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계절은 봄이다
그녀의 계절은 봄이다
  • 정순임
  • 승인 2013.03.06 14: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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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정순임(고전한문 번역가)

이월 한 달, 안동대학교에 올라와서 논문을 읽으면서 지냈다. 방학이라 아이들이 빠져나간 학교는 너무도

▲정순임 고전한문번역가
조용했고, 신관 도서관 2층 정보실에 배치되어 있는 오십여 대의 컴퓨터는 내 독차지였다. 삼월 초 연휴 동안 우울했던 맘 자락을 보듬어 안고 다시 올라온 학교는 지난 달 그 모습이 아니다. 어제가 개강이라 아이들은 복작이고, 도서관 정보실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간혹 자리가 나서 앉아보지만 아, 나는 학생이 아니라서 로그인을 할 수가 없다. 방학 중에만 학생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개방을 하는 거란다. 오전 시간은 찾아볼 자료가 있어 5층 고서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지도교수님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구내식당으로 갈까 하다가 오랜만에 중국 음식 어떠냐는 선생님 말씀에 좋다고 내려간 논골, 첨밀밀이란 중국집엔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마침, 한쪽 구석 2인용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이 있어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와글와글, 재잘재잘 삼삼오오 모여 앉은 아이들 소리가 돋아나는 새싹들의 아우성처럼 싱그럽다. 갑자기 한 이십 몇 년쯤 시간을 거슬러 내 대학시절이 머릿속에서 샘물처럼 퐁퐁 솟아난다. “선생님은 정말 복 받으셨어요. 어디에서나 젊은 기운을 막 느끼고 받고 사시니까요.” 했더니, 교수님께서 “그래, 그래서 내가 안 늙었잖아.” 하신다. 맞다, 그냥 한 삼십분 가량 그 속에 앉아 있기만 했는데 젊고 이쁜 기운들이 막 스며든다.

점심을 먹고도 자리를 잡지 못해 논골에서 솔뫼까지 한 바퀴 호젓이 걸었다. 써야하는 논문도 미뤄두고 걸으니 난 내가 저 아이들과 동년배인 것만 같다. 오늘만큼은 대학을 졸업한 딸이 있다는 건 일급비밀이다. 그런데 아무리 헤집고 다녀도 길모퉁이 어딘가 하나쯤 있어야 할 까페가 없다. 온통 술집과 밥집 뿐이다. 어차피 컴퓨터 작업을 못하게 되었으니 분위기 괜찮은 까페에 앉아 책이라도 읽으며 행복한 공상에 빠져 들고 싶어 시작한 산책인데, 어쩔 수 없이 다시 학교로 올라와 운동장이 보이는 벤치에서 한참동안 햇님과 맨살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운동장 가를 따라 도는 도로에 싸이클을 타는 여학생이 있었다. 싸이클 뒤에 타이어를 달고 혼자서 열심히 운동을 한다. 아마도 선수인가보다. 나는 그 시절 저 아이처럼 목표를 위해 열정적이었나 생각해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시대의 절망적인 현실을 온몸으로 앓고 살아내느라 바빴던 아이 하나가 그 여학생의 싸이클 뒤를 따라간다. 위정자들이 보내준 최루탄 가스에 화염병으로 화답하면서 목이 터져라 민중가요를 부르는 내 동지들도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걸어간다.

아직은 잊히기 싫은 듯한 북풍의 심술에 도서관에 들어와 5층 검색 컴퓨터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지금의 난 열정적인가? 물어본다.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럼 그 열정은 식었는가? 아님 사라졌는가? 그건 아니다. 조금 지쳐 잊고 있었을 뿐이다. 박사과정 입학을 상의하러 가서 만난 고려대학교의 모 교수님께서 “난 지금껏 왜 숙제하듯 살았는지 모르겠어, 축제처럼 살았어도 됐을텐데....정선생은 매일을 축제처럼 살아” 하셨을 때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삶의 무게에 눌리고 지쳐서 내가 서있는 곳이 축제장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던 서글픔이 교차했던 것이다.

난 다시 학생이 되려고 한다. 내 삶에서는 마지막이 될 학생 신분의 날들을 축제처럼 살고 싶다. 일도 하고 돈도 벌어가면서 학생으로 산다는 게 오늘 이 학교를 채운 꽃다운 그네들처럼 파릇하기만 할 수 없겠지만 또 다시 출발점 앞에 서서 스타트를 기다리는 내가 좋다. 나는 내가 인생이란 나무를 심고 그것을 가꾸고 산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껏 한해살이 식물들을 갈고 허겁지겁 거둬 들이면서 당면한 현실을 넘기에 급급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금 난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당분간 내 계절은 봄, 봄, 봄, 그리고 또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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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2013-03-19 14:31:22
정선생님 봄이라는 계절은 새로이 오는 것이나 꼭 과거를 달고 오는 듯 합니다. 축제처럼 처음처럼 살기에 저도 한표 던집니다요.

이교 2013-03-13 09:05:28
축제처럼 살아보겠다는 마지막 다짐에 마음이 울렁입니다. 좋은 글,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