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봉정사의 비밀
공민왕과 봉정사의 비밀
  • 권두현
  • 승인 2009.03.11 11: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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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을 찾아서 (3)

봉정사는 비밀이 많은 사찰이다. 봉정사의 규모가 얼마였는지, 혹은 봉정사에 어떤 불교적 의미의 역사가 축적되어 왔는지는 6.25 전쟁 당시 봉정사와 관련된 서적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의문만 남아있다. 그러나 봉정사에 지금 남아있는 유물과 유적만으로도 봉정사는 한국불교사, 안동지역 문화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찰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봉정사의 가치를 높여주는 유물 중 하나가 바로 공민왕의 친필 글씨라 여겨지는 현판 글씨 한 점과 공민왕이라 여겨지는 탱화 5점이다. 여기에 덧붙혀 봉정사가 위치한 마을의 지명 유래 전설과 봉정사 대웅전이 건립된 시기도 공민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 흥미를 끈다.

공민왕의 다섯 왕자 태를 묻고

봉정사가 위치한 마을이 서후면 태장리이다. 이 마을이 태장리로 불리게 된 것은 공민왕의 다섯왕자의 태를 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 마을의 유래가 공민왕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는 것이다.

한국 지명에 태장, 태무덤, 태실 등의 명칭은 대부분 왕 혹은 역사적인 인물의 태를 묻었던 것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태는 생명을 품고 있던 것이어서 예로부터 신성하게 여겼다. 가령 태령산(胎靈山)이라는 이름은 김유신의 태를 이곳에 묻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태에 대한 신성관념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의 태는 더욱 중시하여 태를 묻은 곳에 반드시 태실을 건축하여 일반 무덤 이상으로 제례를 올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보면 신종 원년(1198년)에 김포현에 왕의 태를 묻었다는 이유로 이곳에 현령관(縣令官), 지금으로 말하자면 읍장급의 관리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은 태와 관련된 문화적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공민왕의 다섯아들의 태를 이곳 서후면 태장리에 묻었다는 것은 매우 커다란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주목을 끄는 것은 왕의 태를 묻은 후에 받드시 태실(胎室), 즉 태를 지키는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다. 만약 태실을 건립하지 않으면 인근에 사찰에 왕의 태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가까운 영천의 은해사는 소속 암자(큰절에 보속된 작은 절)인 백흥암에 조선시대 왕인 인조의 태를 모시게 됨으로써 커다란 사찰로 변모하였다. 즉 왕의 태를 모시게 되는 사찰은 국가의 지원으로 사찰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현재 봉정사 대웅전의 건립시기도 공민왕 다섯왕자의 태를 묻었다는 태장리 전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공민왕의 다섯왕자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을 때 이곳 태장리, 특히 봉정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진여문” 과연 공민왕의 글씨!

봉정사 안쪽에 들어서면 최근 봉정사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하여 건립한 유물관을 보인다. 봉정사, 사실 큰 사찰은 아닐진대, 무슨 유물이 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봉정사는 말 그대로 보물창고이다. 그 보물 중 하나가 공민왕의 친필로 여겨지는 현판 하나이다.

현판은 그리 크지 않다. 글씨는 진여문(眞如門)이라 새겨져 있고 왼쪽 상단에 려공왕보묵(麗
恭王寶墨)이라 씌여져 있다. 진여란 ‘진실로 그러한 것’ 말하자면 불교의 참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왼쪽 상단에 씌여진 글을 굳이 해석한다면 “고려시대 공민왕의 보물과 같은 글씨”라는 뜻이다. 이로 보아서 이 현판은 공민왕의 글씨라고 보여 진다. 하단에 글씨가 씌여진 시기를 적어 둔 듯한 것이 보인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진여문은 대웅전과 만세루 사이에 난 작은 문의 현판이었다고 한다. 즉 지금 대웅전 마당의 난 계단에 문이 하나가 더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문에 걸린 현판이 진여문이라는 공민왕의 글씨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안동웅부”라는 글씨와 “영호루”라는 글씨에 비하여 조금 초라해 보이는 글씨체가 그것이다. 물론 작은 글씨이고, 나무에 새겨진 것이라 느낌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이것 또한 봉정사와 공민왕의 관계를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대왕탱화 속의 주인공은

봉정사 후불 탱화가 발견되어 한때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고려시대의 후불탱화가 남아 있는 것이 드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후불탱화 이외에 공민왕의 초상화라고 여겨지는 탱화 5점이 봉정사에 전해온다. 소위 “대왕탱화”가 그것이다. 탱화를 보면 모두 5점이 비슷한 인물상으로 나타나 있다. 옷을 입은 것이 다르고, 손에 쥔 방향이 다르다.

이 탱화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공민왕을 그린 그림이고, 그래서 대왕탱화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봉정사에 전해오는 이 탱화를 본 후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우선 탱화가 다섯가지 색상을 사용한 옷을 입고 있고, 주어진 구도가 사찰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오제탱화”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오제탱화는 중국의 오행사상이 불교에 영향을 준 탱화로 추정되는데 한국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김용사, 통도사에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김용사, 통도사 탱화와 비교 작업 등의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겠다. 오제탱화가 맞다면 오제란 결국 다섯방위, 혹은 다섯성질의 대왕을 뜻하는 것이므로 대왕탱화라고 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겠다.

▲ 권두현 사무처장

다만 오제탱화 그 자체로 본다면 대사찰이 아니고서는 전승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봉정사의 절의 규모가 비록 지금은 작았지만 과거에는 매우 큰 사찰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물인 것이다. 또한 오제탱화 그 자체로서 공민왕의 초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안동지역에서 공민왕을 섬기는 동제가 지금도 많이 남아있고, 불교적인 색채가 강했던 고려시대의 정서상 왕을 신중의 한 존재로 모시는 것은 당시 정서상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안동과 같은 벽지에 왕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한 일이며 왕은 그 자체로 신격체이기 때문이다.

 [권두현은 현재 (재)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문화를가꾸는사람들 대표이다. 문화를 가꾸고 사랑하다 보면  문화 속에서 밥과 꿈과 일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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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사 2009-03-13 12:17:09
굉장히 바쁜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바쁜 와중에 좋은 글도 올리시고
보기가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