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여름- 그해 여름
기획특집 여름- 그해 여름
  • 김원길(시인)
  • 승인 2021.10.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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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가리 이야기

지금은 임하댐이 생겨서 임하호라 부르지만 수몰되기 전에는 반변천이었던 내 고향 마을 ‘지례’의 앞강.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구비구비 삼백리를 자갈돌과 바위 위를 흘러내린 강물은 어찌나 맑았던지 마을에선 그 물을 길어다 먹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버들치, 은어, 쏘가리 같은 일급수 어종들이 많았다. 강촌에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헤엄을 잘 쳤고 여름이면 마을 아이들과 작살을 들고 물속에 들어가서 곧잘 고기를 찔러 내 오는 게 일과이기도 했다. 물안경을 끼고 깊은 물속 싸늘한 냉기를 느끼며 커다란 바위 틈새를 기웃거리다보면 큰 방어만한 쏘가리가 표범 같은 얼룩무늬를 하고 바위에 몸을 붙인 채 미동도 않거나 정지한 잠수함처럼 물속에 떠서 아가미, 지느러미만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러나 아주 침착하게 다가가서 정확히 아가미 바로 옆을 겨누고 작살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잘못 꼬리 쪽을 쏘았다가는 작살을 매달고 달아나 버린다. 작살이 몸통을 관통해도 큰 녀석이 필사적으로 버둥대다보면 고기가 빠져 달아나 버리는 수도 있어서 찌르는 즉시 작살을 강바닥 자갈모래에다 쑤셔 박아야 숨이 다해서 올라오는 것이다. 밖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은 내가 빈손으로 올라오는 이유를 금방 알아차리고 곤두박질쳐 들어가서 작살과 고기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한 해 여름, 나는 동네 윗쪽 깊은 소에 들어가 무려 세 뼘 반이나 되는 쏘가리를 찔러서 작살에 꿴 채 등에 메고 돌아 왔다. 자로 재어보니 72센티였다. 마을 사람들 말이 이제까지 본 것 중에 제일 크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난봄에 우리가 잡은 게 더 컸던 거 같애”했다. 동네 머슴 용이였다. 

늦은 봄날 동네 아이들이 강가에 떠내려 온 무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가다가 저만치 얕은 물밖으로 둥근 나무토막이 보여서 용이가 먼저 “저 나무 내 꺼”하고 달려갔단다. 가까이 가보니 젖은 나무토막이 아니라 몸통을 반 쯤 물밖에 내놓고 슬금슬금 움직이는 커다란 쏘가리 아닌가! 용이와 일행들이 지게 작대기로 두들겨 패고 발로 차내서 잡았는데 지게에 올려 놓으니 고기가 하도 커서 지겟가지 안쪽으로 쳐지는 게 아니라 지겟가지 밖으로 휘어졌다는 것이다. 자로 재보진 않았지만 내가 잡은 것보다 컸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잡진 못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놈을 봤어.”

맨 손으로 자라 잡는 ‘자라 형사’ 종걸이가 끼어들었다. 

"띠웠구나! 원래 띠운 고기 굵다잖아.”

“아냐, 무서워서 그냥 나와 버렸어. 폭포 밑에 내가 가끔 헤엄쳐 통과하는 바위틈이 있는데 그게 막혀 있길래 손으로 밀어 보니 미끌미끌한 거야.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물러나서 보니 돼지만한 쏘가리가 나를 보고 있는데 내가 들고 있는 작살이 겨우 젓가락만 한 거야. 나 살려라하고 헤엄쳐 나와 버렸지.” 

내가 잡은 72센티 쏘가리가 삽시에 3등이 되어 버렸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쏘가리는 최대 65센티까지 자란다고 되어 있었다. 인터넷도 우리 동네 쏘가리가 얼마나 큰지 몰랐던 거다.

서울서 횟집 칼잡이를 했다는 박씨가 회를 뜨며 “여기서 쏘가리 회 먹은 후 바닷고기 회 먹었더니 영 싱거워 못 먹겠더라우.” 했다.수몰 전 우리 동네의 여름나기는 지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터를 잡고 안빈낙도하셨던 내 선조)의 시구가 떠오른다.

물 깊은 데 쏘가리 살쪄 있으니
이러메 내 생애 흡족한 것을
江深鱖魚肥하니 
此間生涯足이라

江深鱖魚肥(강심궐어비) 此間生涯足(차간생애족) -편집자

1976년 임하 내앞마을 개호송 앞 ⓒ김호

나 홀로 래프팅

강가에 살다보면 가끔 배나 뗏목를 타고 여울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 보았으면 하는 동심이 생길 때가 있다. 문제는 내게 배가 없다는 것과 떠내려가긴 쉬워도 여울을 거슬러 돌아올 수가 없으니 실행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마침내 바람 넣는 고무보트 하나를 갖게 되었다. 노가 딸려 있어서 강을 건널 수 있고 고기잡이 그물을 치거나 앞산에 송이버섯을 따러 갈 때 요긴하게 쓰였다. 바람을 빼면 부피가 줄어 자루에 넣어서 메고 올 수가 있으니 이제까지 꿈만 꾸어오던 급류 타기가 가능해졌다. 

폭우로 홍수가 나서 탁류가 개가 차게 흐르던 그해 여름, 도로가 물에 잠겨 마을이 고립되었으니 이런 때 이걸 타면 출근도 될 것 같았다. 드디어 나는 마을사람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노란색 고무보트를 급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빠삐용! 야자열매를 넣은 푸대를 타고도 바다를 건너던데 상어가 있는 것도 아닌 강을 흘러내리는 것쯤이야!

어릴 적 읽은 실러의 『빌헬름 텔』에서 포악무도한성주를 죽이고 도망치는 마을 사람을 피신시키느라 텔이 폭풍우 속에 배를 저어 호수를 건너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로버트 미첨이 뗏목을 저어 급류를 따라 내리는 장면도 떠올리며 힘차게 노를 저었다. 

쏜살같이 흘러내려 아랫마을 앞을 지나면서 보니 물 구경 하러 나온 마을 사람들과 동네 개들이 노란 보트 위에 양복차림으로 우산을 쓴 나를 보고 매우 놀라는 기색이었다. 

“놀래렴. 너희 마을에 대안도戴安道같은 친구만 있어도 나는 더 내려가지 않을 거야”

1961년 낙동강에서 ⓒ임영대

사실 나는 그 무렵 중국의 고사古事 하나를 읽었다.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王輝之가 산음이란 강마을에 살 때 어느 폭설이 내리는 밤의 일이다. 흥을 이기지 못해 술을 마시며 시를 읊다가 문득 하류에 사는 친구 대안도가 생각이 나서 작은 배를 저어 친구네 동네까지 갔다가 날이 밝자 친구를 만나지 않고 돌아왔단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은 즉 “나는 내 흥에 겨워 갔던 거지 굳이 대안도에게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이 일화야말로 사람이 인생을 즐기는 지혜를 귀띔해 주는 대목 아닌가! 나는 도연폭포 위쪽에서 내려 헌옷으로 갈아입고 폭포 밑으로 배를 지고 내려가서 다시 보트에 올랐다. 배는 쏜살같이 흘러내렸다. 악새마을 앞 잠수교 위로 물이 넘쳐 배가 날아가는 듯했다. 곧이어 커다란 암석들이 여울에 즐비하게 깔린 선창이란 데서 물살이 바위를 넘을 땐 마치 서부영화의 로데오같이 껑충거려 우습기도하고 스릴이 넘쳤다. 그러더니 보트가 바위 사이에 꽉 끼여 꼼짝도 않는 것이 아닌가. 도리 없이 보트를 내려 헤엄을 치며 뒤로 당겨내느라 애를 먹었다. 

격랑의 협곡을 빠져 나오자 이번엔 넓디넓은 강폭이 나타나고 물이 넓게 퍼져서 흐름을 멈춰 버리는 게 아닌가! 이렇게 되면 보트가 흘러가지 않아 팔힘으로 노를 저어야만 한다.

지칠대로 지친 나는 그만 노젓기를 멈추고 우산을 펼쳐 해를 가리고 뱃바닥에 누워버렸다. 물결과 바람에 배를 맡겨 버렸다. 

“청풍淸風은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波는 불흥不興이라.” 읊조리며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눈을 떠보니 국도변 몽선각夢仙閣바위 밑에 멎어 있었다. 망천까지 30리를 다 온 것이었다. 다시 옷을 양복으로 갈아입고 보트에서 바람을 빼서 자루에 접어 넣어 짊어지고 국도로 올라 가 안동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수몰이 되지 않았더라면 해마다 홍수철에 한두 번은 ‘나 혼자 래프팅’을 즐겼을 것이언만 이젠 댐이 생겨 여울이 없어지고 유속이 없으니 다시는 그 호쾌한 물놀이를 할 수가 없어졌다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11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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