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명재상 김방경 왕의 나라를 지키다
고려 명재상 김방경 왕의 나라를 지키다
  • 김희철(안동청년유도회 부회장)
  • 승인 2011.06.2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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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충렬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을 맞아

▲ 김희철 안동청년유도회 부회장
고려 500년은 도자기, 인쇄기술 등 찬란한 문화와 무역을 통한 세계화로 어느 왕조보다 역동적이었음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건국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거란, 여진, 원, 홍건적을 비롯한 왜구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던 혼란의 500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성들은 매일 전쟁으로 내몰리고 생활은 궁핍하고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며 강건하지 못한 왕조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아야 했다.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마다 역사에 등장해온 안동. 태조 왕건과 충렬왕, 공민왕이 위기를 극복하고 국정운영을 구상하고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한 곳이 바로 안동이다.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 1212~1300)은 고려가 무신정권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이용해 침입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와 강화를 맺음으로 국가의 존폐를 가늠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을 때 고려의 자존을 지키고 10여년간 복속국의 재상으로서 친원 세력의 온갖 모함을 이겨내며 왕권을 강화하고자 힘써온 안동이 낳은 큰 인물이다. 또 그의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후대까지도 공민왕의 개혁과 원나라로 부터의 독립에 기여하고 중앙정계 핵심 세력으로 있으면서 충직한 안동인의 위상을 드높이게 되는데, 향후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혁을 완수하는 공민왕이 안동몽진을 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한다.

김방경은 안동에서 향촌사회를 움직여 가던 선안동김씨 가문에서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회곡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를 보면 大安君 김은열의 셋째아들 김숙승이 처음으로 안동에 봉해져 안동김씨의 시조가 되는데 김방경의 5대조 김일긍이 삼한공신이고 고조부 김이청이 안동태수, 증조부 김의화가 호장이었다. 대안군 김은열은 신라 경순왕이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맞이하여 낳은 넷째아들이다. 공의 조부 김민성과 백부 김창, 아버지 김효인 모두 과거급제를 통해 중앙관계로 나갔다. 당시 음서제도가 있었음에도 후대에 이르기 까지 모두 과거를 통해 정계 진출하였으며 김방경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중앙정계로 나가게 된다.

공과 관련해서는 고려사 열전 등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고려사 사관은 그의 인품이 ‘신후(信厚)하고 기우(器宇)가 홍대(弘大)하여 소절(小節)에 구애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병법에 대해서도 ‘제왕운기’를 집필한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는 그의 군사지휘에 대해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았고 한번 거사하여 양떼를 몰아가듯이 평정하였다’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 누구보다 탁월한 병법의 소유자였고 전략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승휴와는 서신을 왕래하는 정도로 상당한 학문적 수준을 보이는데 온갖 병서들은 물론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에 해박하고 제자백가에도 식견이 있었으며 특히 ‘주역’에도 조예가 깊을 만큼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은 원대한 꿈을 펼치기 보다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고려의 왕권은 광종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자겸 등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과 외척세력에 의해 능욕당하고 문무의 갈등에서 비롯된 무신정권이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는 100여년간 수없이 왕을 갈아치우는 동안 국력은 쇄진되고 나라 경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갔다. 무신임에도 이에 휩쓸리지 않고 몽골군에 대처하기 위해 병마판관으로 위도에서 주민과 함께 제방을 쌓아 해조를 막고 10여리의 평야를 개간하여 양곡을 확보하는 등 본 직분에 충실한 그를 보며 무신 권력세력들이 시기하는가 하면 최씨정권에 밀착된 인물이 불법을 행하려던 것을 바로 잡으려다 최우(崔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무신세력과 거리를 둔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씨정권의 타도에 앞장섰던 1세 연상인 유경과 가까이하고 공이 반역으로 모함을 받았을 때 그로인해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결국 13세기 초 금나라를 무너뜨리고 전세계를 제패하던 원나라의 공격을 받은 고려는 39년을 버티다 원나라와 강화를 맺게 되고 문신과 정적들을 억압해온 무신들은 보복을 염려해 강화도를 폐쇄하고 여원연합군과 싸우게 된다. 이들이 배중손을 비롯한 무신 사병들로 구성된 삼별초, 하지만 강화도에 있던 백성들은 성을 떠나고 민심은 돌아섰다. 개경으로 돌아온 원종은 진노하여 김방경으로 하여금 진압을 명하게 된다. 공이 62세(원종 14년)에 문하시중에 임명된 것도 삼별초진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을 인정받으면서 부터다. 하지만 김방경으로서는 원의 간섭이 예상된 터라 왕권을 정상화 하기 위해서는 동족간 싸움이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김방경의 행보는 끊임없는 부원세력과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원과 고려 사이에서 모략질로 수없이 고려를 위기에 처하게 했던 인물이 몽고에 투항했던 홍다구라는 인물이다. 원과 고려 사이에서 김방경의 입장은 분명하다. 원 세조로부터 호두금패를 하사받은 군 최고통수권자지만 항상 통수권 행사에서 원종에 이은 충렬왕의 허락을 받아 시행하다 몽고군 지휘관으로부터 지적을 받는다. 이러한 그를 두고 위득유와 홍다구의 끊임없는 무고와 혹독한 심문이 이어진다. 한번은 왕비인 제국공주의 힘에 의해 석방되고 두 번째는 충렬왕이 직접 원에 들어가 세조에게 무고를 해명하여 사면 받는다. 충렬왕 3년에는 홍다구가 김방경이 무고를 받음을 이용하여 고려왕조를 모해하려는 획책으로 충렬왕을 통해 직접 김방경을 심문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혹독한 고문에도 자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보다못한 충렬왕이 허위진술이라도 하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간과 골이 땅바닥에 그르게 된다 해도 나라의 은혜를 다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일신을 아껴 근거없는 죄명을 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하고 죽기를 작심했다. 충렬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는이가 없고 정적들 까지도 위기에서 구해주는 일이 있어 그의 넓은 인품에 감복했다. 충렬왕은 26년간 거의 모든 사안을 김방경의 의견을 들었으며 부원배들에 의한 위기를 넘겼다.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가 자신의 치적을 위해 일본정벌에 나서는데 이때도 위득유와 홍다구의 모함을 받아 고초를 겪으면서도 고려군 수장으로 뛰어난 통솔을 하여 원나라 10만 대군이 폭풍으로 수장된 반면 고려군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듭하여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비록 2차에 걸친 일본정벌은 실패하였으나 충렬왕은 손수 안동부로 행차하여 70세 노장 김방경을 맞이한다. 원군에 의해 소주가 처음 들어오고 충렬왕과 김방경의 연회석에 하회별신굿, 수동별신굿 탈놀이가 시연되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만큼 일본정벌과 한달간의 왕의 행차는 안동에도 엄청난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방경이 89세 노환으로 별세할 때 까지 충렬왕은 수차례 김방경의 집에 찾아가 정을 나누고 정사를 자문했다. 어느 왕조에서도 국왕과 같은 시호를 받은 신하는 없었다. 충렬공 김방경은 고려의 훌륭한 임금과 16공신을 모신 숭의전에 배향되어있다. 김방경 사후 손자 김승택, 김영후, 김영돈, 그들의 손자 김구용, 김사형으로 이어진 후손들은 안동을 왕의 나라로 만드는데 중앙 정계의 핵심적인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공민왕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한 김승택의 손자인 김구용과 아우 김제안 및 김영후의 손자이자 천의 아들 김사형이 있었다. 김구용은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정도전, 이존오 등과 함께 성균관 교관으로 선임되었으며 우왕 초에는 정도전, 이숭인, 권근과 함께 북원 사신을 맞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러한 입장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혁을 완수하려는 공민왕이 크게 신임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또 이는 공민왕 이후 정국전개에 있어 보다 더 명확한 반원 자주 입장을 견지할 수 있게 했다.

극도의 혼란기에 중책을 맡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고려의 자존과 왕권을 지키려 했던 명재상 충렬공 김방경,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왕의 나라를 지켰던 안동의 인물로 오는 2012년 탄신 800주년을 맞아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충(忠)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해 준다.

福州 辛巳歲 東征日本 班師至福州

山水無非舊眼靑 산과 물은 어느 것이나 예대로 있어 반가워라
樓臺赤是少年情 누대 또한 바로 소년 시절에 보던 것처럼 다정하구나
可憐故國遺風在 슬프다 고국에는 옛 풍속이 남아있어
收拾絃歌慰我行 거문고와 노래 소리를 수습하여 나의 길가는 심정을 위로하노라

김방경이 일본정벌에서 귀환 하면서 안동 영호루에서 향촌에 대한 시를 지어 이승휴에게 보내는데 고향에 대한 정취와 조국의 슬픈현실이 교차하면서 개탄하는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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