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한에 대한 단상
김준한에 대한 단상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0.12.1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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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 최성달 (작가)

 

최성달 작가

 단상 1
#1 김준한이 안동에 내려온 건 지난해 초였다. EBS국장을 거쳐 한국콘텐츠진흥원 전략기획본부장을 끝으로 낙향한 것이다. 한참 물이 오른 절정의 시기에 고향으로 온 그는 문화의 불판을 바꾸어야 한다며 외치고 다녔다.

#2 나는 그의 외침이 혹여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울부짖는 외침이 아닌지, 궁금하여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그의 집을 방문하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과 귀가 밝아 메시아를 점지하는 예언자를 알아볼 수만 있다면 예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 진 것도 이때쯤이다.

#3 그때쯤 나 또한 생각하는 바가 있어 한 무리의 문화 일꾼을 모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의 정체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로 판명이 났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그를 시기하고 견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 또한 알량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바리새인처럼 그를 멀리하기에 급급했으나 뜻있는 자의 삶이 그러하듯 견제의 수단이 교묘해질수록 그의 성은 더욱 공고해지고 높아가기만 했다. 

단상 2
#1 요즘 새삼 새로운 말은 언젠가 서수용 한국고문헌연구소장이 내게 했던 말이다. (안동이) “진정한 한국정신문화의 수도가 되려면 상주 출신의 김병일 기획 예산처 장관이 도산서원 선비수련원 원장을 하는 것처럼 안동에 인물이 몰려야 합니다.” 당시 김 전장관은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을 하기 전이었고 선비수련원이 평생교육기관으로 전국 최고가 되는 데는 그의 영향이 지대했다.

#2 기억하기로 대구가톨릭대학 서양학과 배용균 교수가 안동 봉정사를 배경으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란 영화를 만들어 1989년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달마를 동쪽으로 부른 인물은 누구였을까?.....배용균은 왜 안동으로 왔을까?

#3 도도한 역사가 거대한 것 같으나 실은 처음이 미미한 것처럼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은 몇 사람이 여관방에서의 토론으로 출발했으며 피카소와 고갱, 고흐의 위대한 출현은 세잔의 회화에 대한 열정(말)으로 빚어진 일들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문장이 격조와 고적함을 담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구양수라는 거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음악 장르의 한 축인 오페라의 탄생은 이탈리아 피렌체 사람이었던 조반디 데 바르디 공작의 헌신에 힘입은 바가 크다. 피카소와 고흐, 고갱을 모르고선 미술사를 논할 수 없고 구양수의 그늘과 문전에서 성장한 증공, 소식, 소철을 알지 못하곤 시인 묵객이라 할 수가 없으며 바르디 사랑방을 드나들었던 소위 바르디 써클 멤버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 음악사를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4 역사는 미미한 관점에서 무엇을 포착한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 예가 부지기수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 하는 물음도 마찬가지다. 한미했던 다음이 서울에서 제주도로 옮기고 난 뒤 야후와 천리안, 네이버, 구글 등 쟁쟁한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창대해진 이유와 같은 것이다.

#5 안동은 원형문화의 보고다. 전 세계적으로 안동만큼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문화의 구조 속에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도 드물다. 이제는 이것을 콘텐츠로 연결해야 하는 시점이다. 달마가 인도에서 쇠퇴해진 불교를 다시 한 번 중흥시키기 위해 동쪽인 중국으로 가 원대한 포부를 이루었듯 김준한은 한껏 물오른 기량을 가슴에 담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거의 1년도 안된 시기에 ‘450년 사랑’, ‘락 나라를 아느냐’, 두 편의 실경 뮤지컬로 문화적 패러다임이 지역 전체의 불판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6 김준한은 이러한 김준한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이제 곧 애니메이션 ‘엄마 까투리’를 선보이고 대형뮤지컬 ‘노국공주’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실존적 위치와 비중을 정립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일까? 아니면 예수의 형태일까?.........해답은 아무도 그것을 강요하거나 요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세례자 요한이 아닌 예수를, 구양수가 아닌 소식을 세잔이 아닌 피카소를 바르디가 아닌 카치니를 조훈현이 아닌 이창호가 되고 싶다면 먼저 그의 열정에 고개를 숙이고 볼 일이다. 안동에 온 이유부터 물어볼 일이다. 구구절절 이설 다는 시간에 그의 사랑방에서 조신하게 배우고 익히고 볼 일이다. 육조 혜능의 권능이 교조 달마로부터 시작되었듯 문화적 유전자의 영속성 또한, 눈 밝고 정열을 바치는 사람을 통해 영원성을 확보하는 것이리니 이제 그대가 그 주인공이 되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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