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은 왜 안동으로 오게 되었나
공민왕은 왜 안동으로 오게 되었나
  • 권두현
  • 승인 2009.02.2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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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의 공민왕을 찾아서 ①

왕의 방문 - 그 문화적 충격

1361년 12월 겨울 강추위가 산하를 덮은 가운데 공민왕 일행은 안동을 목적지로 송악(지금의 개성)을 떠났다. 그가 개성에서 안동을 찾아 먼길을 떠나게 된 것은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수도 개성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수도를 떠나는 일을 지극히 드믄 일이다. 수도라는 개념은 대체로 왕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라는 통념이 있었고, 그래서 왕이 거처를 옮기는 곳이 임시수도로 결정되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왕이 수도를 떠나 타 지역으로 옮기는 예는 한국 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다.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일,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신의주로 피난을 간 일, 근대사의 아픔으로 인한 아관파천과 공민왕의 안동몽진 등을 들 수 있다.

왕이 지역을 찾아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특히나 가벼운 휴양방문이 아닌 몇 달 정도를 머무르는 사건은 지역민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던져줄 수 있다. 다른 지역도 아닌 우리 지역에 왕이 왔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왕은 하늘이다. 현재 대통령이 지역을 방문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문화적 충격을 던져준다. 비록 그것이 국가적인 전란으로 인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다른 지역이 아닌 우리 지역을 왕이 방문”하여 주었다는 사실에서 커다란 자부심, 혹은 신화적 상상력이 우리지역에 부가되는 것이다.

따라서 1361년 공민왕이 안동에 왔다는 사실은 안동사람들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자 강한 자부심으로 의미화되고, 지금도 안동을 상징하는 역사로 남게 된 것이다.

홍건적의 고려침입 - 위기

공민왕이 재위하였던 시대는 원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던 시기였고, 따라서 고려 역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공민왕은 특히 원나라와 이에 결탁된 권문세족들의 부정적인 면을 개혁하고자 노력한 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진사대부, 후일 성리학적 지식을 가지고 조선의 건국에 앞장선 인물들이 대체로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적 성향의 영향 하에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적 성향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직면하는데, 그 중 하나가 홍건적의 고려 침입이었다.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중국 각지에서 다양한 세력이 준동하였다. 그 중 강성하였던 세력이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활동하였기에 홍건적이라 이름 붙여진 무리였다. 1351년 황하강이 범람하여 이에 대한 수리를 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농민들을 징발하였는데 백성의 원성이 대단하였다. 이에 새로운 세상을 창세한다는 미륵신앙과 백련교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홍건적은 원과 대항하여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후일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도 초기 홍건적과 활동을 같이 한 사람이다.

홍건적은 자체의 규율을 강화하고 국가를 세웠는데 이름을 송(宋國)이라 하였다. 이에 원나라는 홍건적을 대대적으로 토벌하는데 주력하였고 1359년 홍건적이 세운 송의 수도 변량(卞梁)을 정벌하였다. 원나라의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그 퇴로를 고려로 잡게 되었고, 공민왕 8년인 1359년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였다. 초반 홍건적은 의주, 정주를 거쳐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장수 이방실과 안우 등의 반격을 받아 겨우 3,000여명 남짓한 인원만이 살아서 압록강을 넘어 도망갔다. 이를 홍건적의 1차 침입이라고 한다.

이후에도 홍건적은 계속하여 고려 침략의 기미를 보이다가 1361년 10월에 결빙된 압록강을 넘어 10만의 병력으로 2차 침입을 감행한다. 1차 홍건적의 난에 공헌을 세운 이방실 등을 파견하여 홍건적에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리게 되었고, 이후 홍건적의 기세는 놀라워 11월 경에 절령(방어 중심의 도시 지형)을 깨뜨리고 개경으로 침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공민왕이 믿을 곳은

이러한 위급한 시기에 공민왕은 여러 신하들과 몽진(왕의 피란길을 몽진(蒙塵)이라 이른다) 을 가게 되는데 그 목적지를 안동으로 잡는다. 그런데 공민왕이 난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고장 중 왜 안동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까닭을 추정해 볼 수 있으나 우선 떠오르는 것이 안동지역이 고려 왕권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

고려의 건국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 안동이다. 왕건이 대구 팔공상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다가 안동에서 견훤과 벌인 병산전투에서 승리하게 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잡게 된다. 그 후 안동에 대한 공로를 잊지 못하고 안동을 도호부로, 고려 예종 때에는 지금의 광역자치단체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공민왕 때 진출한 신진사대부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안동지역이라는 점도 공민왕 시기 안동과 고려 왕권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두 번째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이 안동의 지형적 위치이다.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산세가 결코 낮지 않고, 해안지역과 일정하게 떨어져 있어 당시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혀 왔던 왜구의 침탈에도 별반 걱정이 없는 지역이 안동이었다. 덧붙혀 말을 사용하여 전투에 임하던 홍건적의 주력부대에 맞서 산야가 많은 안동지역의 지형 역시 고려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백성들의 여론, 즉 안동지역민들이 공민왕을 따뜻하게 맞이할 인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안동은 고려초기부터 돈독하게 꾸려온 안동지역민들과 고려왕실과의 관계는 뗄 수 없는 친분관계로 맺어져 백성들이 그 어느 지역보다 고려왕실에 우호적이었다. 당시 공민왕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바로 개혁정치를 시도하여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반개혁 세력에게 위협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홍건적의 침입 못지 않게 내부의 반개혁 세력들도 공민왕을 위협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은 안동지역을 선택하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멀고 험했던 개성에서 안동까지의 길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개경을 떠난 날짜는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며 1361년 음력 11월 병인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병인일이면 음력으로 19일이 되므로 이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양력으로 계산하면 1361년 12월 16일이 된다. 그러니까 한참 겨울이 시작되어 추위를 떨칠 무렵에 개경을 출발한 것이 된다.

공민왕 일행과 함께 한 사람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두 번째 비인 이씨(노국공주에게 자식이 없어 이제현의 딸을 비로 맞이함), 그리고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와 28명의 신하들이었다. 왕의 행렬치고는 초라한 피란길이었던 것이다.

11월 무진일인 양력으로는 12월 18일에 공민왕 일행은 다시 경기도 광주에 도착한다. 그러나 광주 땅에는 몇 명의 관료만이 남아 있고 백성들은 모두 산성으로 올라가 대피하고 없었다. 11월 신미일 양력으로 12월 24일에는 이천에 도착하였는데 이날은 유난히 눈바람이 몰아쳐서 왕의 어의(御衣-왕의 옷)가 눈비에 젖어 얼어 붙었으며 이것을 말리느라고 모닥불을 피워 놓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 어려운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날 홍건적이 개성을 함락하였다.

다음날 충주 지방에 있는 음죽현에 도착을 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도망치고 없어서 왕은 심신으로 상당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이틀후에 충주에 이르렀고 그 다음에는 조령을 넘어서 용궁으로 왔다. 용궁에 도착한 공민왕이 마을 뒷산에 이르러서 옷을 벗어 나무에 걸고 쉬었는데 그 이후부터 이 산을 왕의산(王衣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한 것은 1361년 음력 12월 임진일 그러니까 양력으로 1362년 1월 11일이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안동으로 발길을 옮긴 공민왕 일행에게 피란도중에 개경이 함락하였다는 소식과 백성의 외면은 더욱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권두현 사무처장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도착한 안동에서 공민왕은 따스한 안동시민들의 환대를 접한다. 놋다리밟기 전설은 그러한 사례를 말해준다. 전설에 의하면 공민왕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여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현재 솔밤다리 정도가 아닐까 짐작된다) 부민들이 나와서 “왕이 어찌 다리가 없는 개울을 그냥 건너게 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등을 맞대어 사람 다리를 만들어 왕을 그 위로 건너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안동부민이 얼마나 공민왕을 열렬하게 환대해 주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이렇게 안동에 도착한 공민왕은 이후 안동부민들과 다양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계속>

[권두현은 현재 (재)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문화를가꾸는사람들 대표이다. 문화를 가꾸고 사랑하다 보면  문화 속에서 밥과 꿈과 일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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