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조문국을 둘렀싼 수수께끼
의성군의 민선5기 현황과 과제(2)
의성 조문국을 둘렀싼 수수께끼
의성군의 민선5기 현황과 과제(2)
  • 유경상
  • 승인 2011.09.29 1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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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mbc라디오, 유경상의 경북의오늘-17>

 

6월1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20분 부터 6시 30분까지 안동mbc 라디오(100.1mhz) 김경환의 '라디오오늘' 에서 고정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너 제목은 '유경상의 경북의 오늘' 입니다. 이번 내용은 17회 9월21일자 내용입니다.

 

경북의오늘-의성군의 민선5기 현황과 과제(2011.09.21)

지방자치 20년을 맞아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취지로, 자치와 분권을 정착시키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경북의 기초자치단체의 현 주소와 그 발전과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 의성군의 선진복지농촌 건설과 과제에 이어, 지난 3년간 의성군이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고대국가 조문국과 관련된 사업현황을 경북인뉴스의 유경상 대표기자와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질의1. 유경상 기자님, 안녕하십니까? 자- 5년전부터 의성군에 신라 이전에 국가로서의 틀을 갖춘 조문국 이라는 고대국가가 있었다는 등의 관심이 많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전후과정의 고대국가에 대한 관심, 현재적으로 어떤 의미로 볼 수 있습니까?

◯ 예,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주로 진행되던 지역의 분권과 자치활동이 이제 역사와 문화사적인 측면으로 확장되고 넓혀지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사회,문화,교육분야 등 절대적 다수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지역사회에서 ‘먼 옛날 역사이래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 왔고, 또 면면이 흘러오고 있는 우리지역에 대한 역사의 뿌리와 실체를 더 확보해 보자’는 역사문화적 자각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경상북도의 경우도 신라시대 이전부터 여러 시군 지역에는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던 고대국가가 꽤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를 2007년 봄, 경북도와 영남일보가 경북지역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가 신라에 복속된 소국의 흔적을 찾아가는 시리즈인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라는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고요. 의성군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문국을 재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말해, 향토인 우리지역을 대상으로, 우리 지역의 눈으로 우리 역사의 시원을 바라보는 게 필요하고 또 가능해진 시대라는 것이죠.
이런 가운데,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고대국가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나라의 기틀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지의 소국(小國)들이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지역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질의2. 경북지역의 경우 언제부터, 어떤 소국가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까?

◯ 기원전 1세기라는 것이 동아시아가 격동기에 접어 드는 시기라는 것이고요. 기원전 1세기부터 영남지역에는 진한·변한의 24개 소국이 등장하고 소멸하는 양상이 보였다고 합니다. 물론 마한지역과 고구려, 옥저, 동예지역도 각기 정치경제적 재편이 이루어졌고요. 영남지역에는 경주 사로국, 영천 골벌국, 경산 압독국, 의성 조문국, 상주 사벌국, 청도 이서국, 김해 금관국 등이 산재했었다, 그리고 이들 소국가들은 격동의 정치경제적 환경 속에서 그들이 가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새로운 교역망을 구축하며 부(富)를 쌓아갔다, 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영남지역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이 신라였던 것입니다. 이 런 흐름 전후과정에서 조문국의 위상과 존재의의를 새롭게 살펴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질의3. 이 가운데 의성지역의 조문국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정치군사적 힘이 어느 정도였다고 밝혀지고 있습니까?

◯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는 조문국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185년 벌휴왕 2년 신라가 이곳을 점령, 소문군(召文郡)을 설치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향토사료인 '미광(微光)'에는 조문국이 신라와의 전쟁을 치룬 대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사로국(신라) 왕에 즉위한 벌휴왕은 조문국이 근래 비상한 세력을 얻게 되자, 사신을 파견해 항복을 강요했다. 이에 조문국 왕은 군신을 회합해 대책을 모의한 뒤 교전하기로 결정했고, 크게 화가 난 벌휴왕은 다음해인 185년 2천여명의 장병을 동원해 조문국을 공격했다. 조문국 왕은 금성산 주위에 석성을 구축하고 응전하니 신라의 강한 군사력으로도 쉽게 격파하지 못했다. 미광에 따르면 ‘칠일 동안 불꽃 튀는 격전 끝에 패배를 면치 못할 지경에 이르러 결국 왕은 전사하고, 조문국은 드디어 멸망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또 미광에 따르면, '나라가 강대하고 평온하자 조문국 경덕왕은 이웃 나라를 정벌할 큰 계획을 세우고, 신하들과 회합을 가졌다. 회합 끝에 김 장군을 선봉으로 삼아 일족 중 29명의 호걸을 데리고 의성 인근의 적라국 토벌에 나설 것을 명했고, 적라국을 정벌했다. 적라국은 현재의 군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로선 대군인 '2천여명의 신라 군사와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는 대목과 '적라를 대파했다'는 등의 기록을 통해 조문국이 결코 만만치 않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의4. 조문국 이라는 소국가가 신라에 통합된 뒤 완전히 멸망했는지, 아니면 신라 안에서 상대적인 독자적 문화권을 가지고 활동을 유지했는지 논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 향토사학계에서는 조문국에 대해 '신라의 통치권에 흡수된 여타의 소국과 명백히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라 최장의 왕조를 형성했던 김(金)씨 세력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고요. 여기서 지대한 영향력이란 것은 바로 금(金)을 두고 하는 말인데요. 금이라는 게 어느 시대, 어느 왕조를 막론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핵심요소였습니다. 당시 의성을 중심으로 안동·예천·상주 일대는 금 생산지가 많았고, 이 일대를 장악할 경우 군사·경제적으로 강력한 힘을 비축할 수 있었고요. 이같은 이유 때문에 신라는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자마자, 조문국 정벌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지질조사에서도 신라의 찬란한 황금문화를 뒷받침하는 금광이 경주 인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반면, 금성면을 중심으로 안동·예천·상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라 최장의 왕조를 형성했던 김씨 세력에 조문국이 가지는 의미는 김씨가 신라 최후의 승자로 발돋움하는 데 튼실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왕가의 발원지인 셈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조문국은 고대 신라가 만들어낸 찬란한 황금문화의 기틀이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논문을 통해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 방면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교통로는 죽령과 계립령"이라고 했고요. 실제로 고분군이 있는 금성면은 안동·영주를 경유하는 죽령과 안계·예천을 경유하는 계립령으로 가는 두 길이 갑령을 넘어 영천 방면으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 이에 의성군에서는 현재 2009년부터 180억원을 투입해 의성조문국박물과 건립사업을 시작했고요. 내년9월에 지하1층에 지상3층으로 개관을 준비중입니다. 이 사업의 사료 및 고고학적인 논증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2007년도부터 조문국역사문화포럼과 학술대회를 매년 개최하여 의성 조문국의 문화, 생활, 강역 등 새로운 학설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2000년 시공을 뛰어넘는 조문국의 실상이 어느정도 발굴복원되면 지역의 고대사 새롭게 써야 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예측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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