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역(驛)이 있었네
그 곳에 역(驛)이 있었네
  • 정홍식
  • 승인 2013.05.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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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록은 내일의 역사입니다!
국가와 행정기관에 의한 공공기록물이든 지역과 민에 의한 민간기록물이든 소중한 우리의 역사며 유산입니다. 특히 공공기록물의 경우는 지난 1999년 제정된 관계 법령에 근거해 국가기록원이 수집·보존하고 있지만, 지역 차원의 민간기록물 수집·보존은 여전히 민간의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에 경북인신문은 근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민간에 흩어져 있는 안동 지역사의 증거적 가치나 영구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물의 수집·보존운동 일환으로 안동 근현대사를 기획 연재합니다.
안동문화권의 근대사진, 필름, 영상 및 음성 증언들이 있으신 독자 여러분의 많은 제보를 기다립니다. T. 054)857-2083~4

▲1916년 이전 일제강점기시대의 안동. <출처. 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

안동, 꽂 지니 봄 오네!

이 세상 어디인들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 있으랴마는 2013년 안동의 봄은 유난히 꽃 필 틈 없이 흔들리며 온다. 볕이 든다 싶으면 비가 내리고 날이 좋다 싶으면 눈이 내렸다.

꽃들은 꽃이라 당황스러웠겠지만 지켜보는 우리도 익숙치 않은 사월의 함박눈을 보며 황망하기는 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피지도 못한 꽃들 지고 나니 비로소 안동의 봄이다.

▲안동역사(1959년). <출처.20세기 안동의 모습>

역(驛)은 어머니의 자궁이다!

역은 늘 어머니의 따스한 자궁 같다. 1931년 경북선 개통과 동시에 창설된 안동역 철길 따라 증기기관차가 경적을 울리며 들어온 지 83년.

그 긴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마다 사연 뒤로 하고 떠나고 돌아와 다시 청운의 꿈들을 안고 출발했을까?
가난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폐허, 그리고 근대화의 시발점인 박정희 개발독재의 세월을 고스란히 관통해 왔을 이 낡은 역은 어쩌면 자식들 모두 내 보내고 텅 비어 있을 어머니의 늙은 자궁보다 더 많은 눈물과 슬픔이 배여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올 때마다 푸근하고 따스하니 삶에 밀리고 생활에 지친 사람은 누구라도 받아줄 것 같은 이 아늑함!  어찌 어머니의 자궁이 아니던가?

▲1959년 역사내 중앙선.<출처.20세기 안동의 모습>

아! 복원되지 못한 경북선

안동역에는 두 개의 철도 노선이 지난다. 하나는 조선철도주식회사가 경북북부 내륙의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경부선의 김천-상주-점촌-예천-안동을 잇는 단선철도로 1922년 착공하여 1931년 전 구간을 완전 개통한 경북선이다. 상주·문경의 석탄과 흑연, 영주의 석탄과 중석을 주요 수탈 자원으로 실어 나르던 이 경북선은 그러나 1940년 태평양전쟁이 본격 시작되면서 군수산업의 철제공급을 이유로 1944년부터 김천-점촌 구간으로 단축되고 문경-안동 구간은 철거되었다.

광복 후, 미완의 이 경북선은 다시 재건되기 시작해 점촌-예천까지는 옛 노선 따라 그대로 복원되었으나 종점은 안동이 아닌 영주로 바뀌어 1966년에 완성되어 지금에 이른다.

단절된 안동-점촌 구간은 이제 국도 34호선이 대신하고 있지만 예천역, 고평역, 호명역을 거쳐 풍산역, 명동역, 안동역에 이르기까지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는 그 시절 경북선의 복원이 너무나 아쉽다.

▲안동역에 들어온 증기기관차(1954년) <이봉호>

그리고 중앙선의 시대

동서를 잇던 경북선을 대신해 남북 축의 중앙선이 1936년부터 새로 개설되기 시작했다.

영천을 기점으로 한 남부선은 1940년에, 청량리를 기점으로 한 북부선은 1942년에 전 구간을 개통했다. 그리고 옹천역, 마사역, 이하역, 서지역, 안동역, 무릉역, 운산역등 7개의 역사가 안동권에 새로 건립되었다.

조선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경부선에 이어 조선 제 2의 종관선을 개척해 경북, 충북, 강원, 경기 내륙 일대의 자원수탈과 만주-조선-일본간 여객, 화물의 수송을 목적으로 개설된 그 중앙선이 2013년 오늘도 여전히 달리고 있는 것이다.

초췌하고 낡은 역사, 세월이 흘러도 좁혀지지 않는 평행의 그 철길들을 보면서 나 역시 그 중앙선에 몸을 싣고 수많은 청춘의 간이역들을 거쳐 왔다. 그리고 지금도 인생이라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이름 모를 캄캄한 역들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동역 급수탑(1960). <출처.철도박물관>

장고한 세월! 철도 문화재 급수탑

역사 내 철길 건널목 두 개 건너면 한국철도사의 근대 문화유산인 급수탑이 서 있다.

누구나 그저 무심히 지나봤을 이 급수탑은 1940년 3월 당시 주력기관차였던 증기기관차의 물 공급을 위해 세워진 급수탑이다. 증기펌프로 급수탑 상층부까지 물을 끌어 올린 다음 낙차를 이용해 플랫폼 각 급수주로 기관차에 물을 급수했다고 한다.

증기기관차는 결국, 1954년 UN군이 사용하던 디젤기관차 4대 인수를 시작으로 한국철도 동력이 증기기관차에서 디젤시대로 열리고 마침내 1967년 증기기관차 종운식(終運式)을 끝으로 철로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 급수탑은 우리나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철도역 급수탑의 탑신이 거의 둥근 원형인데 반해 유일하게 12각 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고 기계실 천정이 돔형으로 처리되어 있어 2003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4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잘 지켜 왔듯 앞으로도 원형 그대로의 보존을 오래 기대하며 걸음을 다시 역으로 돌린다.

고난의 연속! 동부동 오층전탑

역사를 나와 왼쪽으로 고개 돌리면 전국 최고의 주차장이 있다. 여느 주차장과 다를 바 없이 작고 한산한 구내주차장을 아이러니하게도 전국 최고의 주차장이라 농을 치는 이유는 바로 대한민국 지정 보물 56호인 동부동 오층전탑과 시·도 지정 유형문화재 100호인 운흥동 당간지주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지정만 해 놓고 진입로 없이 방치했으니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이 소중한 두 문화재의 존재감을 잘 알지 못하고 오히려 관광객들에게 더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문화재들 곁 외진 한 곳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던 젊은 역무원과 한 처녀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연리목이 수줍게 서 있다.

안동에는 다른 지방에서 잘 볼 수 없는 전탑이 집중되어 있다.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이 전탑은 목탑과 석탑의 변천 중간지대에 등장한 탑이다.

안동 최초의 향토지인 『영가지(永嘉誌)』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 오층전탑은 원래 법림사 7층 전탑이었으나 1598년 임진왜란에 붕괴되어 5층으로 개축되었고, 일제수탈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거듭 파괴와 보수를 거쳐 196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특히 왜란직후 당시 주둔했던 명나라 군이 관왕묘(삼국지의 장수 관운장의 영을 모신 사당 )와 군사시설물 축조를 위해 법림사와 이 전탑을 헐어 석상, 비석, 지대석, 주춧돌, 연화대좌, 귀면전 등의 원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원형이 사라졌거나 많이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14년 사진기록에서도 2층 남면에 있는 2구의 인왕상이 보이지 않는데 현재는 화강암 판석이 복원되어 있다. 세월이 지난 지금 법림사는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다만 관왕묘는 본래 목성지견영(현 목성동 천주교회당)에 있었으나 왜란 후 선조 39년(1606년) 혹은 인조 14년(1636년)에 안동향교(안동부성 서쪽)와 마주보고 있는 것을 꺼려 서악의 동대로 옮겼다는 두 가지 설을 품고 1988년 경북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되어 현재 태화동 서악사 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다.

▲동부동 5층 전탑과 운흥동 당간지주(1933).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유리원판 320502>

남문밖 쇠기둥! 운흥동 당간지주

탑 서편 5m 지점에는 아무 조각도 새겨지지 않아 속없이 간결하고 소박하게 생긴 경북도 유형문화재 100호인 당간지주가 매끈하게 서 있다.

이 당간지주에 대한 기록 역시 『영가지』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남문밖 쇠기둥’으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길이 30여 척에 굵기가 한 아름 정도이며 수철(무쇠)을 사용했으며 형태는 대나무와 같은데 마디가 17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 지주는 법림사의 철 당간지주와 주좌석으로서 문화재의 명칭을 철 당간지주로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제는 법림사도, 열 일곱 마디 철제 당간도 사라지고, 그 당간을 받치고 섰던 화강암의 지주 역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어 상부에 그 상흔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지주는 1933년까지만 해도 동부동 오층전탑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일제의 경북선과 중앙선 철로 가설로 인해 전탑 서쪽으로 옮겨지는 불행사를 겪기도 했다.

5m 지척! 다른 지명의 두 문화재

그런데 5m 상간에서 두 문화재의 지명이 다르다.
전탑은 동부동이고 지주는 운흥동이다. 이렇게 다른 지명을 사용하게 된 연유는 일제의 중앙집권적이고 관치적이며 직접적인 식민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전개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동부동은 원래 조선후기 안동부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용흥, 입석, 율곡, 신정, 원북 등 6개 리(里)를 관할했는데 1914년 일제에 의해 동문내, 운흥리, 서문내, 천리, 신세리, 용하리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동부동으로 되었다가 1931년 시행된 안동읍면제로 일본식 지명인 본정2정목(本町2町目)으로 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인 1947년 다시 동부동으로 되었다.

운흥동 역시 조선후기 안동부 동부지역에 속한 곳이었는데 1914년 동부동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 안동읍면제 시행으로 일본식 지명인 팔굉정1정목(八紘町1丁目)이 되었다. 이 또한 1947년에 이르러 다시 운흥동의 옛 이름을 되찾았다. 이후 1963년과 1979년에 전탑과 당간지주의 문화재 등록시 주무관청의 이해부족으로 지명때문에 두 문화재의 정체성에 대한 혼동도 야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듯 우리 근대사는 생채기와 허점투성이로 여전히 우리 곁에서 멀고도 가까운 역사로 함께 숨 쉬고 있다.

▲이하역(1959년). <출처.20세기 안동의 모습>

다시 역전! 길 위에서 듣는 증언

5월의 뙤약볕이 무섭다. 연초록의 벚나무 잎들과 그 가지 밑 허리 휜 할머니의 휴식이 길다. 한 켠에선 귀대하는 듯 한 군인 둘의 바쁜 걸음과 또 다른 한 켠에서는 바쁠 것 하나 없이 서로를 껴안고 광장을 빠져 나가는 연인 한 쌍의 그림자 유난히 붉다. 문득 환영을 본다.

기차역이 생기면서 이 곳에도 하나씩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고 일본인 거리가 들어섰을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고, 유리창이나 유리문을 가진 집들도 초가와 판자집 사이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하꼬방과 목욕탕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에는 25년간 문을 열고 성업하다 폐업했을 안동 최초의 사진관인 금광사진관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과 전쟁!

▲정홍식 대구경북지역정책연구소장

그래도 이 곳 역전에는 여전히 집집마다 쏟아 부은 개숫물과 허드렛물, 삶에 찌든 구정물까지 모두 받아 안고 흐르던 수채도랑은 건재했을 것이다. 역사 오른편에서도 여전히 큰 수양버들 한 그루, 떠돌 곳 없는 이 땅의 전쟁고아며 부랑아, 짐꾼에서부터 보따리 장사꾼에게 까지 차별없이 그늘을 내어 주었을 것이다.
그 군상들 속에서는 그를 모르면 안동인이 아니라고 ‘안동시민증’ 별호까지 달고 다녔다던 대머리 지게꾼 ‘도꾸도꾸이’의 술 취한 걸음과 서글픈 노랫가락도 있었을 것이며, 콧물, 침물 질질 흘리며 아이들의 조롱거리로 소일하며 역전을 떠돌았다던 바보 무종이의 헛헛한 웃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수채도랑도 수양버들도 그들도 없다. 어쩌면 그 시절을 증언해 줄 남은 자들도 하나 둘 사라져 언젠가는 이 곳을 기억하는 이 전부가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문득 볼 때마다 흉물처럼만 다가오던 저 잿빛 경상섬유의 거대한 굴뚝과 대할 때마다 머슥하고 어줍잖던 승공탑마저도 반갑다. 희미해져 가는 역전 집창촌 골목으로 오월의 해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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