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잔인하지만 살아 있음은 아름답다
역사는 잔인하지만 살아 있음은 아름답다
  • 이위발
  • 승인 2013.04.12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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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에세이>이위발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시인

올 봄의 전령사도 어김없이 남쪽에서부터 봄바람을 타고 올라 온 봄꽃이었습니다. 창밖을 달리는 강변 바깥 풍경은 곡우가 멀지않았음을 아는지 벚꽃들이 분분히 낙화의 유희를 즐기고 있습니다. 담장이나 도로가엔 개나리와 목련이 도토리 키 재듯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나른한 봄날입니다. 라디오에서 뉴스속보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오늘 따라 경직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봄바람은 꽃과 함께 우리들 곁에 있지만 북쪽에서 불기 시작한 전쟁바람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불편한 봄날이기도 합니다.

이 순간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역사에 회자될 고 권정생 작가의 유언이 떠올랐습니다. 라디오에선 계속해서 여자 아나운서가 ‘북한 도발’에 대한 멘트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얼마나 전쟁이 참혹했기에 환생까지 포기할 정도로 유언장에 기록을 했을까 하는 떨림에 기억을 애써 지우는 사이 차는 도립 안동도서관에 도착했습니다.

올 해로 도서관 주부독서회 회원들에게 문학 강의를 한지도 삼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강의는 고 박완서 소설가의 대표적인 소설 <엄마의 말뚝>을 낭독하고 작품 분석과 품평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황해도 개풍 출신인 그녀는 전쟁을 직접 경험한 소재를 통해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분단사의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우리 문단의 대표적인 여성작가였습니다. 이년 전 팔십 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오늘도 지난 강의 때 나타났던 그 상황이 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빨리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지난 시간엔 고 이청준 소설가의 <눈길>을 낭독하다 터졌던 일이었습니다.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눈길을 걸으며 아들의 작은 발자국마다 눈물을 뿌리며 아들 잘 되기를 기도하는 어미의 마음...마을 어귀에서 울면서 시린 눈으로 비쳐드는 아침햇살이 부끄러워 동네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어미의 애틋함을 표현한 문장에서 울음이 터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예상했던 대로 낭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울컥하더니 낭독이 멈춰버렸습니다. 그 이후엔 이어졌다간 멈춰지고 멈춰졌다간 이어지는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나 죽거던 내가 느이 오래비한테 해준 것처럼 해 다오. 누가 뭐래도 그렇게 해다오.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기에 부탁하는 거다."

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권총으로 사살된 오빠가 죽고 난 뒤 어머니는 아들을 화장한 후 북쪽을 향해 자신이 직접 유골을 뿌렸습니다. 그 짓을 당신이 죽으면 딸에게 오빠처럼 해 줄 것을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내용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강의를 하던 저도 감정을 애써 감추느라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습니다.

6· 25 전쟁으로 인해 이산된 한 가족이 겪은 비극을 통해 작품으로 분출되고 있는 슬픔의 공감이 그렇게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육십년이 지난 분단의 비극은 아직도 우리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로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작가는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의 정신 착란 속에서 그 역사의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겨우 낭독이 끝나고 작품에 대한 분석과 품평이 이어졌지만 강의가 제대로 이어지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뒤풀이 식사 자리에서 이구동성은 ‘꼭 설명해야 됩니까?’였습니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튼튼한 말뚝을 박기 위해 모질게 살아온 어머니의 한이 자신들의 어머니였으며, 그들은 그 어머니의 딸들이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쁨과 죽음에 대한 슬픔을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이 대물림이 되어 눈물 흘리는 역사가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딸들의 눈물에서 볼 수 있었던 잊지 못할 봄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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