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집 그녀 - 다른 사람에게 밥이 되어주라'
'밥집 그녀 - 다른 사람에게 밥이 되어주라'
  • 정순임
  • 승인 2012.03.11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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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임의 삶과 창-2>

밥집 그녀

그녀는 밥집을 한다. 송현 2주공 아파트 정문 맞은 편, 똑같은 장소에서 17년째 밥장사를 하고 있다. 내가 처음 아이들을 데리고 안동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고, 대학원에 등록하면서 밤에 학교에 가야 하는 날, 아이들 가르치는 수업이 늦어지는 날에는 그녀가 우리 아이들 밥을 챙겨 가져다주곤 했다. 학교를 가거나 수업이 늦어지는 날은 꼭 후배를 불러 놓고 갔지만 밥까지 해 먹이라고 하기에 미안했는데,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그런 고민이 깨끗이 해결되었다. 우리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그대로를 우리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마, 아이들 가르치고 석사 학위 공부하러 다닐 때 만나서 그럴 것이다. 거기서 6년을 살다 이사를 가면서 그녀와 나의 인연도 끝났으려니 생각했는데, 살아가다 힘이 드는 날은 꼭 그녀가 끓여준 된장이 먹고 싶었고, 숙취로 몸이 고달플 때는 그녀가 말아주던 잔치국수가 그리워 찾아가곤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와 나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요즈음 나는 백수 생활 반 년 만에 이 통장 저 통장 빠져나갈 돈은 여기 저기 펑크가 나고 그다지 아름다운 날들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한 날들 중에 나는 가끔 밥집 언니의 밥이 그리웠고, 한 번 가야지 하고 있었다. 그저께 학교 갔다 온 큰아이가 “엄마, 내 휴대폰 끊겼어. 전화가 안돼.” 하는데,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자존심 한 자락 툭 떨어져 내린다. 딸내미한테는 그런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어, 그래, 엄마가 그 통장에 돈 넣는 걸 깜빡했네. 내일 낼게. 미안해 딸.”하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보니 저도 별 일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참 고맙다.

어제 겨우겨우 휴대폰 요금을 내고 혼자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발길이 밥집으로 향했고,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이라 혹시 없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김치적을 굽다가 돌아보며 “어, 선생님 오셨네, 안 그래도 한동안 안 오셔서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는데...” 하며 화들짝 반긴다. “언니, 맛있는 밥 좀 주세요. 언니 밥을 먹어야 힘이 날 것 같아서 왔어요.”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부쳐낸 김치적을 한 쟁반 담아온다. “우선 이거 드시고, 미역국 진짜 미역으로 끓여 놨는데 그거해서 밥 한 숟가락 하세요.” “이거 주문 들어와서 굽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아니요, 그냥 굽고 싶어서 굽고 있었어요.” “내가 먹을 복은 있나 봐요.” “모든 게 감사하고 복이 있다 생각하면 그렇게 되지요.” 이런 저런 말들을 하는 중에 손이 재바른 언니는 갖가지 나물 반찬에 미역국을 내다 준다.

밥을 먹다가 문자가 와서 안경너머로 쳐다보고 있는데 언니가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 “나이가 드니까 눈도 가고......” 계면쩍어 말꼬리를 흐리는데, “선생님, 저는 친구한테 눈이 가주어서 고맙다고 했어요.” 한다. 아니, 왜요?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더니 “얼굴도 늙고 손도 늙고 다 늙는데 눈만 그대로 있으면 보기가 얼마나 싫겠어요. 섭리에 따라 눈도 따라 늙어주니 자기 얼굴 거울로 보고도 그러려니 살게 해주잖아요.” 마음속에 빛 한 줄기 순식간에 흘러들어 금방까지 내가 무슨 고민을 했었던지 잊어버렸다. 나는 눈이 늙어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아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삶이란 산만큼 보이는 것이다. “언니는 정말 멋지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역시 언니가 언니네요.” 내 마음을 전달할 더 지극한 찬사가 많았을텐데 겨우 그 말을 하고는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을 먹었다.

사람살이의 대부분을 책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한 나 같은 사람은 흉내 낼 수도 없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을 꿇고 그들을 존경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저들처럼 현명해질 수 있을까? 내가 오늘 겪고 있는 이 일들이, 그 사이에 그녀를 만나러 온 내 행보가 내 삶을 한 발짝 나아가게 했을까? 많은 의문표를 그리면서 밥값을 내미는데, “내 마음 같아서는 밥값도 안 받았으면 싶은데 그러면 선생님이 부담스러워 안 오실 것 같아서..” 하면서 돈을 받는다. 늘 내가 가면 시키지도 않은 적을 구워 주고, 손님에게 내지 않는 여러 반찬과 국들을 이것저것 먹으라고 권하는 그녀는 그렇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진짜로 복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구석구석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한문고전번역가)
으로 돌아오는 길, 돈 때문에 이리저리 무거웠던 마음이 어느새 백지장처럼 가벼워져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다른 사람에게 밥이 되어주라.’고 했다는데 나는 밥 같은 밥집 그녀를 만나면서 인생의 한 고비를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지키자고 누구에게도 궁한 소리 하지 못하고, 다락 같이 자존심만 높게 살았던 것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정말 멋지게 나이를 먹어가야 하는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순리대로 인정하고 물처럼 흘러갈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데서 시작하는 거라고 밥집 그녀가 내게 말해주었다. 역시,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다. 온몸으로 세상을 먼저 살아낸 밥집 그녀의 삶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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