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지킴이로 25년을 한결처럼
서원 지킴이로 25년을 한결처럼
  • 취재 배오직 사진 이경태 객원기자
  • 승인 2009.02.18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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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병산서원 류시석씨」 “문중어른들이 이리 오래 일할 걸 알았나 봐요”

“날씨가 참 좋죠? 어제 인터뷰 연락을 받고 얼추 계산을 해보니 한 25년 정도 되더라고요. 오래는 했다 싶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참 긴 세월이었네요.”

82년부터 병산서원을 보존하는데 일생을 바쳐온 병산서원 관리사무소의 류시석(55세) 씨가 맑은 하늘만큼이나 낭랑한 목소리로 세월의 묻혔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병산서원 관리사무소의 류시석(55세) 씨

“이 곳에 오기 전 저는 풍산 금속이라는 회사를 다녔었는데 당초 고향인 하회에 내려와서 농사를 지으려고 했었죠. 근데 당시 문중 어른들께서 이 곳 서원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데요. 제가 이렇게 오래도록 일할 것을 미리 아셨나 봐요. 하하하”

첫날밤 여기서 자려고 하니 참 막막하더라

그는 그렇게 문중 어른들의 권고에 따라 82년 이 곳 병산서원과의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일행은 서원의 중심인 입교당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 했는데 늘 사람들에게 이 자리에 꼭 앉아 보기를 권한다고 했다.

“여기는 서원에서 가장 자연과 어우러지는 곳이고 또 요즘으로 말하면 공부하는 교실인 셈이죠. 그리고 저기 앞에 보이는 만대루라는 공간은 시나 학문을 논하기에 적합하지만 너무 펼쳐져 있기에 공부하기에는 집중이 잘 안되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병산서원의 배롱나무 꽃은 7월 20일 경에 절정을 이룬다

그는 사람들이 서원을 찾을 때 옛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 연구했었던 이곳에서 그때 당시를 상상하며 서원의 문화를 즐기며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물론 이곳을 찾는 일은 아주 반가운 일이기는 하지만 서원의 옛 기능이 교육기관이었다는 사실을 꼭 한번 되새기며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했다.

“조선 말기에 서원의 교육 기능이 약화되어 갔죠. 그래서 병산서원의 교육 철학을 이어 받기 위해 세운 학교가 현재의 풍산 종합고등학교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풍산에 있던 류씨들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이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1572년의 일이고 그 후 1863년 철종 때 사액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1946년 학교법인 병산교육재단을 만들고 병산중학교를 4년제 학교로 설립하여 그 후 현재의 풍산종합고등학교로 유지되고 있다.

“그 때는 하회에서 병산까지 길이 좋지 않아 아이들을 업고 저기 화산을 넘어 걸어서 다녔죠. 옛 선비들이 다녔던 강섶 길을요. 그 첫날밤 여기서 자려고 하니까 참 막막하더라고요. 집은 크고 들어오니까 컴컴하고...”

서원 근처에서 함께 살고 있는 아내에게 처음에는 5년 정도만 들어와 살자고 약속을 했다. 그런 것이 25년이나 흘렀다면서 아내에게 미안한 표정을 잠시 지어 보였다.

그는 이사를 11번이나 했다. 그 말에 기자는 오히려 이곳에 와 오래도록 정착하고 살고 있는 것이 더 좋지 않았냐는 사정 모르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또 류시석 씨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부평에 풍산 금속 근무시절 낳은 첫 아이는 현재 공무원이 되어 연수을 받고 있고 각각 울산과 이 곳 병산에서 나은 나머지 두 자녀도 다 자라 현재는 서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과 홈페이지 제작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처음 당시에는 사무실도 없었고 처음부터 전 공무원이 아니었기에 문중에서 주시는 20만원으로 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서애 선생께서 좋아하셨던 배롱나무(백일홍)를 어르신들이 많이 심어 놓았었는데 거기에 약치고 가지치고 했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특별히 어려웠다거나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당시 문중 어른들의 서원을 아끼는 마음을 제가 전해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좋았고, 또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힘들 때도 있었지만 1997년 문화유산의 해에 문화체육부 장관 표창을 경복궁에서 받은 것이 가장 큰 보람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3월부터 10월까지 주로 학생들이 전국에서 많이 찾아옵니다. 연 15만 명 정도 오시는데, 많이 오시는 편이죠. 저는 한 10만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만... 하하”

병산서원이 배롱나무 꽃으로 통하도록 만들고 싶다

그런데 아직은 때가 아닌지 대화 내내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두 무리의 가족만이 구름 한 점 없는 청아한 하늘의 무료함을 달래 주고 있다.

 배롱나무를  더 잘 가꿔고 심어 병산서원하면 배롱나무 꽃으로 통하도록 만들고 싶다.

“어느 교수의 책에 보면 병산서원은 낙동강을 왼쪽에 두고 걸어 들어오는 것이 참 좋다고 하던데요. 혹시 걸어 보셨는지요?”

“아! 네. 영남대 유홍준 교수가 그런 말을 책에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 2킬로미터 전방에 보면 ‘정자골’ 이라고 있는데요, 많이들 걸어오십니다. 차를 타고 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만대루에 앉으면 한결같이 ‘걸어오기를 잘 했구나!’ 라고 하시죠.”

기자도 병산서원을 비교적 많이 와 본 적이 있어 기회가 된다면 걷기를 일행들에게 종용했었다. 그러기에 낙동강과 백사장이 갈대와 어우러져 흔들리는 풍경을 모를 리 없었다.

“한 가지 아쉬워하는 것이 있는데 몇 해 전 저 아래 언덕에 있었던 노송들 몇 그루가 사라져 버렸어요.”

당시 눈이 많이 왔는데 바람까지 세게 불어 가지들이 거의 다 부러졌었다. 워낙 미관상 좋지 않다는 말에 아쉽지만 베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노송들이 사라져 버린 후 병산 서원의 아름다움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과 혹시 개발의 시작이 아닐까라는 우려를 했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나마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저는 특히 가을 병산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화려하지 않는 단풍이 오히려 유생들이 공부하기에 오히려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서죠. 또 병산에 걸린 달과 물안개는 배만 띄우면 금오신화에 나오는 취유부벽정기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엑스트라는 안 해봤어요...”

영화 촬영 자주 있어 늘 탈이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 했지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혹 일부러 시간을 내서 조용한 고가를 찾은 분들께 마음이 상하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영화 ‘무인시대’ ‘미인도’ ‘천추태후’ ‘취화선’ 등 많은 사극 영화들이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 삼아 찾고 있다.

난 쓸고 닦을 뿐, 윤은 여러분 몫

“정년은 한 4년 남았어요. 아직까지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이 주변에서 살 것 같아요. 남은 인생을 다 여기서 보낼 겁니다. 어차피 저는 성이 류가니까. 남이 저처럼 해주겠어요?  있는 한은 제가 해야죠.”

남은 인생 이곳에서 계속 보내야죠

퇴직금 120만원을 받아 그동안 밀린 빚 정리하고 농자금 50만원 내고 해서 고향으로 왔지만 이 긴 세월을 이곳 병산에서 보내게 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평소 만대루에 올라 시 한수 읊으시는 게 있냐는 물음에 사람들에게 읊고 가시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건 없다고 소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별로 바라는 건 없네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것만 지켜주시면 그만입니다. 또 희망이 있다면 존덕사 앞에 있는 배롱나무를 좀 더 잘 가꾸고 심어서 병산서원하면 배롱나무 꽃으로 통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곳은 학문을 연구하는 자리였으니 와서 누워만 계시지 말고 작은 토론이라도 하면서 사계절의 병산을 즐기길 바랍니다.”

류시석씨가 마지막으로 했던 “쓸고 닦는 것은 내가 하지만 윤을 내는 것은 여러분이 하시는 겁니다.”라는 말이 돌아오는 내내 긴 여운으로 남았다. 병산서원의 배롱나무 꽃은 7월 20일 경에 절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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