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집 그녀
그녀는 밥집을 한다. 송현 2주공 아파트 정문 맞은 편, 똑같은 장소에서 17년째 밥장사를 하고 있다. 내가 처음 아이들을 데리고 안동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고, 대학원에 등록하면서 밤에 학교에 가야 하는 날, 아이들 가르치는 수업이 늦어지는 날에는 그녀가 우리 아이들 밥을 챙겨 가져다주곤 했다. 학교를 가거나 수업이 늦어지는 날은 꼭 후배를 불러 놓고 갔지만 밥까지 해 먹이라고 하기에 미안했는데,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그런 고민이 깨끗이 해결되었다. 우리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그대로를 우리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마, 아이들 가르치고 석사 학위 공부하러 다닐 때 만나서 그럴 것이다. 거기서 6년을 살다 이사를 가면서 그녀와 나의 인연도 끝났으려니 생각했는데, 살아가다 힘이 드는 날은 꼭 그녀가 끓여준 된장이 먹고 싶었고, 숙취로 몸이 고달플 때는 그녀가 말아주던 잔치국수가 그리워 찾아가곤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와 나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요즈음 나는 백수 생활 반 년 만에 이 통장 저 통장 빠져나갈 돈은 여기 저기 펑크가 나고 그다지 아름다운 날들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한 날들 중에 나는 가끔 밥집 언니의 밥이 그리웠고, 한 번 가야지 하고 있었다. 그저께 학교 갔다 온 큰아이가 “엄마, 내 휴대폰 끊겼어. 전화가 안돼.” 하는데,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자존심 한 자락 툭 떨어져 내린다. 딸내미한테는 그런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어, 그래, 엄마가 그 통장에 돈 넣는 걸 깜빡했네. 내일 낼게. 미안해 딸.”하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보니 저도 별 일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참 고맙다.
어제 겨우겨우 휴대폰 요금을 내고 혼자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발길이 밥집으로 향했고,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이라 혹시 없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김치적을 굽다가 돌아보며 “어, 선생님 오셨네, 안 그래도 한동안 안 오셔서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는데...” 하며 화들짝 반긴다. “언니, 맛있는 밥 좀 주세요. 언니 밥을 먹어야 힘이 날 것 같아서 왔어요.”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부쳐낸 김치적을 한 쟁반 담아온다. “우선 이거 드시고, 미역국 진짜 미역으로 끓여 놨는데 그거해서 밥 한 숟가락 하세요.” “이거 주문 들어와서 굽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아니요, 그냥 굽고 싶어서 굽고 있었어요.” “내가 먹을 복은 있나 봐요.” “모든 게 감사하고 복이 있다 생각하면 그렇게 되지요.” 이런 저런 말들을 하는 중에 손이 재바른 언니는 갖가지 나물 반찬에 미역국을 내다 준다.
밥을 먹다가 문자가 와서 안경너머로 쳐다보고 있는데 언니가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 “나이가 드니까 눈도 가고......” 계면쩍어 말꼬리를 흐리는데, “선생님, 저는 친구한테 눈이 가주어서 고맙다고 했어요.” 한다. 아니, 왜요?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더니 “얼굴도 늙고 손도 늙고 다 늙는데 눈만 그대로 있으면 보기가 얼마나 싫겠어요. 섭리에 따라 눈도 따라 늙어주니 자기 얼굴 거울로 보고도 그러려니 살게 해주잖아요.” 마음속에 빛 한 줄기 순식간에 흘러들어 금방까지 내가 무슨 고민을 했었던지 잊어버렸다. 나는 눈이 늙어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아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삶이란 산만큼 보이는 것이다. “언니는 정말 멋지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역시 언니가 언니네요.” 내 마음을 전달할 더 지극한 찬사가 많았을텐데 겨우 그 말을 하고는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을 먹었다.
사람살이의 대부분을 책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한 나 같은 사람은 흉내 낼 수도 없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을 꿇고 그들을 존경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저들처럼 현명해질 수 있을까? 내가 오늘 겪고 있는 이 일들이, 그 사이에 그녀를 만나러 온 내 행보가 내 삶을 한 발짝 나아가게 했을까? 많은 의문표를 그리면서 밥값을 내미는데, “내 마음 같아서는 밥값도 안 받았으면 싶은데 그러면 선생님이 부담스러워 안 오실 것 같아서..” 하면서 돈을 받는다. 늘 내가 가면 시키지도 않은 적을 구워 주고, 손님에게 내지 않는 여러 반찬과 국들을 이것저것 먹으라고 권하는 그녀는 그렇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진짜로 복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구석구석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집
<정순임의 삶과 창-2>
저작권자 © 경북in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