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드로잉 ⑩
메모리 드로잉 ⑩
  • 김상년(서예가)
  • 승인 2021.12.0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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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은 왜 노점이 아닐까?

‘노점露店’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이슬상점’이 된다. 친근하고 예쁜 이름이다. 이슬이 맺히는 물체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이슬은 속 보다는 겉, 안 보다는 밖에 주로 생긴다. 겉이나 밖에 생긴다는 것은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다는 말이다. 따라서 ‘노露’의 기본 성질은 겉이나 밖, 나아가 드러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점店’의 ‘엄广’은 사방의 벽면 중에 한쪽 벽이 밖으로 트여있는 건축물을 의미하며 트여있는 방향으로 전을 펼쳐놓고 공간을 차지한占 가판대 형식을 뜻한다.

종합해보면 ‘노점’은 사방이 드러난 밖에서 전을 펼쳐놓고 물품을 판매하는 형태와 한 면이 트여있는 건축물에 의지해서 물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노점의 의미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첫째로 ‘로露’를 단순히 이슬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글자에 내포된 자의字意를 유추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노점에서 쓰인 ‘점店’의 의미가 이미 일정한 건축물 내에서 장사를 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사방이 터진 길가에서 장사를 하는 모습과는 동떨어진 느낌이 있다. ‘밖에서 장사하는 가게’에서 ‘로露’의 ‘드러난다’는 의미는 수용 가능하나, ‘점店’의 의미는 단순히 ‘판매’를 나타낸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글자의 조합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노점露店’이라는 말이 조선 말기 이전에는 없었던 단어로 우리말과 글 속에 침투한 수많은 일본식 용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노점의 의미로 ‘길 한 켠을 차지하다’의 ‘노점路占’과 ‘길 한 켠을 차지하고 장사를 하다’의 ‘노점상路占商’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한자어 표기를 새로 할 필요는 없겠지만 굳이 쓰자면 노점路占을 사용하던지 난전亂廛을 대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노점을 우리말로 ‘한데 장사’라고 한다. ‘한데’는 건물 밖의 사방이 터진 곳을 말하며 그곳에서 하는 장사를 ‘한데 장사’라고 한다. 지금의 한데 장사는 조선시대의 ‘난전亂廛’에 해당한다. 조선초기의 시장은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육의전六矣廛과 시전상인들에게 상품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난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17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로 거리마다 난전이 성행하였을 때 시전상인들은 나라에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요청하여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권을 지키며 난전의 활동을 관리했다. 나라에 세금을 내고 장사하는 상인들에게 그렇지 않은 상인들을 관리 감독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지금의 한데 장사는 대도시와 지방 소도시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서울, 경기지역의 한데장사는 나라에 허가를 받아 운영하기도 하고 권리금과 자릿세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하기도 하며 ‘전국노점상총연합’을 만들어 현대판 금난전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 만큼 돈이 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지방 소도시들의 한데 장사는 간혹 지자체에서 허가를 내주는 경우도 있지만 극히 드문 일이다. 세금을 정상적으로 내며 힘들게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한데 장사 하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판이다. 심지어는 가게 앞에 자리를 내어주고 커피도 나눠 마시며 가게주인이 텃밭에서 키워온 채소들을 한데 장사 하는 할매들이 대신 팔아주기도 하는 요상한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데 장사의 장점은 평소 다니는 길에서 물품을 구매할 수 있어 접근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퇴근길 집 앞에서 그날 필요한 식재료들을 장만할 수 있고, 근거리에서 키운 갖가지 채소와 과일 등 일명 로컬 푸드를 유통마진 없이 바로 구매할 수 있어 대형마트보다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조세제도에 어긋나 시장 질서를 조금 흐리게 한다는 점, 글로벌시대에 원산지를 확신 할 수 없다는 점, 먹거리의 종류에 따라 위생의 문제가 조금 있을 수도 있다는 점, 섭취 후 탈이 났을 때 모두 구매자의 몫이 된다는 점이 있지만 가장 힘든 단점은 믿고 샀는데 믿음을 저버린 것에 대한 배신감이다. 
대로변에서 한데 장사를 하는 할매들을 찾아가 원고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일명 골부리 할매로 통하는 박씨 할매가 “내 같은 사람 어디다 올릴라꼬?” 하신다. “책에 실을라꼬요” 하니 “우리 같은 사람은 그리면 안돼! 위험해!” 하신다. “얼굴은 안 나오게 그릴게요” 하니 “다 늙은 얼굴인데 뭐 할라꼬~” 하신다. 단속이라도 나와서 소일거리 없어질까 하는 염려와 젊은 시절 꽃다웠던 모습도 아닌데 얼굴을 그린다고 하니 한참 부끄러우셨던 모양이다. 할매들 살아온 얘기 봉다리 넘치게 꾹꾹 눌러 담고, 도라지, 더덕, 깐마늘 각각 한 봉다리씩 꾸역꾸역 눌러 담아 일어섰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대로변 또는 골목길, 행사장, 등산로, 역이나 터미널 등 곳곳에 한데 장사꾼들이 길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허투루 전을 펴고 있는 장사꾼은 없다. 아파트 단지 옆 대로에서 갖가지 채소를 판매하는 장씨 할매는 그날 아파트 단지 사람들의 식탁을 책임진다. 할배가 심어놓은 대추나무 세 그루가 얼토당토않게 많은 결실을 맺었다며 대추청도 담가보고 정과도 만들어 보았지만 그 양을 주체할 수 없어 구처 없이 한데 장삿길에 올랐다며 따뜻한 거짓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안씨 아지매, 어버이날이 없었을 때 태어나 부모님 가슴에 꽃 한번 달아 드리지 못했다며 학교 앞에서 카네이션을 파는 아저씨, 수능시험 날 시험장 앞 엿장수 아저씨, 문방구 앞 달고나 아저씨 등 수많은 할매와 아저씨, 아지매들은 길 한 켠을 책임져 왔다.

나라의 부강이 먼저여야 했던 시절 길바닥에 좌판을 깔고 콩나물을 팔아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시킨 강씨 할매네 둘째 아들은 대기업에 들어가 임원이 되었다. 행상을 하며 떡을 팔아 고시 공부를 시킨 용상댁 할매네 장남은 나라경영에 참여하는 벼슬아치가 되었다. 평생 한데 장사로 모은 거액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장학재단을 만들어 나라경영의 초석을 다져놓기도 했다. 어쩌면 오늘도 한데에 전을 펼치는 할매들은 공권력公權力의 강제보다 공권력共權力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다니는 길은 개인의 사유물인 곳도 있고 나라의 공유물인 곳도 있다. 사유지야 내 땅이 아니니 어찌하겠냐마는 공유지는 나라 사람의 일원으로 일정의 소유권이 인정된다 할 수 있다. 물론 다수의 편익을 위한 공공의 쓰임에 대한 규제를 차치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덮어놓고 한데 장사를 규제만 할 것이 아니라 지역 및 장소 그리고 형태별로 정리하고 관리하여 지역 생활문화의 일부분으로 함께 걸음 했으면 하는 바람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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