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를 막는 바리케이드인가?
신자유주의를 막는 바리케이드인가?
  • 김대호
  • 승인 2009.03.0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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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통계4] 고용을 막는 바리케이드인가?

[정치통계4]  신자유주의를 막는 바리케이드인가? 고용을 막는 바리케이드인가?

나는 1986년부터 1993년까지 구로/독산 지역에서 노동운동 판에 있었다. 대략 2년 정도는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 나머지는 노동 상담 및 노조지원 사업을 했다. 노조 조직률이 가장 높았던 1989년 호시절에는 내가 지원하던 노조가 15~20개 가량 됐다. 물론 하나 같이 조그마한 노조였다. 이 노조의 대부분은 1990~1991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탄압의 찬바람이 불자, 노조 안에 약간이라도 훈련된 활동가 1명이라도 있는 곳은 노조 간판 정도는 어찌어찌 유지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추풍낙엽이었다. 자체 해산, 핵심의 사직 등 황당한 일이 잇따랐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숱하게 노조 사무실을 들락거렸던 회사 중에서 지금까지 그곳에 남아있는 회사가 하나라도 있을까 의문이다. 내가 군침만 흘리면서 바라보던 500~1500명 규모의 회사도 대부분 이전했거나 폐업했기 때문이다. 혹시 ‘독산동 도살장’ 하나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1989년 당시 노조를 결성한 사람들은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지만......(독산동 도살장 노조는 소.돼지 내장 해체를 주로 하는 40~50대 아저씨들 20명이 결성한 노조였는데, 지하 작업장에서 북을 치면서 집회를 하는데 머리 위에 열 마리는 족히 넘을 것 같은 크고 살찐 쥐들이 파이프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집회를 구경하였다)

과거 내가 수천 번은 오갔을 구로 공단은 구로디지털단지로 되어 상전벽해가 되었다. 과거의 자취를 별로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인연은 남아, 종종 연락을 하고, 1년에 한두 번은 만난다. 마석모란공원 (박영진 열사) 묘소참배 때, 박열사 모친, 부친(작년에 돌아가셨다) 생신 때, 망년회 때...... 박영진 열사 여동생 박현희씨가 10여년 넘게 꼬박꼬박 행사/투쟁사업장 관련 안내 메일이나 안부 메일을 보내주고, 격월간으로 발간되는 [삶이 보이는 창]도 부쳐져 와서 옛 사람들의 근황과 생각을 대충 알고 있다. 물론 구로/독산동에서 오는 ‘투쟁’ 소식을 접할 때마다 대체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느낌을 억누를 수가 없다.

1. 기륭전자분회 직접고용 요구 투쟁

지난 몇 년 간 나는 독산동과 인접한 가산동에 위치한 기륭전자 분회의 ‘직접 고용 요구/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알리는 메일을 받아보았다. 2008년 10월 1일 현재 투쟁 1,135일차(농성1,081일), 릴레이단식 57일차다. 김소연 분회장은 단식 94일을 기록하고 입원하였다. 이 투쟁을 지원하는 조직에는 내가 잘 아는, 당시 썼던 내 가명을 기억하는 그 때 그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얼마 전에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만인 선언, 만인행동’ 참여자로 내 이름을 넣어도 되냐고 물어왔다. 물론 나는 거절했다.

어제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임금-소득 격차 문제를 다룬 [정치통계 4호]글을 쓰다가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니 거의 자정이 되었다. 간단히 씻고, TV를 잠깐 보는데 마침 문규현 신부, 수경스님의 ‘3보 1배-오체투지’ 순례가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다. 순례 도중에 문규현 신부님 일행은 기륭전자 투쟁 현장도 들르고, KTX여승무원 고공농성장도 들렀다. 자료화면에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권명희씨의 장례식 장면도 잠깐 비쳤다. ‘비정규직은 이 시대의 광우병, 악성 암’이라는 김소연 분회장의 글이 스쳐 지나갔다. KTX 여승무원 농성자는 기자로부터 ‘다른 회사에 취직하지 않고 왜 이리도 질기게 투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는지, ‘제가 20대 여서 그런지 큰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뽑아주는 곳이 없더라’는 멘트가 나왔다. 그래서 몇 년이 걸려서라도 직접 고용 요구 투쟁을 통해 KTX 같이 크고 안정적인 회사에 정규직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리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아주 씁쓰레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첫째는 ‘그러면 애초부터 취약한 자본과 고용 계약을 맺어 투쟁을 통해 처우 개선이 불가능한 대다수 노동자는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KTX 여승무원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자연스런 사고방식이긴 하지만, 선진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일종의 귀족주의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을 2001년 2월, 1752명의 정리해고 사태가 터진 대우자동차에서 신물이 나도록 보았다.

당시 대우자동차 직원으로서 사무직과 생산직의 사고방식과 마음씀씀이를 보니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는 전후방 협력업체 노동자가 없었다. 사무직 생산직(조합원) 포함 대우자동차 노동자 7,000명이 해고수당이든 전별금이든 기백만 원이라도 받아 가지고 떠나갈 때, 평소에 일은 원청업체 직원보다 더 많이 하고도 낮은 처우를 받으며 지내다가 대우자동차 부도 이후 회사의 휴폐업, 조업 단축 등으로 ‘악’ 소리도 한번 못 질러보고, 떠나간 최소 7만 명은 될 것 같은 전후방 협력업체 노동자가 있었는데, 이들의 눈물과 한숨은 거의 조명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들 입장에서는 명백한 가해자인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의 눈물과 한숨은 엄청 많이 조명받았다. 그런 점에서 대우자동차, KTX 직원이 태생이 양반이라면, 그 협력업체, 자회사 직원은 태생이 상놈이라 사람값이 다른 것이다. (당시 대우자동차 정리해고는 노조가 적절히 양보하고 타협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사태였는데 당시 김일섭 집행부의 이해관계 때문에 대량 정리해고 사태로 발전했다. 이는 노동계의 상식이다)

둘째는 이들의 머리에 우석훈의 [88만원 세대]의 핵심 메시지, 즉 ‘한국 20대에게는 희망이 없으니 (구조조정, 비정규직 폭증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는 메시지가 펄펄 살아 움직이는 듯 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륭전자 분회 투쟁과 KTX 여승무원 투쟁은 우석훈이 부르짖는 신자유주의 파도를 막는 바리케이드 그 자체이다. 자기 딴에는 비정규직의 확산을 막는 최일선 바리케이트다. 물론 이는 자본의 고용확대 의지를 막는 바리케이드이자, 거대한 규모의 실업자.반실업자.영세자영업자가 임노동자로 넘어오는 것을 막는 바리케이드다.

셋째는 비정규직을 없애겠다는 고귀한(?) 이상을 가지고 청춘을 불사르고 평생건강을 헤쳐가면서 하는 짓이 결국 한국 땅에서 자본의 고용 확대 의지를 죽이고, 결과적으로 거대한 규모의 실업자.반실업자와 청년세대, 미래세대에게 희망과 기회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짓인데도, 명망 높은 많은 진보 인사들은 이런 행위를 아낌없이 지지 성원하므로서 더 많은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전 세계 자본의 한국 노동에 대한 공포감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씁쓰레한 기분으로 우편 봉투를 뜯어서 [한겨레 21] 최근호를 펼쳐드니 공교롭게 우석훈의 4번째 책 서평이 있었다.(88만원 세대 이후 2권을 더 썼다) 무려 2개의 면을 할애한 서평이었다. 그렇게 좋게 평가한 서평은 아니었지만 나쁘게 평한 서평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엉성하고 사악한 책에는 2개의 면을 할애해 주고, 훨씬 공력이 많이 든 내 책은 1주일에 수 십 권씩 소개되는 두어 줄짜리 책 단신에조차 실어주지 않은 것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2. 김유선 소장 글을 통해 본 한국 진보의 문제점

9월30일자 한겨레 신문에는 ‘비정규직의 사회 경제적 폐해’라는 제목의 김유선(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객원 논설위원의 칼럼이 실렸다. 김유선 칼럼은 내가 쓰는 글만큼이나 통계가 많이 인용된다. 개인적으로 김유선의 글로부터 새롭게 안 통계가 많다. 내가 아는 한 김소장은 노동 문제를 가장 오랫동안 치열하게 천착한 분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김소장 칼럼은 조효제, 김기원, 정남구 칼럼과 더불어 내가 거의 빼놓지 않고 읽는 칼럼의 하나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노동의 상대역인 자본을 너무 모르고, 노동과 자본의 생사여탈권을 쥔 시장을 너무 모른다. 우석훈, 박노자, 진중권 등 진보진영에서 비교적 잘 팔리는 논객들은 김유선 소장 보다 더 심해서 한국 현실의 한 단면조차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일면성 내지 무지가 한국 진보의 사상이념적 후진성과 정책적 무능함이라는 폐수를 방출하는 하수관 인지도 모른다.

게 중 가장 훌륭한 논객으로 뵈는 김유선 소장의 9월30일자 칼럼 내용을 보자. 칼럼은 이렇게 시작된다.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과 대량 해고의 칼바람이 휩쓸고 간 뒤, 빈자리는 하나둘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고, ‘비정규직 남용과 차별’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860만 비정규직 가운데 한 달 월급이 100만원 이하인 사람이 440만 명이다. 이 가운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구주는 190만명이다. 통계청 통계로 도시근로자 가구 중 하위 20%가 가계수지 적자다.”
이 글에는 나도 처음 접하고 배우는 통계가 있다. 한 달 월급이 100만원 이하인 가구주가 190만 명이라는 사실! 그는 본격적으로 비정규직의 사회경제적 폐해를 말한다. 물론 오류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생활불안이 가중되고 계층간 위화감이 조성되면 노사관계가 악화되고 생활범죄가 증가한다. 사회정치적으로 불안이 고조되고 정치경제 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기업의 설비투자 의욕이 저하되고 성장 잠재력이 훼손된다. 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가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하면서 비정규직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관행으로 굳어졌다. (중략) 저출산 문제는 청년층 일자리가 대부분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비정규직 저임금 일자리인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당장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터에 결혼이나 자녀 출산은 생각하기 어렵다. 청년 실업자가 31만 명이고, 그냥 쉬었다는 청년이 27만 명이다. 취업 준비생까지 합치면 청년 ‘백수’가 100만 명을 넘는다. 이들이 청년 백수가 된 것은 비정규직 저임금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평생을 걸고 일할 만한 안정된 일자리가 없어서다”

얘긴 즉, 고용불안과 생활불안이 노사관계를 악화시키고 사회정치적 불안을 고조시키고, 기업의 설비투자 의욕과 성장 잠재력을 훼손한다는 것, 김영삼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가 비정규직 증가의 시발점이라는 것, 평생을 걸고 일할 만한 (처우도 괜찮고) 안정된 일자리가 없어서 청년 백수가 폭증하고 저출산 문제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노사분규 원인별 상세내역을 보면 1987년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분규는 단체협약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방어적 투쟁인 구조조정 관련 분규는 1999년 31건, 2001년 15건, 2003년 3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2005년 들어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단체협약 관련 분규는 1999년에 44.9%, 2001년에 63.4%, 2003년에 77.8%, 2005년에 82.2%로 늘어났다. 단체협약 관련분규는 대체로 공세적인 투쟁으로, 상당한 규모와 투쟁력을 갖춘 노조가 주도할 수밖에 없다.

2006년 현재 총 138개 사업장(제조업 65개, 비제조업 73개)의 노사분규로 인한 생산차질액(1조 2,899억 원)과 수출차질액(8억 2,900만 달러) 중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는 생산차질액의 79.3%, 수출차질액의 87.5%를 차지했다. 현대·기아자동차를 포함한 종업원 1,000명 이상 9개 대형 사업장의 노사분규 건수는 12건에 불과하지만, 생산차질액의 98.5%, 수출차질액의 98.8% 차지했다(산업연구원, 2007. 6. 24 발표). 2000년에도 현대, 기아, 대우, 쌍용 등 자동차 제조 4사의 생산차질액이 1조 493억 원으로 전체의 64.1%에 달했다.

물론 생산 차질액과 수출차질액이 그대로 손실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파업 이후 잔업과 특근으로 대개 생산차질액은 만회되며, 수출차질액 역시 해외 딜러들이 상당한 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 해외 판매 분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통계는 한국 노사분규에서 극소수 대형 사업장의 비중과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사태 직후,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은 평생고용 신화가 깨졌다면서 한 푼이라도 벌 수 있을 때 더 벌어야한다는 논리로 더 치열하게 임금인상 투쟁에 임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고용 불안이 노사관계를 악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고용보장과 노사협력 및 생산성 향상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사관계는 평생고용에 대한 암묵적 약속이 있었을 때조차 원만한 적이 없다. 한국 중소기업에서 노사분규가 현저하게 줄어 든 것은 고용 불안이 줄어들어서가 아니다. 한편 기업의 부채비율이 주요 선진국 보다 작고, 설비투자가 이전에 비해 대폭 줄어든 것은 누가 보더라도 고용불안에 기초한 사회정치적 불안의 소산이 아니라, 시장 환경의 불확실성이 결정적이다. 고용불안에다가 노사관계악화와 설비투자의욕 저하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거의 견강부회라고 할 수 있다.

비정규직 폭증도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일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업의 정규직 고용 부담이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는 상황에서 자본이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회적 폐해를 고용불안에 근거한다고 강변하는 김유선 소장 주장의 핵심은 결국 고용불안 없이 평생을 걸고 일할 만한, 처우도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부상 등으로 요약되는 세계사적 환경변화는 기술, 기능, 직업, 상품, 사업장 등 모든 존재들의 변화와 부침을 극심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한 기술, 상품, 사업장 등에 근거한 노동이 불안정을 벗어날 도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1950~80년대와 달리 한국 인재들은 국제경쟁에 완전히 노출된 산업계로 올 유인이 별로 없다. 금융 역시 기업과 마찬가지의 생존 위협을 느끼는 존재이다. 사회문화적으로 한국은 노동이 거친 만큼 자본도 거칠다. 한국 노동이 기계적 평등주의와 조폭마인드의 결합체라면 자본은 봉건주의와 전제적 폭군 마인드의 결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자본의 노동에 대한 흡수력 내지 통합력이 낮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본이 고용을 확대하고 안정화 시킬까? 과연 고용불안을 노동이 가열찬 투쟁으로 자본을 압박하여 해결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정의로울까? 도대체 김유선 소장이 생각하는 비정규직의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어떤 것일까? 김유선은 이렇게 말한다.

“비정규직 고용이 증가하고 차별이 심화된 것은 기업의 ‘인건비 절감에 기초한 단기수익 극대화 전략’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략은 이미 한계상황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시장의 수량적 유연성이 극단으로 치닫고, 제조업의 인건비 비중이 1977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인 9.8%임에도 기업의 경쟁력은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많은 문제들을 ‘인건비 절감에 기초한 단기수익 극대화 전략’에서 찾는 논리는 김유선 보다는 한국 경제를 주주자본주의라는 틀로서 설명하는 학자들의 입에서 많이 나온다. 요컨대 주주자본주의(주주이익 중시주의)가 단기수익극대화 전략을 낳고, 이것이 자본으로 하여금 인건비 절감에 진력하게 하고, 결국 비정규직 폭증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업의 생리와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분석이다. 노동과 관련한 기업 요구의 핵심은 창의와 열정이 뛰어난 인재와 고용임금 유연성이다. 쉽게 말해 더 줄 사람 더 주고, 덜 줄 사람 덜주며, 필요한 사람 오래 붙들어두고, 필요없는 사람 내보내는 것이다. 특히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변화.부침이 심한 시대에는 위기시 고용임금 유연성을 보장받는 것을 엄청나게 중시한다. 그러나 노동은 다른 상품과 달리 적기에 적량을 적정가격으로 적소에 투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에 관한 한 일정 정도 규제(최저임금제, 해고사유제한 등)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노는 20%를 잘라내면 나머지에서 또 노는 20%가 나온다는 개미사회의 일화로부터, 기업이나 사회는 항시 밥값 못하는 20% 정도는 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인건비 부담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 한마디로 인건비 절감하려고 비정규직을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그런데 대기업, 공기업 등은 퇴직금 누진제, 자녀 학자금 등 복리후생비를 엄청나게 높여놓아서 정규직 고용에 따른 인건비 부담도 높여 놓았다)

결국 한국 기업이 정규직 고용 확대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유사시 고용 조정의 어려움 때문이다. 법적으로도 어렵고, 대우자동차나 기륭전자 투쟁에서 보듯이 노동의 반발도 너무나 쎄서 자칫 기업이 파산 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대기업 노동의 경우 교섭력도 강하지만, 그 처우개선 요구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경우 동일노동 동일임금 컨센서스가 있어서 수익이 많이 나는 기업이라 할지라도 노동의 양과 질이 비슷하면 임금 수준이 끝없이 올라가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자본의 수익이 허용하고, 교섭력이 허용하는 한 끝없이 올라간다. 그것도 성과. 직무와 상관없이 연공서열과 단체협상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노동은 지금 있는 곳에서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해서, 작고 가난한 회사에서 크고 넉넉한 회사로 이동하고, 임시.일용 허드렛 일꾼에서 정규 핵심(지식)노동자로 상향하는 방식으로, 처우를 개선하고 안정된 고용을 확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KTX 여승무원들처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처럼 좋은 회사에 정규직으로 들어가서 한방으로 팔자를 고치려 한다.

성과,직무나 노력,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입사 시험이나 연줄이나 운을 통해 얻은 '소속'으로 팔자를 고친 사람들은 이제 그곳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 그 곳을 나오면 자신의 노력, 능력으로 비슷한 처우를 받을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 많은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자 중에서 몇 년의 해고기간 동안 대우자동차 보다 더 좋은 직장을 구한 사람이 거의 없다. 당연히 사망자, 연락두절자 약간을 빼놓고는 거의 복직하였다. 이로인해 조합원 평균연령은 40대 중반에 근접하고 있다. 1987년만 하더라도 대우자동차에서 40대 초반의 노동자는 '원로'(늙은노동자)로 대우 받았으나 지금은 '애'취급을 받는다. 있다면 '기저귀 찬 아기' 취급을 받을 20대는 당연히 거의 없다. 30대도 별로 없다. 안과 밖의 격차가 클수록 안과 밖의 순환이 어렵다. 구조조정도 어렵다. 몇년에 걸쳐 정문 앞에서 농성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우자동차, 현대자동차, KTX 같은 '좋은 곳'의 고용확대도 어렵다. 꼭 필요하면 임시. 일용직을 뽑거나 외주화 시킨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대기업 종사자 비율이 유달리 낮고, 외주하청 공정이 많고, 비정규직이 유달리 높은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진보세력은 대기업, 공기업 노조원들이나 공무원들처럼 좋은 시절에 좋은 회사(정부)와 고용 계약을 맺어 투쟁을 통해서, 노동의 양.질과 상관없이 연공서열이나 단체협상으로 처우를 개선하고 안정된 고용을 확보하는 성공신화(?)의 패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있다.

김유선은 문제의 원인을 고용불안과 자본의 고용유연화 충동에서 찾기에 그 해결책도 결국 자본을 옥죄고, 기존 고용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사회적 규제를 강화하는 쪽이다. 이런 식이다.

“기업이‘인건비 절감을 통한 단기수익 극대화’라는 일종의‘죄수의 딜레마’상태에서 벗어나‘인적자원 개발에 기초한 장기수익 극대화’와‘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비정규직 남용과 차별 해소, 법정 최저임금 현실화’등 사회적 규제를 강화하고, 기업 지배구조를 이해관계자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

노동에 대해서 일정한 사회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적자원 개발에 기초한 장기수익 극대화가 가능만 하다면 누가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적자원개발이 단순조립노동부터 지식노동까지 모든 노동에 다 적용된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소장 대안의 핵심인 기업기배구조를 이해관계자 모델(조정시장경제)로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는 김호기 교수 비판 글에도 실었지만, 다시 한 번 말한다면 그것은 은행, 노조, 주주, 경영자 등 기업이해관계자들이 시장원리를 존중하는 가운데, 상호 신뢰하면서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잘 해결하고, 국가가 조정.통제에 능하면 어느 정도 효율성을 발휘할 수가 있지만 한국은 이해관계자들의 상호신뢰에 기반을 둔 ‘협치’로 시장원리(소비자 주도권)나 투표(유권자 주도권과 국가의 주도권)나 자본의 주도권(initiative)를 대신하는 것은 사실상 헛된 꿈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유선을 비롯하여 한국 진보 논객의 문제점

첫째 노동의 이해와 요구를 전투적으로 주장은 하지만, 그를 고용할 자본(혹은 기업)과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의 담지자인 지식근로자의 이해와 요구를 너무나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이 알아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은 전혀 내 놓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이미 괜찮은 조건으로 고용되어 안정을 절실히 원하는 노동의 이해와 요구를 중심에 놓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는 불안할 고용 그 자체가 없는, 거대한 규모의 실업자, 반실업자, 영세자영업자, 청년세대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대선 때 정동영과 권영길의 동반 추락 현상은 이 둘 다가 기존의 기득권을 거머쥔 조직 노동(대기업, 공기업, 금융노조, 공무원, 상층 화이트 칼라)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해 왔고, 결과적으로 실업자, 영세자영업자의 이해와 요구에 지극히 둔감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한국의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관계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이다. 전임교수와 정규직의 노동의 양, 질에 비해 지나치게 높고 안정적인 (선진국의 능가하는) 처우가 시간강사와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정규직 문제와 고용율 문제, 영세자영업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상식적인 해법은 기득권 노동자들과 자본과 국가/사회 3자가 양보와 타협을 통해서 부담을 나눠지는 것이 기본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세계사적 환경변화로 인해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고용불안)를 자본의 책임으로 돌려, 노동의 ’對자본 결사 항전‘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과거와 같은 좋은 일자리는 구조적으로 공급하기 힘든 상황에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단결 투쟁의 성공신화를 재연하려고 하니 어떻게 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동은 자본의 등에 업혀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자본은 노동을 태운 '말'이나 '수레'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실험 결과가 보여주듯이 노동이 자본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면, 노동도 무력화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그래서 서로를 적당히 압박하고 적당히 배려해야 하는 관계라는 얘기다. 자본이 강하면 등에 업힌 노동이 격렬하게 몸을 놀릴 수 있지만, 자본이 약하면 등에 업힌 노동은 자본을 조심스럽게, 주저앉지 않게 다뤄야 한다.

김대호 소장
기륭전자 분회와 KTX여승무원의 투쟁에 대해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의 요구와 투쟁 자체가 원천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소규모 자회사 정규직 채용' 같은 사회의 보편적인 정서에 비추어 볼 때 그런대로 합리적인 타협안을 거부하고,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상징으로 만들어 몇년에 걸친 투쟁으로 국내외 (특히 중소)자본을 공포에 떨게 만들어 버린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죽기살기로 싸울 곳도 아니고, 그럴 사안도 아니고, 그럴 정치적 상황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슨 선과 악의 싸움처럼 죽기살기로 싸웠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이다. 기륭전자 주가는 액면가의 겨우 2배 수준인 1000원에서 왔다갔다하는데, 이는 시장이 기륭자본을 극히 불안하게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한국 노동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처지.조건과 자본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처지, 조건에 대한 천착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한국 조직노동, 제조업, 정규직, 공무원, 전문직 등 선망의 대상이 되는 노동의 상대적 지위(격차), 처우와 자본의 능력(경영실적)에 대한 정확하고 종합적인 이해의 문제이다. 이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통계표로서 밝히려고 한다. 이는 통계표 없이는 제대로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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