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가는 길
그녀가 가는 길
  • 정순임
  • 승인 2013.01.30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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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정순임 (고전한문 번역가)

新月
新月紅欄掛玉鉤 초승달은 붉은 난간 주렴위에 걸려있고
夢廻樓上自生愁 누대에서 잠깨니 서글픔 절로 쌓이네
西風不解離腸斷 서풍은 애끓는 이별의 아픔 알지 못하고
吹動梧桐報早秋  오동잎을 흔들어 이른 가을 알리네
 
그녀는 이른 가을 어느 날 밤 경치 좋은 어느 곳에 지어놓은 누대에 갔나봅니다. 살폿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이제 막 나와 손톱만한 초승달이 붉은 난간에 쳐 둔 주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리던 날 해그름 나절에 낮잠에서 일어나면 이유도 없이 슬퍼졌었지요. 행여 깬 자리에 아무도 없으면 소리 내어 우는 것으로 그 슬픔을 달랬던 기억이 납니다. 하물며 그녀는 이별의 정한을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누대에서 바라본 초승달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할 일이니, 그 속에 떠난 님에 대한 아픔이 녹아내리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겁니다. 
 

달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정경이거늘 무정한 서풍은 간장이 끊어지는 이별의 슬픔 따위는 모른다는 듯 오동나무 잎을 흔들고 있습니다. 떠난 님만으로도 아픈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쩌자고 바람은 나뭇잎으로 부는 것인지.....하기사 달이나, 바람, 오동잎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달이, 바람이, 오동잎이 없었다고 해도 해와, 비, 들꽃 하나에도 떠난 님은 남은 사람의 애간장을 끊었을테지요. 사랑과 이별이 한 몸이라면 자연과 시도 한 쌍입니다.

山月
山月皎如燭  산속에 뜬 달은 촛불처럼 밝은데
山窓夜定遙  산창에 깃든 밤 길기도 하구나
寒鴉啼啞啞  추위에 갈까마귀 까악까악 우는데
霜葉落蕭蕭  서리 맞은 낙엽은 우수수 떨어지네
 
이제 손톱만하던 초승달은 휘영청 밝아졌습니다. 전기가 없었던 시절 제일 밝았던 불은 촛불입니다. 저희 고향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기가 들어와서 늘 호롱불을 켜고 지냈었지요. 가끔 촛불을 켜면 그 때의 그 밝고 환함이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이날 밤 만난 달빛이 그랬나봅니다. 그런데 밤은 길기만 합니다. 함께 할 누군가가 없으니 적막한 산 속의 밤이 길 수밖에요. 애간장 끊어지는 밤, 산에서 만난 환한 달빛, 눈물 한 방울 떨구기에 적당한 그 시점에서 이번에는 갈까마귀가 울어댑니다. 서풍이 불어 추위는 더해 가는데 어쩌면 갈까마귀도 짝을 잃었나 봅니다. 게다가 한잎 두잎이 아니라 서리를 맞은 낙엽들이 아주 줄지어 떨어져 내립니다. 
 

앞의 시보다 이별의 아픔은 한층 더 또렷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잃었기 때문일까요? 아닐 겁니다. 아마도 시간이 가면서 애초의 원망은 잊고 그리움만 가슴에 남았기 때문일 겁니다. 두 시를 놓고 읽다보니 그녀가 바라보는 풍광과 그녀의 속내가 다 그려집니다.

큰아이가 여섯 살 때였을 겁니다. 음악을 틀어 놨더니 듣고 있다가 설거지 하고 있는 내게 쪼르르 달려 와서는 "엄마, 근데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노래가 됐을까?" 했습니다.-저는 그때 우리 아이가 천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이 어찌 노래가 있으며, 그것이 없이 어찌 시가 있으며, 사랑이 없이 존재하는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죽이 쓴 시랍니다. 설죽은 본명이 月蓮이고 여종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사대부 남정네들 어깨너머로 글을 배워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오늘 멋진 분의 시를 읽으면서 그녀가 갔던 길에 제 마음 한 자락 얹고 가만히 내가 가야할 길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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