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교육의 목표가 'F4' 만들기였나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가 'F4' 만들기였나
  • 안호덕
  • 승인 2009.03.01 1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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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초등생 학부모가 본 일제고사

며칠 전 일이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봄방학 들어간 아이가 태권도 학원에 갔다 와서 묻는다.

"아빠. 태권도 학원 그만 다닐까요?"
"아니 왜?"


느닷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아내가 대신 묻는다.

"4학년 되면 다른 학원 가야 된다고 친구들이 많이 그만 뒀어요. 이제 3학년은 3명밖에 없어요. 계속 다녀도 돼요?"

말인즉 저학년(1·2·3학년 학생)이 고학생(4·5·6학년 학생)이 되면 영어, 수학 등 공부(?)하는 학원에 보내야 하기 때문에 태권도, 피아노, 미술학원은 대부분 그만 둔다는 것. 자기도 그래야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다.

"민주야. 너 태권도 사범이 꿈이라며? 학교에서 태권도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닌데 계속하는 게 좋지 않을까? 대신 봄방학 때 엄마랑 영어, 수학 공부 좀 하렴."

이런 결정에 아이는 흔쾌히 동의했지만, 나도 아내도 일말의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과연 잘한 결정일까?

용기 없는 엄마·아빠, 일제고사 거부는 쉽지 않았다

작년 10월에 아이가 일제고사를 본다고 했다. 정부와 교육과학기술부는 신문과 방송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학력을 올바르게 측정하여 제대로 된 교육 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강변했지만 정작 교원단체, 시민단체는 학생 서열화, 학교 서열화, 사교육 팽창과 공교육 붕괴를 이야기하면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일부에서 학생들을 모아 일일체험을 나간다고 했을 때 아내나 나나 무덤덤했었다.

일제고사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일체험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가 학교에 찍히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시험 때마다 많이 틀리면 혼난다고 지레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아이에게 일제고사보다 일일체험이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겁 많은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엄마와 아빠가 일제고사를 보러가는 아이에게 시험 잘 보라는 말끝에 현실성 없는 핑계만 주고받았었다. 그리고 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하자는 선생님 한 분만 있어도 따라 하겠는데… 학부모 몇 명만 나서도 아이 데리고 동참하는 건데….'

그게 작년 10월, 아이 3학년 때 일이다.

하루아침에 거짓이 된 '임실의 기적'

'임실의 기적'이라 했던가? 기초 학력 미달 학생이 한 명도 없는 학교.

'봐라. 학원도 변변찮은 시골학교에서 노력만으로 충분히 도시 학교보다 잘 할 수 있다.'

교육당국과 보수언론은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난리를 쳤다. '남 탓보다는 자기 노력이 중요'하다는, 가뜩이나 심화되어 있는 교육 양극화를 덮을 수 있는 아주 좋은 호재가 아닌가? 그것이 임실의 기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좋은 교육환경, 대도시도 나름대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학력 미달 학생이 많은 학교, 지역은 교장, 교감 등 인사고과에 반영하고 예산 지원과 연계한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한축이 무너져 내렸다. 임실의 기적은 조작된 것이며 조작은 곳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조작은 비단 한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지금의 구조에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라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사과를 하고 교육감들이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 같이 이야기한다. 시행과정이 철저하지 못했다고. 다음부터는 철저히 하겠다고. 일제고사를 통해 줄 세우기를 안하겠다, 그만두겠다가 아니라 점수 관리를 철저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학력 미달 학생=학교 낙오자'를 만들어버린 죄책감은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대통령이 원하는 인재는 슈퍼맨?

대통령도 교육관계자의 의견과 다르지 않았다. 23일 대통령은 "분명한 것은 학력평가 자료를 가져야 맞춤형 교육 정책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일제고사 강행을 거듭 천명했다.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될 것이고 아이들은 3월초 또 한 번 일제고사를 치르게 될 것이다. 2008년도보다 나아진 것이 있다면 철저한 시험 감독, 엄정한 채점 방식, 한층 더 보강된 집계방식 정도일 것이다.

아니다. 진짜 바뀌는 것은 학교 간 경쟁이 되어버린 일제고사를 잘 보기 위해 교장은 교사를, 교사는 아이들을 무한경쟁으로 몰아세울 구조가 공고해진다는 거다.

학교의 평균을 까먹는 아이는 공공의 적으로 낙오자가 되고, 교장과 교사는 아이들의 성적으로 대접받고 승진하는 교육구조. 이런 교육 구조에서 대통령이 말하는 창의력과 폭넓은 사고력을 가진 학생을 양성하는 교육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23일 라디오 연설에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시험만 잘 푸는 그런 학생이 아니다. 창의력과 폭넓은 사고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적인 능력과 함께 다른 학생들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가짐, 튼튼한 체력,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갖춘 그런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만약 대통령이 말하는 이런 덕목들이 학생들이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라면, 그래서 교육 관료들이 이런 아이들을 육성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하고 점수화하여 평가하려 한다면 그건 학교가 아니라 슈퍼맨 양성소가 아닐까?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F4 같은 이상적인 학생(능력·실력·인물 모든 것을 두루 갖춘)을 육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면 나는 부모로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그런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 아이를 닦달할 마음은 더더욱 없다.

새 친구들 얼굴 알기 전에 일제고사라니

내 아이는 3월이 되면 이제 4학년 된다.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선생님을 만날 것이다. 이제는 먼 옛날이 되어 버렸지만 3월 신학기의 설렘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개학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3월 10일 교과학습 진단평가라는 일제고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친구들의 얼굴도 익히기 전에 가림막을 세우고 시험 문제를 풀어야 할 아이를 생각하니 꼭 이렇게 해야 하나 참담한 생각이 먼저 든다.

일제고사의 발표. 그 혼란이 가시지 않았다. 임실의 기적은 일제고사의 악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일제고사를 또 본다고 한다. 이번에는 잘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구조는 방치한 채 그냥 잘 하겠다고 한다.

중지했으면 좋겠다. 시험 때문에 교장은 교사를 채근하고 교사는 학생들을 닦달하고, 옆 친구들과 가림막을 막고 시험지를 풀어야 하는 그 악몽이 없었으면 좋겠다. 시험이 아니라 신학기의 재잘거림이 교정에 넘쳐 났으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시험이야기보다는 새로운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위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내용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2차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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