않고 달려가는 것. 무엇보다 부지런한 것. 안동과 인근 지역에 소문이 나자 꽤 잘 되었다. 찾는 이가 점점 많아지고 욕심 없이 먹고 살았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동네의 사랑방처럼, 장사로 뼈가 굵어진 사람들이 자주 들렀다가 한가로이 놀다 간다. 신시장의 총각상회하면 채소로 꽤 잘나가던 가게였는데 그 총각이 이제 머리가 허연 노인이 되어 일부러 들렀다. 한창 장사할 때 근방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경안열쇠 사장에게 그만 두 번째로 밀려났다는 농 아닌 진담을 들으니, 버티고 견디면 좋은 시절 온다는 장사 철학이 얼마간 짐작되었다.

강변을 한참 걸었으나 여기에 들렀다 가야 하루가 마무리 된다며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싹싹한 경안열쇠 안주인이 얼른 봉지커피를 대접했다. 사랑방에 드는 손님만으로도 겨울 오후 열쇳집은 평화로웠다. 근방 사람들의 마음의 빗장을 풀어 인정과 인심을 얻고 사는 장사야말로 경안열쇠의 오래된 철학이 아니었을까?

마음 한자리 풀지 못해 허전한 각자의 자물쇠와 열쇠를 생각해보는 겨울 오후, 철커덕 열쇠 돌리는 소리가 그립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9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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