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여름- 참외 이야기
기획특집 여름- 참외 이야기
  • 김용락 (시인)
  • 승인 2021.10.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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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는 수박과 함께 대표적인 여름 과일이다. 

7~8월 뜨거운 뙤약볕 아래 노랗게 잘 익은 참외를 따서 시원한 우물물에 담가뒀다가 깎아먹는 그 달콤한 맛은 오랫동안 우리의 미각을 황홀하게 만든다. 특히 보리타작을 하는 중 잠시 흙 담 그늘에 쉴 때 옷에 붙은 보리 까끄레기를 털어내고 타작한 보리짚단을 깔고 앉아 조선낫으로 깎아 먹는 그 참외 단맛은 일품이다. 

간혹 배꼽이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푸른 얼룩이라도 진 개구리참외라도 얻어걸리는 날의 기쁨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이런 풍경은 지난 1960~70년대 풍경이다. 이제는 아득한 저 옛날의 추억일 뿐이다.

예안 수박밭 ⓒ이태원

요즘은 먹을 게 흔전만전 넘쳐나서 과일뿐 아니라 소고기조차 귀한 줄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계절과일이라는 의미가 퇴색되었고, 마음만 먹으면 사시사철 맛난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에도 비닐하우스 참외나 딸기를 먹을 수 있는 현실이 되었으니, 이게 과연 인간들에게 복인지 화인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 여름과일 중에 참외를 좋아하는 편이다. 세간에는 “참외는 잘 먹어야 본전이다”는 말도 있는데, 왜 이런 말이 회자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외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는 과히 섭섭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요즘은 도시의 경우 백화점이나 슈퍼마켓, 전문 과일가게에 가면 언제든지 참외를 살 수 있다. 그러나 옛날(1960~70년대)에는 시골에서 원두막이 있는 참외밭에 가야만 참외를 살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안동시내에서 50여 리 정도 떨어진 단촌면 소재지인데 참 아름다운 곳이다. 동네 뒤에는 달봉산이라는 반달을 엎어놓은 형상의 동그란 산이 있는데 정월 대보름날에는 그 꼭대기에 올라가 둥근 보름달이 뜨는 것을 보고 마른 소똥을 피워 깡통을 돌리고 청솔가지를 꺾어 쌓아놓고 연기 자욱한 달집을 태우기도 했다. 마을 앞에는 금산錦山이라는 한자로 비단 금자와 뫼 산자를 쓰는 아름다운 산이 있다. 그 밑으로 눈썹 형태의 옥빛처럼 맑은 미천眉川이 굽이쳐 흘러가는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풍수가 뛰어난 마을이다.

1972년 의성 단촌의 과수원 ⓒ권희은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5번 국도가 나 있어서 버스와 트럭이 대구에서 안동을 거쳐 멀리 태백까지 수도 없이 지나가고, 동네 앞의 미천을 가로질러 부산에서 서울 청량리역까지 연결된 중앙선이 있어서 하루 수십 번씩 기차가 굉음을 울려 잠든 마을을 깨우며 지나가곤 했다. 마을 한복판에는 유서 깊은 초등학교가 있어서 수령이 오래돼 마치 신목神木 같은 은버드나무 두 그루가 위엄을 뽐내며 봄마다 향기로운 꽃과 열매로 어린 꼬맹이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노년이 다된 지금 생각해봐도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겹고 신성한 기운이 넘쳐나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니까 아마도 예닐곱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1963~4년 무렵인데, 당시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100달러 될까 말까하던 시절이었다(참고로 2021년 현재 약 3만 2천 달러). 지금 세대들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참외나 수박뿐 아니라 사과 같은 과일을 살때도 시골에서는 물물교환이 가능했다. 가령 보리 몇 되에 참외 몇 개, 쌀 몇 되에 사과 몇 접 하는 식으로 농촌에서는 곡식과 과일을 맞교환기도 했다. 그만큼 시골에는 돈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동네는 당시 100호가 넘는 제법 큰 동네여서 웃마(을), 중간마, 아랫마라고 같은 마을이라도 주로 나눠서 놀았다. 나는 중간마을에 속했다. 어느 날 나는 동네 친구들에게 제의했다. “야 우리 햇보리 가지고 가서 참외 사먹자. 저기 달봉산 너머 골 안에 참외밭이 있다 하더라”면서 친구들을 꾀었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다 동의를 해서 각자 자기 집에 가서 막 타작해둔 햇보리를 한두 되씩 보자기에 싸거나 광목천으로 된 밀가루 부대에 넣어서 왔다. 마침 여름 타작을 하던 때라 집집마다 방앗간에 가서 빻지 않은(도정 하지 않은) 보리를 가지고 모일 수 있었다. 이 중에는 농사를 짓지 않는 집이 있어서 그런 아이들은 그냥 빈손으로 모였다. 우리 동네는 초등학교가 있고 경찰 지소가 있고 작은 다리 하나 건너면 면사무소와 기차역이 있는 시장터가 있어서 교사나 공무원 혹은 상업하는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다. 그리고 철도와 국도가 있어서 교통이 편리해 외지 뜨내기들이 와서 잠시 살다 가기도 하는 그런 특성이 있는 시골이었다.

한학에 밝은 동네 동장 집 아이, 아버지가 교사인 집 아이, 시장에서 고추 장사를 하는 집 아이, 스님이 환속해 중네 집이라 불리는 집 아이, 도박꾼 집 아이 등등이 모여서 골 안에 있는 참외밭으로 향했다. 구루마가 다니는 큰길을 통해 가려면 동네와 뒷산을 빙 둘러서 한참을 가야해서 우리는 좀 힘이 들긴 해도 지름길인 동네 뒷산 달봉산을 넘어서 가기로 했다. 타작한 보릿자루를 어깨에 메고 지게작대기 같은 막대기를 들고 병정놀이 하듯 일렬로 줄을 서서 산을 넘어서 가파른 골짜기를 한참 내려가 드디어 바닥에 있는 큰 참외밭에 도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참외밭의 원두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키는 주인이 없었다. 어린 꼬마들은 얼씨구나하면서 주인이 없는 참외밭을 마치 자기 집 밭인 양 밭이랑에 들어가 참외를 마구 따고 밭가에 심어 놓은 수박넝쿨에서 수박마저 따고 있는데 멀리 건너편 산 속에서 일을 하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야! 이놈들아, 거기 모두 섰거라” 하면서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혼비백산 참외고 수박이고 다 버리고 왔던 곳으로 다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가파른 산을 헉헉거리며 오르면서 보니 주인아저씨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우리들은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 앉아 다 못 먹고 두고 온 참외와 수박에 대한 아쉬움과, 도망칠 때의 무용담을 깔깔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1974년 낙동강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신분조

그런데 동네에 들어오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도로가에서 상업을 하며 살고 있는 친구집 앞에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 그날 참외 사러 간 친구들 어머니가무언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단 한 명의 아이 어머니만 없었다. 그 아이 이름은 명수인데 평소 ‘맹꽁이’라고 불리며 우리 사이에서도 약간 하대를 받던 친구였다. 뜨내기 집 아이로 얼마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온 아이였다. 소문에는 아버지가 도박을 하다가 징역을 살고 읍내인 자기 동네에서는 부끄러워 못 살아서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고 어머니가 계모라고 했다. 3형제가 함께 있었는데 막내아들만 자기 아들이고 위에 두 명은 전처의 자식이라고 해서 늘 구박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실제로 맹꽁이 형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당시 말로 ‘오입’이라고 부르던 가출을 해 객지로 나가 소식이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산속에서 웃고 놀던 사이 참외밭 주인이 우리 동네에 나타나서 어머니들을 모아놓고 한참 항의를 하고 간 뒤였다. 주인은 멀리서도 우리가 누구네 집 아이라는 것을 알아봤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먹을 만큼 몇 개 정도 따갔으면 문제를 삼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참외밭을 마구 헤집고 다녀 참외 순을 밟아서 다 망가뜨려 변상이 필요하다는 게 항의의 요지였다.

재발 방지를 위한 것인 듯 어머니들은 평소와는 달리 딱딱한 표정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절대 안 된다는 요지의 훈계를 하신 것 같다. 그러면서 이 더운 여름에 멀리 산 넘어 참외밭에 가자고 주동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캐묻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그 주인공으로 맹꽁이를 지목했다. 사실 맹꽁이는 우리보다 두 살이나 많은 친구인데 부모가 제때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아서 미취학 아동인 우리와 어울려 놀았다. 당시에는 한두 살 묵혀서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게 시골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어머니들이 끌끌 혀를 차면서 문제가 다 명수 때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나는 ‘그게 아닌데, 내가 가자고 주동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가자고 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했지만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워낙 어머니들의중론이 확신에 차 있었고 그런 어머니들의 중론을 깨트리면 어머니들이 얼마나 무안할까? 하는 생각과 구태여 내가 가자고 했다고 해서 그 비난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잠시 참으면 모든 게 끝나는데 하는 생각들이 교차했던 것 같다. 내가 먼저 가자고 했다는 말이 입안에서 뱅뱅거리는 사이 상황이 끝나고 다들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나는 맹꽁이를 보면 괜히 미안해 더 잘 해주고, 나한테 생긴 주전부리도 나눠 먹고 했다. 몇 년 후 맹꽁이네 가족은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

내 생애 최초로 느낀 양심의 가책이 바로 이 참외 사건이었다. 그 이후 성인 되고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됐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이따금씩 하면서 정직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내 자식에게도 가장 강조하는 것이 정직이다. 정직하면 곤경에 빠졌을 때도 하늘과 이 사회가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면서 나 자신부터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가 없다. 

이 오래된 이야기를 쓰고 보니 이미 모두 고인이 되신 당시의 젊은 어머니들이 특별히 자기 자식만 사랑하고, 가난한 집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은 이기적인 어머니로 비칠까봐 걱정된다. 그런 건 아니라고 변명해드리고 싶다. 모든 게 평온하고 순박했던 그 시골 마을에 애지중지하던 자기 아이들이 결과적으로 참외서리를 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읍내에서 살다 
맹꽁이 가족의 평소 과격한(?) 행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쪽으로 생각들이 모여지게 했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되기도 한다. 아니면 좀 더 차분하고 철저하게 사태의 원인을 발본색원하는 근대정신이 부재한 시골 어머니들의 지성 탓일까? 지금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모두가 그리운 어머니들이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흘러 내가 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문학 강연을 다니던 때 였다. 대구지역의 모 철학회로부터 문학과 철학에 대한 강연을 요청받아, 강연 장소인 동해안 구룡포에 있는 K대학 수련원에 간 일이 있다. 직장을 마치고 저녁 무렵 대구 동부정류장에서 포항행 시외버스를 타고 포항 시외버스정류장에 내려 거기서 다시 버스나 택시를 타고 구룡포 읍내에 들어가야 했다. 포항에 도착하자 이미 날이 많이 어두웠고 강의 시간에 급하게 쫓기게 되었다. 마침 비마저 흩뿌리기 시작해 더욱 혼잡한 버스정류소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날뛰는데 저쪽에서 어떤 삐끼가 구룡포 몇만 원! 하면서 연신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쪽으로 뛰어갔더니 그 중년의 삐끼 사내가 어딘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아! 명수, 바로 맹꽁이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삶의 풍상을 겪은 지친 얼굴이었지만 분명 어릴 적 명수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때 택시기사가 와서 어서 타라고 나의 소매를 이끌었었다.

택시기사의 채근, 갑자기 내린 비, 급박한 강의 시간이 나의 발길을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못 하게 했다. 엉겁결에 택시에 타고 나서도 나는 못내 아쉬웠다. 당신 혹시 어릴 때 어떤 곳에 산 적이 있느냐고, 어릴 적 별명이 맹꽁이인 적이 있느냐고, 그 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냐고……. 나의 이런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택시는 비포장 길을 마구 달려 내 강의 시간을 겨우 맞춰주었다. 나는 그날 문학과 철학에 대해 어떤 고담준론을 했는지 크게 기억에 없다.

맹꽁이 아니 명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내내 가득했으니, 아니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내내 생각이 가득했으니.

 

* 이 기사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계간지 『기록창고』 11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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