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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호 선생을 추억합니다!
혼천의, 천부경, 예학에 있어서 좌우, 자연농법, 봄나들이
나별지 등 10여권 남기고 홀연히 떠남을 아쉬워한다
<특별기고> 이임태(한국일보 기자)
2013년 07월 15일 (월) 14:57:20 이임태(한국일보 기자) sinam77@naver.com

『오묘한 마을 지형은 천작(天作)이며 그 지형에 합당한 지명을 지어 붙이기는 인작(人作)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절묘한 조화이다. 그 조화를 이루는데 Bigbang 우주론을 적용시킨다면 무(無)로부터 양자론적 효과로 우주창생 - Inflation - 우주대폭발(Bigbang) - 우주팽창으로 이어지고, 다시 우주대구조 - 은하거대구조(Great Wall) - 초은하단 - 은하단 - 은하군 - 은하계 - 태양계 - 지구, 인간을 생성시키는 약 150억년의 우주진화 과정 중 무한(無限)에 가까운 인과(因果)를 거친 결과이다.』

나별지(羅別誌) 서문의 이 구절을 읽으면 눈물이 난다. 저자 故 소유(素惟) 정진호(鄭辰皓)선생의 다정했던 생전 모습이 떠오름과 동시에 세상 인연의 그 끝없는 깊이가 아득하게 느껴지고 새삼 시리도록 아름답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별지는 정진호 선생이 당신의 고향 안동시 와룡면 나별리의 역사와 인문, 지리, 생태, 인물을 망라해서 기록한 ‘마을지’이다. 선생의 고향마을을 나별이라 이름 붙인 것은 사람의 일이다. 하지만 공간으로서의 나별이라는 마을을 만들고, 그곳에 선생이 태어난 것은 하늘이 주관한 일이다.

나별에 태어나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간 선생의 일생은 그의 말대로 무한에 가까운 우주적 인과를 거친 결과다. 그리하여 인연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부모형제, 아들 딸, 이웃, 친구, 선후배, 직장동료…. 우리 모두는 로또복권보다 훨씬 희박한 확률을 뚫고, 헤아릴 수조차 없이 복잡한 인과관계를 지나왔기에 지금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이처럼 광대한 우주관을 가진 선생은 당신의 아호(素惟)와도 같이 순백의 마음으로 가을하늘처럼 맑게 살다가 지난해 가을 향년 61세로 불귀의 객이 됐다. 선생의 부음을 뒤늦게 전해들은 날, 나는 소리 내지 못했지만 속으로 몇 번이고 울었다.

내게 있어 선생은 마음으로부터 진정 우러나와 “선생님!” 하고 불렀던 거의 유일한 분이었다. 그리 불렀던 이유는 그분의 학식이 뛰어나서도, 내게 대단한 지식을 가르쳐줘서도 아니었다. 그분은 내가 아는 한 ‘참된 선비상’에 가장 부합하는 삶을 사셨다.

선생은 기만을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이었을 뿐이다. 정규학력이라야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선생은 해설서인 ‘도산서원 혼천의’를 저술하고, 선친의 유업을 이어 ‘천부경 상하경’ 역주서를 편저하는 등 놀라운 저작들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설익은 생각이나 글을 세상에 내놓기를 선생은 거부했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라 여겼음이 분명했을 터이다.

혼천의 저술은 퇴계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2001년 열린 ‘세계 유교문화축제’ 포스터의 혼천의 사진에 대해 선생이 오류를 지적하자, 당시 김휘동 안동시장이 연구와 저술을 권유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선생은 유일학력인 초교시절부터 별자리와 천문에 관심이 지대했다. 와룡면의 구석진 나별 토담집에 앉아 첨단 천문과학 잡지를 탐독하면서 우주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품곤 했다.

혼천의를 해설하기 위해 선생은 동양의 고천문학 서적을 완전히 뜻이 통할 때까지 고집스레 파고들었다. 혼천의의 ‘혼’자만 들어갔다 싶으면 닥치는 대로 문헌을 수집해 분석했다. 비로소 전반을 이해했다고 느낀 뒤에는 독자의 준엄함을 우려해 철저한 이론고증과 원고교정 과정을 거쳤다. 선생은 “농사도 안 돌보고 밥도 아침 한 끼만 먹으면서 연구에 매달렸다”고 저술 당시를 회상하곤 했다. 3년에 걸친 그 지난한 과정을 지탱해준 것은 선생 오직 선생 특유의 소명의식과 원칙주의였다. 산고 끝에 독보적 연구와 해석이 담긴 혼천의 해설서가 발간되자 국내 유수 대학 천문학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야만 했다.

선생은 어떤 주제는 1년을 연구했고, 어떤 연구에는 5년의 공력을 들였다. 그의 역작 중 하나인 ‘자연농법’의 경우 30년이 넘는 철저한 연구의 산물이다. 선생이 자연농업 연구를 시작할 당시에는 국내에 유기농 또는 친환경농법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 시절부터 이미 선생은 자비로 일본을 넘나들며 친환경농업 이상의 개념인 자연농법을 배워와 현실농업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는 이 농법에 의해 농작물이 자라는 수 십 년 동안의 과정과 결과를 사진과 글로 기록했다.

선생은 소명감을 느끼면 반드시 그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마을 산길에서 ‘음악가 소천 권태호’라는 묘비를 발견하고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로 유명한 동요 봄나들이 작곡가 소천 권태호 선생의 행적을 밝히기도 했다.

소천은 애국가의 안익태와 비견될 정도의 국내 1세대 작곡가였지만 당시만 해도 행적이 분명치 않았고, 안동권씨 문중에서도 손을 놓고 있었다. 모두가 손 놓은 일에 뛰어든 선생은 소천의 육필 악보 등 생전 자료를 확보하고 연보를 정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 책 ‘봄나들이’를 썼다. 지금 안동에서 볼 수 있는 소천음악관과 소천음악제는 선생의 노력과 집념에 따른 결실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당신의 돈을 써가며 매달린 경우는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뚜렷한 결과물을 내놨다.

이 같은 집념으로 선생이 남긴 저작은 혼천의, 천부경, 예학에 있어서 좌우, 자연농법, 봄나들이, 나별지 등 10여권이 넘는다. 대부분 선생이 전공하지 못한 분야였지만, 대부분의 저작이 관련 전문가가 울고 갈 정도로 전문성이 넘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주경야독의 독학으로 이뤄냈다. 동양고전과 첨단과학을 섭렵해 일상 속에서 융합을 시도한다거나, 한자의 원리를 응용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컴퓨터 프로그램 운영원리를 홀로 깨우친 대목에서는 선생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빛났다.

이런 탓에 선생의 방은 자료의 숲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온갖 분야의 자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로 비상한 것이어서, 언제든 대화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산더미 속에서 쉽게 찾아냈다. 자료 분류를 위해 포스트잇 한 장 사용할 줄도 모르는 그였지만 자신만의 분류법이 있었고, 거기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의 정리벽과 기록정신은 유난했다. 40대 초반에 상처한 이후 줄곧 혼자 살아온 선생의 재래식 부엌살림은 차라리 기가 막힐 정도였다. 군대 침상의 모포처럼 각이 잡히게 접어둔 그 하얀 행주하며 반질반질 윤이 나는 부뚜막, 잡티 한 점 없는 바닥과 일사불란한 집기 정리는 경지에 오른 그것이었다.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나태해짐을 지극히 경계하는 것, 그것이 선비의 자세 아니던가. 선생은 그것을 일상에서 철저하게 실천했다.

기록정신은 또한 얼마나 철저했던가. 그는 나별지 원고를 교정하는데 검은색 볼펜 몇 자루, 빨간색 볼펜 몇 자루가 소요됐다는 내용까지 책에 써넣었다. 이것을 두고 누가 미주알고주알 수다스러운 태도라 비난하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역사가 이런 분들의 철두철미한 정신에 의해 기록된다는 점을 굳게 믿어야 할 터이다.

이토록 빈틈없었던 선생이었지만 이웃과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은 한없었다. 상대의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너털웃음을 잘 터트려주며 공감을 드러내곤 했다.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상대 부모의 안부를 먼저 물었고, 자리를 짚어주며 먼저 앉기를 권했다(옛 선비들 역시 그러했다). 나이가 서른 살 가까이 어린 필자와 만나서도 선생은 한 번도 먼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선생과의 대화는 흥미진진했고, 유익했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내가 더러 실언하거나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도 허물을 지적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우주적 크기의 아량으로 사람들을 이해해주었다.

선생은 노래를 잘 불렀다. 다부진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음색이 곱고 맑았다. 19살인 1976년 작곡가 남국인으로부터 곡을 받아 ‘물레방아 고향’ 등 정식 레코드 3편을 취입한 엄연한 가수 출신이다. 당시 태진아와 같은 소속사였다.

유명 작곡가였던 남국인이 참여한 음반의 곡들이 방송을 타고 도회에서 가수로 이름이 알려질 무렵 선생의 어머니는 눈물로 아들의 귀향을 희망했다. 선생은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고향의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야속하게도 그의 곁을 오래 지켜주지 않고 귀천했다. 그는 어머니 산소가 건너보이는 고향마을을 평생 농사를 지으며 지켰다. 선생의 곡 ‘밤꽃이 피는 내 고향’에는 “밤나무골 십리길을 배웅하던 어머니! 돌아가는 그날까지 만수무강하세요. 이 아들은 빌고 빕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선생은 노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한국 대중가요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가끔은 “내가 노래를 계속 했으면 조용필은 없었다”고 농담을 하시곤,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나는 선생을 열 대 여섯 번 뵈었다. 만남의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 만날 때마다 많은 대화를 나눴고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우리는 feel이 통했고, 유식한 말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은 셈이었다.

처음엔 인터뷰를 위해 만났고 그 후에는 스승으로 생각하고 찾아뵈었다. 와룡을 지나는 길이 있으면 내가 불쑥 선생을 찾아뵀고, 선생도 시내에 나오면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 사무실에 들르곤 했다. 그가 사무실로 찾아온 날이면 나는 홀로 사시는 선생의 영양상태를 걱정해 고기국밥을 사드리곤 했다. 선생은 기쁜 표정으로 달게 드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육류를 매우 싫어하는 식성이었다.

그는 당신의 연구내용 등을 말할 때면 확신에 차 목소리를 높이고 신명도 냈지만, 평소에는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우뚝한 저술활동으로 당대 향토사학계에 견줄 이가 없을 정도의 공적을 세웠음에도 그 흔한 출판기념회 한 번 열지 않았고, 어느 자리에서도 상석에 앉지 않았다. 지식인의 권위주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변변찮은 글쟁이들이 생전에 자신의 문집을 발간하는 게 유행이었지만, 선생은 그들의 문집 출판기념회에 찾아가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을지언정 자신의 문집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담백한 삶의 태도로 인해 선생은 이룬 것에 비해 명성이 높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늘 안타까워 선생께 철없이 닦달을 했지만, 당신은 항상 스스로 요란한 이름이 나는 것을 경계하는 듯싶었다.

올해 신문사를 옮기고 새 직장에도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쳐가던 몇 달 전 나는 오랜만에 찾아뵐 생각으로 선생께 전화를 넣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던 선생께는 집전화와 편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는데 댁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없는 번호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알만한 곳에 소식을 물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청천벽력 같은 선생의 부음을 들은 것이었다. 그것도 이미 지난해 가을에 유명을 달리했다니 처음엔 그저 멍하기만 했다. 혼자 계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이웃이 발견했던 모양이다.

선생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나는 한동안 깊은 그리움을 앓았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서 황망한 죽음이긴 하지만 선생다운 담백한 죽음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나는 이르렀다. 평생토록 선비답게 흐트러짐 없는 길을 걸어온 그는 죽음도 단번에 깨끗하게 끝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아, 그러나 그토록 맑은 마음으로 절제된 삶을 살아온 선생이 겨우 회갑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시니 진정 사람의 생사는 무상한 것인가. 선생의 생전 말씀은 인생은 무상하지도, 덧없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존재이유와 존망의 인과, 즉 우주적 질서가 있는 법이라고 말씀하곤 했다. 그것에 순응할 뿐 덧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우주적 질서를 따라 갔으니 나는 그의 길을 무상하다고도 애석하다고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비록 졸고라도 선생을 추억하는 글을 이쯤에서 끝내려하니 범부인 필자로서는 다시 한 번 눈시울 뜨거워짐을 금할 길 없다.

   

▲이임태 한국일보 기자

선생은 안동 향토사학계의 거목이었으며, 그 삶의 진정성은 지행합일의 극치인 참선비였으되, 맑은 영혼을 가진 영원한 소년이었고, 시대의 기인이자 천재였으며, 무엇보다 내 가장 좋은 말벗이자 친구였다. 마음의 스승으로 여기고 자주 찾아뵙고자 했으나 이런저런 핑계로 소홀했다. 그것이 아프다.

고 정진호 선생님, 저승에서 옷고름 풀고 편히 쉬소서. 

< 이 글은 안동청년유도회 회보 ‘진덕수업’ 2013년 여름호에 미리 실렸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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