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마당] ③ 허기진 날들의 기억 - 감자
[추억마당] ③ 허기진 날들의 기억 - 감자
  • 김윤한
  • 승인 2009.03.09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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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의 시대

우리가 어릴 적에는 모든 것이 다 모자라는 시대였다. 그러나 다른 것은 견딜 수 있어도 양식이 모자라 배가 고픈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가을에 추수를 해서 긴 겨울동안 먹고 나면 꼭 다음 해 보리가 나기 전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식량이 떨어졌다. 그래서 보리를 추수할 때까지 끼니를 이어가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절실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이 시기를 가장 넘기 어려운 때라고 하여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내 기억으로는 어린 우리는 보리밥이나 조밥일망정 굶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아버지 어머니는 이 시기를 넘기기 위하여 나물을 절반 이상 섞은 죽을 끓여 잡수시는 것을 많이도 보아 왔다.

그 어렵고 궁핍한 눈물나는 시기에 피는 꽃이 감자 꽃이었다. 기억으로 흰 꽃 또는 보랏빛으로 기억되는데 감자 꽃이 피면 감자가 익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채 덜 익은 감자를 캐서 모자라는 식량을 대신했다.

아마 그 시기쯤이면 들판에서는 속절없이 뻐꾸기가 울어댔고 찔레꽃들이 막 지고 봄볕이 슬프도록 따가워지는 그런 때였을 거다.

지겨운 감자

어릴 적 우리가 먹던 것은 대개가 자줏빛이 나는 감자였다. 자주감자는 감자 눈이 옴폭하게 패어 있어서 깎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기는 깎는다기 보다는 긁는다고 했다. 감자의 속살이 아까워 겉껍질만 숟가락으로 긁어내는 거였다. 그나마 겉껍질은 여물에 넣어 소에게 먹였다.

먹을 것은 부족했지만 어른들은 항상 일손이 바빴고 나는 남자라 음식 일을 시키지 않았으므로 감자를 긁는(?) 일은 항상 여동생 몫이었다. 여동생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들 무렵부터 지겹도록 감자를 긁어댔다.

부모님이 들녘으로 나가시는 아침부터 감자를 긁으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부지런히 감자 껍질을 벗겨내야 했다. 만일 부모님이 점심시간에 돌아오시기 전까지 그 일을 마치지 않으면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감자 껍질을 긁어내는 도구는 누런 색 놋쇠 숟가락이었다. 얼마나 감자 껍질을 많이 긁어냈는지 숟가락이 닳아서 반달 모양이 될 정도였다.

감자를 삶는 것도 어린 여동생 몫이었다. 무쇠 솥에 감자와 사카린(단 맛이 나는 식품 첨가물)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아궁이에 불을 때면 솥뚜껑 사이로 휘파람 소리가 나며 수증기가 솟아오르면 감자가 익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그러면 불 때기를 그만하면 감자 삶는 것은 끝이 난다.

감자가 많은 무렵 점심은 대개 감자였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감자를 하나씩 집어먹었다. 그리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셨다. 그나마 신 김치라도 남아 있으면 감자와 궁합이 딱 맞겠지만 궁핍한 시대, 그 무렵까지 김치가 남아있는 집은 없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보관 중 썩은 감자는 한데 모아 단지에 담아 밀봉한 채 보관했다가 나중에 잘 썩은 것을 물에 가라앉히면 가루가 남게 되는데 그것으로 안에 고물을 넣어서 떡을 해 먹으면 그것 또한 별미였다. 그러나 수 주일 동안 단지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를 감수해야 했다.

아련한 추억들

감자가 날 무렵이면 하루 세 끼 감자와 만나야 했다. 쌀을 아껴 먹기 위해 아침밥에도 감자를 쪼개 보리쌀과 좁쌀과 함께 밥을 해 먹었다. 밥을 떠먹다가 밥 사이에 끼어 있는 감자를 꺼내 먹는 재미도 있었다. 저녁밥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점심은 밥 없이 주식이 감자였고.

그 무렵은 아이들에게 간식이라고는 없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는 감자는 중요한 간식거리였다. 쇠죽을 끓이고 난 부엌에 남은 불에다가 감자를 껍질째 묻어놓으면 감자가 잘 구워졌다. 껍질이 탄 감자를 쪼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먹는 것은 삶아 먹는 감자와 다른 또 다른 대단한 간식이었다.


쌀이 귀할 무렵에는 학교에 싸 가지고 가는 도시락밥에도 감자를 군데군데 박아 넣었다. 게다가 도시락 반찬은 감자를 잘게 채 썰어 간을 한 채 볶은 것을 넣기도 했다. 감자는 그렇게 일 년 내내 우리와 가까이 있었다.

주위에 물어보니까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감자무지’라는 것이 있었다. 모래사장에 가서 장작불을 지핀 후 불이 한창 탈 때쯤 감자를 한 소쿠리 쏟아 붓고는 그 위에 젖은 나뭇가지를 덮고 모래를 덮었다. 그리고 한참 뒤 삽으로 모래를 파내면 감자가 살짝 껍질이 탄 채 속이 노릇노릇 잘 익어 나왔다.

지금도 그 맛이 아련히 기억에 남아 있다. 따지고 보면 요즘 아프리커 원시 부족에서 고구마나 감자를 삶아 먹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감자의 교훈

세월은 많이 흘러 이제는 어렵더라도 끼니를 굶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그 덕분에 우리들 허기를 면하게 해 주었던 감자도 우리 곁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일상 에서 감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감자의 종류도 어릴 적 자주감자에서 지금의 감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감자가 우리의 허기를 면하게 해 주는 주역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감자는 아직도 우리 생활 깊숙한 곳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지금은 별식으로 치는 수제비를 먹더라도 썬 감자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뭔가 허전하다. 갈치나 고등어조림에도 바닥에 감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어야 제 맛이 난다. 아니 오히려 생선 조림의 맛이 감자에 배어 있어 감자가 생선보다 더 맛날 수도 있다.

▲ 김윤한 시인
그 뿐만 아니라 감자는 현대 음식에도 남아 있다. 샐러드의 주 원료는 감자이다. 어쨌든 궁핍의 시대를 우리와 함께 해 온 감자는 세월이 흘러 비록 그 때의 자주감자는 아니지만 우리 곁에 남아서 아련한 추억을 말해주고 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음식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굶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배부름이 소중한 것을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들의 목숨은 한 때 감자로 인해 소중하게 연명해 왔다는 것을 새삼 기억해야 할 것이다.

풍요의 시대, 그 풍요의 고마움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오히려 풍요함이 아니라 그 반대인 빈곤의 역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며 우리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감자가 오늘 아침 우리에게 묵언의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김윤한은 현재 안동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시인이자 수필가 등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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