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에 흔들리는 청춘을 목도한 나의 불찰
봄바람에 흔들리는 청춘을 목도한 나의 불찰
  • 김희철
  • 승인 2013.04.25 14: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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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인칼럼> 김희철(개념원리국제수학교육원 안동지역본부장)

해가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둑해질 무렵 집에 볼일이 있어 아파트 주차장으로 막 진입하는 순간 나는 못

▲김희철(개념원리국제수학교육원 안동지역본부장)
볼 걸 보고 말았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교복 입은 남녀 학생 둘이 주차장 한복판에서 서로 밀착한 채 진한 스킨십을 하는 게 아닌가. 하필 사람 많이 다니는 주차장에서 그것도 어른이 있고 형제자매가 있을 집 앞에서 이런 과감한 행동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여학생이 이 아파트에 살고 있을 테고 어두운 밤길이 걱정이 된 남친이 바래다주고 발길을 돌리려니 헤어짐이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순간 이해가 되면서도 곧바로 닥친 현실적, 도덕적 문제로 강렬한 가치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주차가 급한 내 상황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주차공간은 학생들 곁을 지나서 있고 소심한 나는 경적을 울릴 수 없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힐끔 보면서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게 아닌가. 한참을 기다리려니 뒤에 오던 할머니가 지나가고 그제서야 둘은 차들 사이로 밀려들어가고 나는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다 문득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 애들이 혹시 보기라도 하면 교육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학생들 집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하고 제법 큰 소리로 꾸짖으니 둘 다 물끄러미 보면서도 기어코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뭔가 행동변화가 있을 줄 기대했던 내 맘과는 달리 굴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더 이상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그들을 가르치고 변화시킬 아무런 관계가 성립돼 있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응을 하더라도 이 상황을 돌파할 교육적인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급한 행동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잘못이라고는 조금 늦게 비켜 주차를 방해한 것 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야흐로 춘화지절에 다소 학생이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행동한 것이 죄라면 죄가 될 텐데 이마저도 그리 큰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본성에 충실했을 수 있다. 덕행을 강조한 유학에서는 성(性)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된다. 우주와 자연이 본래 하나의 이치로 운행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인간은 이러한 성이 내재된 존재로 인성(人性)을 갖추고 있으며 사람이 성을 따르고 지켜가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의 도리가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 또한 성의 이치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를 거스르는 행위는 이치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청춘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갖는 건 당연한 이치고 본성에 충실한 그들이 죄인취급 받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 그렇다고 남들 못 보는데 가서 하라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고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인성은 지성(知性)과 감성(感性)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더욱 나를 얼어붙게 한건 나란 사람은 그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릴 적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경멸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신중하지 못한 나를 보면서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전혀 변화가 없었던 걸 보면 ‘웃긴다’ 정도가 아니었을까.

인간의 변화를 동반하는 배움이란 내적 교체와 개혁을 의미한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인 것이다. 가족관계가 아닌 타인과의 배움의 관계란 스승과 제자의 관계일 것이다. 배우려는 자세가 전혀 안되고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행동변화가 있을리 만무하다. 스승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 눈 덮인 마당에서 기다리는 진정한 제자의 이야기가 그려진 程門立雪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소통의 과정 없이 소리만 질러 댔으니 아니함만 못하다. 어느새 젊은 시절의 나와는 입장이 달라진 탓일 것이다. 세태와 관련해서 발생되는 현대의 사회문제는 대부분 경쟁에서 이기고 출세를 위해 자신의 이익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산업사회와 소득차, 성별, 세대간 불협에 그 원인이 있다. 학생들과 마흔 중반을 넘긴 필자와는 분명 세대 간 격차가 있었고 그들의 과감한 행동은 사회악일거라는 불안한 심리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몇 해 전 고대 로마 콜로세움을 발굴하던 중 당시 로마인들이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새긴 돌이 발견돼 화제가 되었는데 이렇듯 세대 간 격차는 고래를 막론하고 있었 던 것 같다. 단지 세대차일 뿐 그들의 행동은 죄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한마디 대응도 못한 채 섣불리 꾸짖었던 나의 행동을 백번 반성하면서도 속시원히 뒤끝이 해소되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청춘들의 로맨스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 만일 그들의 행동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초래한다면 그리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내 자식이 저 학생과 같은 행위를 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가르쳤을까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다.

두고두고 석연찮은 여운이 남는 이유는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육체적 욕구충족에만 몰두하는 학생들에게서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단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요즘 젊은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기성세대에 그 원인이 있다. 최근 포스코 임원급 인사가 비행기내 승무원에게 폭행을 가하고 새누리당 모 국회의원이 공식석상에서 누드사진을 보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서슴치 않은 장관 후보들, 그리고 나이와 직위를 이용한 많은 성범죄와 몰염치한 사건들은 우리 젊은 세대들에 그대로 답습되고 확대 재생산 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조선사회에서는 법이 감당하지 못하는 풍속과 관련해서는 향약 등 도덕적 규범을 적용해 왔다. 인격을 상실하고 사회적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을 경계했던 흔적이다. 법이 아닌 됨됨이가 살아가는데 중요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가정과 사회, 교육공간 어디에도 사람의 됨됨이를 가르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토록 열을 냈던 교육은 출세하는 자식을 보고싶어 하는 부모마음이고 출세를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기고 이득을 취할 수밖에 없는 사회현실이 지난날을 지배해 온 것이 사실이다. 때와 장소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가릴 줄 아는 미풍은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의 욕구에 충실하고 남의 시선은 아랑곳 않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의 교육은 지식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참 스승, 참 제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교육계에서는 인성평가를 강화한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학칙을 위반하지 않더라도 품성을 계량화해서 진학자료로 참고 하겠다는 것이다. 사회적 인격체를 중시한다는 것인데 이기적인 인간은 아닌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지, 평소 행동이나 언행이 다듬어져 있는지 보겠다는 것이다. 현재 학교에서는 실제로 학생에 대한 인성평가를 꼼꼼하게 하고 있고 공부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됨됨이가 부족한 학생은 진학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공부만 잘하고 나만 잘 챙기면 최고라는 인식에 제동을 건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성품은 계량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학생은 아직 인격의 완성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충분히 가식된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최근에는 인격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할 말을 잃게 된다. 어찌됐던 교권이 무너지고 이기주의와 이타심이 팽배한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된 건 분명하다. 학자들은 이 멀고도 험한 난제의 해법을 가정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공교육에 의존해 가르치기란 매우 어려운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고령 점필재종택 종손은 “부모한테 교육받는 거는 밥상 들고 앉았을 때 밥 흘리지 마라, 밥 씹을 때 밥을 남한테 보이지 마라, 그게 전부 밥상머리교육이지.”라며 밥상머리 교육을 강조한다. 이 안에는 부모에대한 공경과 타인을 위한 배려와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하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전통사회에서는 늘상 있어왔던 가정교육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자기 이불은 자기가 개고 혹시 할머니가 일어나시면 할머니 이불 개어 드리고 방청소 하고 마당 쓸고 감사한 마음으로 밥을 먹도록 하는 가정에서의 생활교육이 성적을 위한 공부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러한 가족을 통한 교육은 배움의 최전선이고 배움의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녀의 앞날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한다면 열일 마다할 게 아닌가. 어른을 공경하고 주변과 자기관리를 할줄 아는 가풍에서 자란 아이라면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해서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거칠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어라 지적하지 않더라도 자신의행동이 옳은지 그런지 마땅히 알만 하지 않는가. 도산서원에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하고 경계의 도구로 사용했던 낡은 빗자루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세상에 가장 큰 가르침이 글자공부에 그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봄바람에 흔들리는 청춘을 목도한 내 불찰이긴 하지만 하루빨리 그들 스스로 좀 더 성숙된 행동과 몸가짐을 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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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작가 2013-04-26 11:22:34
글이 좋네요^^ 신문사에서는 교정교열을 좀만 더 신경 써 주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