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난로의 추억
나무난로의 추억
  • 유경상
  • 승인 2012.10.3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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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왜 그리 추웠을까?

나무난로를 설치했다. 난 결재만 하고, 설치는 두 記者가 해 치웠다. 역시 육군병장 출신들 답다. 며칠 전부터 사무실 겨울 난방에 대한 의견이 대두됐다. 지난해 경유 값이 엄청 들어갔다. 두말을 배달시키면 약5만 원 정도 깨져 나갔다. 며칠 지나면 말통이 비어졌고, 또 배달시키게 되고.... 문제는 마른장작을 준비해야 하는데, 주말에 손도끼 들고 산에 간다고 장담을 하니 덜컥 구입을 했다. 난로에 불꽃이 타오르니 금방 뜨뜻해졌다.

밤 몇 개를 넣으니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고, 잠깐이었지만 겨울의 로망을 느낀다. 하지만 60년대 태어난 우리세대는 나무난로에 대한 기억이 잔인한 편이다. 73년에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 후 초겨울이 다가오면 담임의 인솔아래 학교 뒷산으로 오르곤 했다. 작은 덩치의 꼬맹이들이 동원되어 온산을 헤매며 솔방울과 갈비(솔잎이 떨어져 수북이 쌓인 마른솔잎 무더기), 나무 꼬쟁이부터 뿌리의 밑둥치 까지 있는 대로 끌어 모아야 했다. 나이롱 푸대자루가 터져나가도록 힘껏 때려 넣어 동여맸고, 그걸 질질 끌고 학교 창고까지 운반해야 하는 고된 특활시간(?)이 있었다. 창고에는 한 구석에 석탄(갈탄인가?)이 보관되고 있었지만, 그것으론 한겨울 추위를 녹이기엔 언감생심 이었으리라.

그땐 또 왜 그리 추웠을까? 가난한 시골형편에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아줄 두툼한 옷이 부족했으리라, 하지만 분명 더 추웠다. 눈비가 섞이어 휘날리는 날이면 운동화를 신어도 양말에 물기가 들어와 서걱거렸다. 고무신을 신은 동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언발이 되었다. 등하교 길에 시린 발의 통증을 잊기 위해서는 뜀박질이 최선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시험채점을 매기는데 남아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것도 고역이었다. 교실난로불은 사그라들고 창밖의 사위는 어두컴컴해지고 있어 십리 넘는 시골길을 가야 할 걱정부터 앞섰다. 허~ 작고 작은 꼬맹이가 육년간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매일 학교 길을 오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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