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마흔 일곱 해를 살았다. 탯줄을 끊는 순간부터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대통령은 한사람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가 죽었다는 뉴스가 중간고사를 친다고 친구 집에서 밤샘을 하고 마당에 세수하러 나온 사이 라디오 뉴스에서 들려왔을 때 받아놓은 세숫물보다 눈물이 더 많았던 기억은 내 평생 수치고 오점이다. 물론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란 것을 안다. 열 네 댓 살 시골 아이가, 독재자로 인해 언로가 철저히 막힌 곳에서 살았던 그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85년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역사를 직면했다. 광주에서 아이를 품은 여인이 공수특전단, 그것도 조국의 군인인 그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한 사진을 본 순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역사를 온몸으로 알아버렸다. 그 때부터 미친 듯이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한 책들을 읽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할 장학금을 포기하고 매일을 길에서 살았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조국의 전경들과 길바닥에서 함께 울었다.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주의 쟁취하자!’ 하는 것이 주요 슬로건이었던 그 시절 속에 전교조 합법투쟁이 있었다.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교직원이 노동자이고 그들이 그들의 권리를 위해 조합을 건설하는 일이 불법이라고 어느 법전에도 명기되지 않았지만 교직원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젊은 피를 바치고서야 드디어 권리를 얻었다.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독재자들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박종철, 이한열 등 너무도 많은 열사들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그것마저 군부독재를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그 이후에도 대학생활은 길에서 계속되었고, 90년대 초 학교를 떠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래, 이만큼 했으면 조금은 나아졌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이 땅의 교육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우리 아이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위해 학무보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면서 가끔 동지들에게 말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보수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여전히 난 보수가 될 자격이 없다. 그들처럼 비인간적일 수도 없거니와 그들처럼 몰상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보수란 그런 것이다. 예전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불편한 것은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등의 가치를 중시하고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일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나이든 사람들의 집단이 보수여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양심도 도덕도 법도 필요치 않는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그들이 보수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나는 보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애쓰지 않아도 둥글둥글해지고, 재바른 행동보단 묵직한 생각들이 삶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뾰족해서 자기를 찌르기 쉽고, 재바른 행동으로 상처입기 쉬운 아이들에게 조언자가 되어주면서 나이 들어가고 싶었다. 그날처럼 화염병을 들고 거리에 나서기보다 신나와 야식을 사들고 가서 그들의 뒤에 서 있어주고 싶었다. 그런 선배한테 누구누구 氏라고 호칭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지켜야할 가치는 지키며 사는 것이라고 젊잖게 알려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보수가 되어 순리대로 나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군부독재를 몰아낸 승리의 기억을 가지고,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자식들을 인간답게 키우기 위해 노력한 열정을 가지고, 독재가 아닌 딱 10년의 세월을 만든 경험을 가지고 우리는 여전히 진보적이어야 한다. 이제 아름다운 보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허락된, 우리 시대에 허락된 명제가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감히 되지도 않는 것을 꿈꾸며 느슨했던 지난 몇 년의 시간들은 여전히 함께 서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으로 메워 갈 것이다. 우리는 다시 전선에 서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