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처음으로 바치는 세레나데
그녀에게 처음으로 바치는 세레나데
  • 정순임
  • 승인 2013.05.11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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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정순임 (한문고전 번역가)

그녀는 내 첫 번째 여인이다.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녀의 자궁 속에 자리를 잡은 그날부터 그녀에게 나는 개체가 아니라 몸의 한 부분이 되었다. 탯줄을 끊고 나와 세상에 마치 지 혼자 나고 자란 것처럼 오만 진상을 떨 때에도 그녀에게 나는 개체일 수 없었으리란 것을 이제야 어설프게 짐작하는 건, 내게도 그런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는 내가 글을 잘 쓰는 걸 좋아했다. 별반 칭찬할 게 없었던 아이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람들 앞에서 가끔 그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볼 때면 마음이 흐뭇해지곤 했다.

그런 그녀는 가끔 서운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하나 같이 글을 잘 쓰면서 편지라도 써서 보내는 인간을 못 봤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날이면 편지지를 꺼내 무언가를 쓰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도대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기운 때문에 빈 종이만 하릴없이 노려본 날이 많았다. 그러면서 그녀가 알아주길 바랐다. 아니, 알아주리라고 믿었다. 죄스러운 마음이 너무 커서 미안하단 말도 못하고, 드리운 그늘이 너무 넓어 감사하단 말도 내지 못했으며, 공기보다 익숙해서 사랑한단 말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난 오늘 처음으로 그녀를 지면에 그린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부치지 못하고 신문에다 실을 이야기다. 아직은 비겁하다. 해가 갈수록 미안해지는 사람, 나이가 들수록 고마운 사람, 생채기가 늘어 갈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사람,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가장 먼저 그녀가 생각났다. 마음이 허허로운 벌판을 헤매고 다닐 때면 언제나 그녀의 품이 그리웠다. 그러나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면 그녀는 슬그머니 스크린 뒤로 자취를 감추었고 지 혼자 무언가 이루어낸 것처럼 도취되어 살았다. 열, 스물, 서른.....그런 이름표를 달았을 때의 무례함을 어찌 몇 마디 말로 속죄할 수 있을까? 사십, 미혹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간도 절반을 더 넘어선 지금까지도 아픈 손가락으로만 그녀 곁에 서 있는 나를 어떻게 용서해 달라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야단을 맞아도 그녀 등에 붙어야만 잠을 잤던 그날들처럼 그녀 앞에서는 여전히 어리기만 한 나를 언제나 용서해 주리라는 것을. 그리고 또 나는 알고 있다. 물리적 거리를 두고 아무리 먼 길을 돌아도 마음은 항상 그녀 곁에 있어 행복했다는 것을. 살면서 내 바람은 늘 한 가지였다. 그녀처럼 현명하고, 그녀처럼 아름답고, 그녀처럼 멋있게 살아내서 내 붙이들에게 그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돌아보면 모자라고 앞을 봐도 막막하지만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겠다고, 오늘도 난 그녀에게 약속한다. 태어나서 마흔 여섯 번째 맞는 어버이날 그 약속 말고 드릴 것이 없다.

어느 날, 깨 뿍대기를 까부느라 뜨럭에 앉은 그녀 곁에서 수다를 떤 적이 있었다. 초겨울 햇살이 인색하던 날이었다. 그녀는 자꾸만 옆으로 돌아앉았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와 눈을 맞출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내 등에 햇살이 더 가라고 그녀가 자리를 옮겼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또 그런 일도 있었다. 하숙에서 풀려나 그녀 품에 닿은 늦은 시간,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던 길, 돌다리에 물이 넘쳐 발을 벗어야 했을 때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 나를 한사코 당신이 업고 건너야 한다고 우겼고, 그 완강한 싸움에서 패배한 나는 그녀 등에 업혀 개울을 건넜다.

그녀는 내 첫 번째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마지막 여인이다. 어떤 여인도 그 사이에 자리를 깔 수는 없다. 난 이제 그녀를 위한 세레나데를 가끔 불러주고 살겠다고 작정한다. 그런 그녀가 내 어머니다. 난 오늘 어머니에게 그 동안 쌓아두기만 하고 못다했던 말을 하고 싶다. “엄마, 내 엄마로 살아줘서 너무 고마워요. 엄마, 걱정만 시키고 살아서 정말 미안해요. 엄마, 오직 당신이기에 너무도 많이 사랑해요.” 말로 표현하는 것도 죄스러운 내 마음을 오늘 이렇게나마 그녀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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