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청춘
여행하는 청춘
  • 경북인
  • 승인 2011.03.1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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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임(한문고전 번역가)

▲ 정순임 한문고전 번역가
가끔 마법 같은 삶의 모퉁이에서 여행하는 청춘들을 만나곤 했다. 늘어가는 나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기필코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과 속도를 맞춰 걸으면서 ‘내가 저 나이에 저 아이들같이 똑똑하고 야무졌더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남의 속마음까지 잘 읽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그들이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 청춘들과 함께 한 잠시의 시간이 인생의 보너스라도 되는 양 행복했었다.

요 며칠 사이 방학이어서 그런지 안동에서 여행하는 청춘들을 만났다. 한 일주일쯤 전이었다. 국학진흥원에 들어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앳되고 얼굴이 맑은 여자 아이가 “도산서원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있어요?” 한다. 국학진흥원을 거쳐 가도 도산서원에 들르지 않는 차가 있는지라, “저기 위에 적힌 거 한 번 봐요?” 하고는 덩달아 안내판을 쳐다보니 내가 타려고 하는 차가 도산서원을 가는 거였다. 같이 차에 올라 또 여행하는 청춘에 대한 호기심을 자제하지 못하고 앞자리에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호학과 2학년에 올라간다는 청춘은 취업문제 때문에 과를 선택했지만 역사가 좋단다. 졸업하고 취직이 되면 역사학 쪽으로 편입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철도 패스를 끊어서 여행 중인데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이고, 어제 안동에 와서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둘러보고 안동역 열차 침실에서 잤단다. 지금 도산서원을 갔다가 부산, 통영 등을 거쳐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그곳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유롭고 따뜻한 인생을 만났다고 했다. 어쩌면 저렇게 야물딱질 수가 있단 말인가? 현실과 이상을 아우를 줄 알고 여행의 정수까지 터득해가고 있는 그 청춘이 가슴 벅차도록 아름다웠다. 가방에 들어있던 수제 쿠기를 손에 들려주고 아쉬운 작별을 하면서, 엄마들의 직업병인 걱정도 잊고 ‘큰아이한테 패스를 끊어 주어야지’ 생각했다.

오늘 시내에 나갔다가 친구가 하는「행복한 게스트 하우스」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을 먹고 모처럼 만나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앳된 여자 아이들이 들어왔다. 오늘 게스트 하우스에 묵을 세 명의 손님이었다. 혼자서, 친구랑 둘이서 여행을 온 세 명은 우리 나이로 스물여섯 동갑이었다. 그네들은 대학 때까지 철도패스를 몰랐단다. 만 스물다섯까지만 이용이 가능한 탓에 이 방학이 마지막이라 부지런히 다니는 중이라 했다. 여행하는 청춘 셋과 그네들처럼 용감하진 못했지만 늘 여행을 꿈꿨던 여자 셋, 우리들의 수다는 바다를 꿈꾸는 시냇물처럼 하염없이 흘러만 갔다.

초등학교 선생인 청춘들 때문에 학창시절 삶을 시험하게 했던 이상한 선생님 이야기에서부터 잊지 못할 선생님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예술 이야기를 거쳐 여행 이야기, 안동 이야기, 유학 이야기까지....... 혼자 여행을 와서 안동 찜닭이 먹고 싶었는데 먹지 못했다는 청춘을 위해 배달시킨 찜닭 위로 게스트 하우스의 밤은 가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자야하는 주인들의 입장 때문에 이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워 흘금흘금 시계를 들여다보다 11시하고도 반을 넘긴 시간에야 자리를 털었다. 청춘들은 3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게스트 하우스를 나와야 하는 그 자리에 서서 ‘잘 자고 멋진 여행!’ 했더니 한 청춘이 덥석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준다. 덩달아 나머지 두 아이도 허그를 청해온다. 아, 행복하다! 순전히 예의로 그랬다 하더라도 함께 앉아 인생의 이야기를 나누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먼저 팔을 벌릴 줄 아는 그 청춘들을 만나 멋지고 아름다운 밤이다.

연일 한파주의보가 내려지는 한겨울 밤거리를 걸으면서 ‘철도 패스를 끊을 수는 없지만 어떻겠는가? 여전히 여행하기엔 충분한 청춘인 것을…’ 하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어본다. 그래, 내가 한 동안 너무 암울한 뉴스에 물들고, 절대로 드라마가 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눌려 사느라 심장이 조금씩 딱딱해져 가고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이란 먼 길을, 낮선 길을 걷는 것만이 아니지 않는가? 아주 잠깐씩 일상의 틈을 떠날 수 있다면, 그 길에서 여행하는 청춘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면, 이별하는 시간에 무심한 듯 두 팔 벌려 서로를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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