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을 그리워 한 예술가 공민왕, 현판 글씨 두점
안동을 그리워 한 예술가 공민왕, 현판 글씨 두점
  • 권두현
  • 승인 2009.02.28 15:3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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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의 공민왕을 찾아서 ②

공민왕의 안동 행적에 대한 기록은 그리 상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 등에는 홍건적과의 전투에 대한 몇몇 장면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공민왕의 안동행적은 결국 안동지역 자료와 전설에 의존하여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안동에서 공민왕은 충분한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공민왕은 이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공민왕이 친히 글씨를 써서 내려준 현판 두 점과 행정도시 안동을 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이다.

안동을 대도호부로

안동이란 지명은 ‘동쪽을 안정시킨 기념으로 설치한 부’라는 뜻에서 시작된다. 고려 태조인 왕건은 견훤에게 패하여 위세를 잃어 가던 중 안동에서 전개된 병산전투에서 불리한 여건임에도 안동부민들의 절대적 공훈으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에 왕건은 행정적 거점 관청인 “안동부”를 안동에 설치한다. 옛날에는 공훈이 있는 지역 거점 관청을 설치하여 인근 지역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설치된 안동도호부는 이후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경주, 상주, 김해 등에 옮겨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신종 7년(1204년)에 안동에 대도호부가 설치되기도 하지만 안동의 위상은 그리 높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공민왕이 안동을 다녀간 후인 1362년 4월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행정구역이 승격되는 것이다.

대도호부는 지금으로 친다면 광역자치단체의 중심적 고장, 혹은 직할시와 같은 행정적 위상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도호부로 승격됨으로써 그만큼 관할 영역이 커져 세력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신종 7년 대도호부로 승격된 안동에 속했던 지역을 보면 순흥, 영해, 봉화, 영덕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공민왕이 안동을 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은 물론 왕이 거주하였던 곳이었던 만큼 그만한 행정적 위상을 갖추었던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안동부민들의 따스한 환대에 대한 공민왕의 보답이었다는 측면이 강하다. 공민왕이 개경에 도착한 후에도 안동을 잊지 못하여 안동이 나를 일으켰다(此安東我重興)라고 술회하고 있는 점 등이 이를 증명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안동웅부(安東雄府) 현판을 보면

이보다 더욱 직접적인 증거물이 안동지역에 아직도 걸려 있는 공민왕이 직접 글씨를 쓴 현판 두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지금도 안동시청 현관에 걸려있는 安東雄府(안동웅부)라는 현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웅부(雄府)라는 단어의 선택이다. 당시 안동의 행정적 위상은 안동도호부, 혹은 안동대도호부였다. 만약 이를 그대로 사용했다면 현판의 글씨는 “安東大都護府(안동대도호부)”라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굳이 雄府(웅부)라는 단어를 썼다.

우리가 흔히 사찰에 가면 중심되는 건물 현판으로 대웅전(大雄殿)이라는 글씨를 자주본다. 대웅전이 걸려 있는 건물은 바로 부처가 살고 있는 곳이다. 즉 불교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인 부처를 지칭하는 용어가 바로 대웅(大雄)인 것이다. 따라서 안동웅부(安東雄府)에서 선택된 단어인 웅(雄)이라는 글자는 고려가 불교국가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안동에 대한 공민왕의 고마움이 함뿍 담긴 표현인 것이다.

금칠한 현판 “映湖樓(영호루)”

또 하나 공민왕의 친필 현판은 안동이 자랑하는 누각인 영호루에 있다. 영호루에서 강변을 바라보고 있는 지붕 아래 “영호루”라는 현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영호루를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의 시와 글이 있다. 그 중에서 영호루 현판과 관련된 고려 말기 학자인 이색의 글에 “병오년(1366) 겨울에 공민왕께서 서연(書筵)에 계시다가 신하인 권사복을 불러 면전에서 영호루 세 글자를 크게 써서 주었다(歲丙午冬 上在書筵 大書映湖樓三字 命正順大夫上護軍臣興慶傳旨 召奉翊大夫判典校寺事臣思復入面授之)”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민왕이 개경에 도착한 연도는 1363년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로부터 4년후에 안동을 잊지 못하여 “映湖樓(영호루)”라는 현판 글씨를 써서 내려주었다는 기록인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은 왜 안동의 많은 유적지 중 영호루를 기억하였던 것일까. 고려사에는 공민왕의 안동행적이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유일하게 영호루에서 있었던 일은 비교적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기록을 보면 “을미일에 왕이 영호루(映湖樓)에 갔다가 배를 타고 놀았으며 이어 호숫가에서 활을 쏘았다. 안렴사가 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푸니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보았다. 그 중 어떤 사람은 소매를 번득이면서 흥겨워 울었고 어떤 사람은 비결을 외우면서 탄식하기를 ‘홀연히 남쪽에 한 도적이 있어서, 길이 와우봉에 들어간다’ ‘소가 크게 소리치니, 용이 바다를 떠나, 옅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하다.’ ‘옛적에 이 말을 들었더니 지금 그 증험을 보는구나!’ ”고 적어 두었다.

이 기록을 보면 공민왕이 영호루에서 활을 쏘면서 왕으로서의 일상적 활동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라 걱정에 따른 다양한 의견이 비탄한 가운데 오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어쨌든 내용을 떠나 이 기록은 안동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영호루가 꼽히고 있음을 증명하는 자료인 것이다.

공민왕 친필인 “영호루” 현판글씨는 금으로 도금된 후 안동에 도착한다. 당시 안동의 책임자인 신자전은 영호루가 왕이 직접 써준 글씨로 만든 현판을 걸기에는 초라하다고 판단하여 누각의 규모를 더욱 크게 만든 후 1367년 현판을 단다.

이후 “영호루”라는 공민왕 친필 현판은 수차례 낙동강 홍수로 인하여 물에 떠내려 갔으나 그 때마다 낙동강 하류를 수색하여 되찾아 온다. 특히 금으로 도금한 글씨 때문에 하루 사람들이 더욱 고귀하게 생각하여 찾기 쉬웠다고 한다.

예술가 공민왕

권두현 사무처장
“安東雄府(안동웅부)” “映湖樓(영호루)”라는 현판은 안동의 역사 속에서 볼 때는 홍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국가적 위기 속에서 찾은 왕이 안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간 역사적 정 황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이 현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민왕은 고려시대 왕이기 이전에 예술적 경지도 상당 수준에 이른 분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천산대렵도는 풍기는 기상과 예술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지금도 손꼽고 있다. 따라서 안동의 왕이 쓴 현판이기 때문에 중시되는 “영호루”와 “안동웅부” 현판은 서예가 공민왕의 또다른 작품으로도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권두현은 현재 (재)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문화를가꾸는사람들 대표이다. 문화를 가꾸고 사랑하다 보면  문화 속에서 밥과 꿈과 일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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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개구리 2009-03-05 21:50:39
오래 못 봤는데, 사진으로 보는군요.
안동에 남아 있는 공민왕 설화는 참으로 재미있는 소재입니다. 단편처럼 떠도는 설화도 많지만, 마을에 당신으로 좌정한 당신화도 참말 많지요.
그러고 보니, 안동에는 공민왕의 친필 글씨가 현판으로 남아 있네요.
근데, 그 현판 글씨.... 공민왕 친필 글씨가 맞겠지요?^^

문사사 2009-03-03 09:45:59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