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독립운동과 문학 적극 재조명 할 때다
이육사의 독립운동과 문학 적극 재조명 할 때다
  • 유경상
  • 승인 2011.09.29 1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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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mbc라디오, 유경상의 경북의오늘-13>

 

6월1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20분 부터 6시 30분까지 안동mbc 라디오(100.1mhz) 김경환의 '라디오오늘' 에서 고정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너 제목은 '유경상의 경북의 오늘' 입니다. 이번 내용은 13회 8월24일자 내용입니다.

 

유경상의 경북의 오늘(20110824)- 이육사 선생의 재조명

최근 광복 66돌을 맞아 안동출신인 이육사 시인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8월15일 오전 10시50분부터 이육사의 삶과 사랑을 다룬 특집드라마 2부작 <절정>이 방영된 후, 육사의 항일저항운동에 대한 관심도가 새로운 진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은 이육사가 시(詩)라는 문학활동을 넘어 목숨까지 바치며 뛰어들었던 독립운동을 향한 저항운동의 배경과 그의 문학과 독립운동의 관계에 대해 경북인뉴스의 유경상 대표기자와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질의1. 유경상 기자님, 안녕하십니까? 시 ‘광야’로 유명한 육사 이원록은 안동출신의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왜 이육사 시인이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 ‘저항시인’ 이육사를 배출한 안동지역 역사문화권의 자부심은 매우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고장이 배출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시인이다’는 인식에서 더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이해도가 낮아지고 있고, 일반적인 피상적 지식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이죠. 해방직전 북경 일본영사관에서 순국한 육사의 삶을 독립운동사적 측면에서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면 오늘을 사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좌표와 함께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의2. 예, 그렇군요. 먼저 이육사 선생의 성장배경은 어떻습니까?

○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1904년 5월에 태어나 유가의 엄격한 가학환경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조부인 치헌 이중직은 진보적인 관리였고요. 외조부인 범산 허형은 선산, 구미, 칠곡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장이었습니다. 외조부의 사촌인 왕산 허위는 조선13도의 독립의병 총사령관이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교수형 1호가 왕산 허위입니다. 그 집안의 셋째 딸이 어머니 허길 여사입니다. 허길 여사는 여섯 아들을 앉혀놓고 ‘나라 잃은 땅에서 내가 죽더라도 울지 마라’고 했다고 합니다. 육사도 어느 글에서 ‘우리를 지배한 건 무서운 규범이다’고 썼습니다. 외삼촌 일헌 허규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초대입법의원을 지낸 분이고요. 외사촌 허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손부가 됩니다. 다시말해 육사의 문학은 친가에서 나왔고, 독립운동의 정신은 외가로부터 왔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바탕은 선비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의3. 친가와 외가로부터 문학과 독립의지를 배웠다고 볼 수 있군요. 그럼 육사의 독립운동과 문학활동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요?

○ 육사의 생애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나라를 찾는데 보여준 지성의 행동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암울한 식민지 상황이었고요,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라는 시대적 가치가 있었습니다. 육사는 그 지행(知行), 아는대로 행동하고 실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삶 속에서 그의 시를 읽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배운 만큼 행동으로 옮긴 분인 만큼, 이육사는 스스로 ‘내가 시를 쓰는 것조차 행동의 한 방편이다’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글쓰는 것도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죠. 다시말해 조선사람들이 시를 통해 일본보다 문화적으로 앞서 있다는 자긍심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독립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김종길 교수는 ‘독립의 한 방편으로 시를 썼다고만 하기에는 그의 일련의 작품들이 너무나도 절창이다. 우리문학사에서 이런 글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정도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질의4. 그럼 육사의 독립운동에 바친 행적은 어느 정도까지 밝혀져 있습니까?

○ 육사문학관의 조영일 관장의 말에 따르면, “육사의 문학은 약 90% 밝혀졌지만, 독립운동은 50%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육사가 무기를 가지고 비밀결사운동을 해 왔기 때문이라는 거죠. 사실 육사의 마지막 순국과정도 미궁이라고 합니다. 육사의 마지막 발자취가 오리무중이라는 얘기입니다.
육사는 1943년 5월, 국내에 들어와 6월 원천에서 모친의 소상을 치룹니다. 그리고 그해 7월 동대문경찰서에 체포가 됩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8월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이 되는데, 그 이후가 애매하다는 겁니다. 유족들은 1943년 8월에 중국 북경으로 끌려갔다고 하는데. 육사와 가장 친했던 신석초 시인은 가을이라고 주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경찰관계자들은 1943년 겨울이라고 주장하는 등 엇갈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1943년 8월부터 겨울 사이에 북경으로 끌려갔다는 것인데, 결국 1944년 1월 16일에 순국했습니다. 사실상 체포이후 상당히 짧은 기간 안에 순국을 한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질의5. 국내에서 체포가 됐는데, 굳이 중국 북경으로 이송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로 왜 육사가 북경으로 끌려가야만 했는가 입니다. 외국에서 체포가 되더라도 국내로 끌고 오는데 굳이 중국으로 끌고 갔느냐 하는 것이죠? 그 배경이 복잡하다고 합니다. 현재 육사문학관에는 ‘조선독립의용대 발대식’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의 의미가 무엇이냐? 1940년대 들어오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패전을 예견하기 시작합니다. 국내에서의 무장봉기를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무기가 절실했고 무기를 구입하는데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가 있었죠. 당시 무기구매 책임이 육사에게 있었습니다. 육사가 무기 구매자금을 구하는 다양한 행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중국으로 끌려간 것은 대질심문을 하려고 끌고 간 것이 아닐까 추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둘째로,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북경에 있는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당시 영사관이 감옥을 가지고 있었느냐에 의문이 있다는 것이죠. 교도소라면 최소의 인권이 보장되는데, 당시의 증언에는 육사의 시신이 피투성이였다고 합니다. 헌병사령부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발생했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육사가 중국을 수 없이 왕래하면서 있었던 독립활동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육사의 독립운동에 바친 그 삶 속에 문학이 있었고, 문학의 바탕엔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이 배경이었다. 이렇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민간차원이든 정부차원이든 육사의 독립운동 행적과 발자취를 찾아 나서서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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