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을 탐하지 말라'
'정상을 탐하지 말라'
  • 김희철
  • 승인 2014.07.09 2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文化 에세이] 김희철 (개념원리국제수학교육원 안동지역본부장)

▲ 김희철(개념원리국제수학교육원 안동지역본부장)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3년 네팔 세르파족 텐징 노르게이와 뉴질랜드 출신 영국인 힐러리경 이 두 사람은 모든 산악인들의 꿈인 해발고도 8,848m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티벳명 초모랑마)를 세계최초로 정복했다.

등산장비조차 변변찮던 시절 낡은 등산화와 가랑이가 헤어진 등산복을 입고 환하게 웃던 이들의 낡은 사진을 한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세계적인 산들은 무수한 산악인들의 정복의 대상이 되었고 갖가지 기록을 낳았다.

우리나라에는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대장과 세계 최초 16좌 완등한 엄홍길대장, 박영석, 남극을 정복한 허영호 등이 유명하다. 특히 엄홍길대장은 그의 산에 대한 애정과 불굴의 의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으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지침이 되고있다. 그러나 그는 서른여덟 번 올라 스무 번 성공 열여덟 번을 실패했다며 “제 산악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등정 과정에 세르파가 숨지고 아끼던 동료 산악인들의 희생을 지켜봐야 했다. 자신과 4차례 등정에 동행했던 박무택씨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내려오다 설맹현상으로 눈이 보이지 않고 산소가 떨어져 산 정상 100m지점에서 숨지자 1년뒤 ‘휴먼원정대’를 꾸려 시신을 수습하는 등 산사나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엄홍길대장은 결코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단지 산이 나를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말은 유명하다. 그에게 산은 인생의 동반자 혹은 오히려 인생을 살면서 빚을 진 감사한 존재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뭍사람들은 그를 산을 정복한 사람으로 미화하고 칭송하는 걸까? 혹시 침략과 점령을 미화하려는 속내가 깔려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근대로 접어들면서 서양 열강들은 앞 다투어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지배력을 넓혀갔다. 영국에서 이주한 미국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그곳을 점령하는가 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개항한 일본은 이러한 제국주의에 편승해 동양은 하나라고 외치며 대륙을 점령하지 않았던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댓가로 그들만의 욕망,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점령을 서슴지 않는 그것이 정복자의 본질이 아닐까.

정복한 사람과 정복당한 사람, 점령한 사람과 점령당한 사람. 유사한 두 단어를 보며 묘한 동질적 관계가 성립됨을 알 수 있다. 정복한 사람을 미화하듯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을 차지한 사람도 여과 없이 미화한다. 심한 경우 나라를 독재한 사람, 시장을 독점한 사람,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에 당선된 사람조차 당선만 되면 미화되기 일쑤다. 오로지 정상을 향한 시각의 획일화와 출세 지향적 가치로 내몰리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이후 모든 언론은 정복자로 미화하고 정치인들은 이를 부추겼다. 여기에는 노르웨이 출신 아문젠에게 남극정복의 정상자리를 내어준 영국의 열등의식과 정복 욕구가 강하게 배어 있다. 급기야 상업등반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정상을 욕심내다 죽어갔다. 현재 에베레스트 곳곳에는 등반도중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시체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정상에 가기위해 이루어지는 마약과 이완된 정신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매춘, 목숨을 거래하는 세르파의 비인간적 모습을 고발한 지난 2010년 출간된 ‘에베레스트의 진실’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의 등산문화는 어떠한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산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다. 한국 갤럽에 따르면 우리나라 등산 인구는 약 1천900만으로 전체 인구의 3분의1이상이 등산을 하고 있으며 아웃도어 시장규모도 독일을 제치고 미국 다음으로 큰 시장규모를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 여유 있는 소수만 즐기던 등산이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인기를 얻어 각종 정치인 산악회, 동호회 등 유사이래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은 적이 없을 정도다.

산행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건강관리가 압도적으로 많고 다음으로 경치감상, 사교, 여가활용 등 대체적으로 스트레스 해소와 건강관리를 목적으로 한다. 이유야 어떻든 좋은 현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계곡에는 고기구운 흔적과 기름기로 얼룩지고 여기저기 술병이 나뒹군다. 나무는 베어지고 곳곳이 쓰레기로 넘쳐나며 그들이 정복한 산 정상은 훼손되어간다. 또 산행하는 사람들의 완벽한 차림새는 가히 세계적 수준이다. 심지어 앞산에 가는데도 고가의 유명 브랜드 등산복을 입고 지팡이 짚고 가는 웃지못할 장관을 심심찮게 본다. 정복자의 모습과 허영 넘치는 인간 욕망의 만남이 현재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과연 우리에게 산은 어떠한 의미일까. 많겠지만 크게 동양에서의 산의 의미와 유산록 등 문헌속에 나타난 산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산은 동양의 음양오행 중 土에 해당한다. 즉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木火土金水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고 중립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土라는 형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우주의 빅뱅 이론과 유사한 동양의 無極而太極 이론에서 음양이 생겨나고 五行은 이러한 음양의 작용에 의해 생겨났다.

음양가들은 선천수를 통해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10개의 천간 가운데 처음으로 어둡고 차가운 壬水(1)의 작용으로 열이 나는 丁火(2), 가속하는 甲木(3)과 이를 제어하는 辛金(4) 다음으로 戊土(5)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산(山)의 의미이다. 통일과 화합, 믿음을 제일 원칙으로 하는 것이 戊土의 특성이다. 산속에는 사철 푸른 나무와 바위와 그 틈에서 솟는 샘, 샘으로 목을 축이는 여러 동물들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이후에 비로소 생겨나는 물방울 癸水(6), 빛을 발하는 丙火(7), 오랜 세월이 흐른뒤 생겨난 생명체 乙木(8), 결실의 庚金(9), 마지막으로 만물의 己土(10)까지 말하자면 동양의 창세기에 기반하여 산의 특성과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공부에 지치면 선현들은 산으로 갔다. 그들에게서 산은 정상을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이며 어머니의 품과 같은 힐링의 공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정상의 자리를 칭송하는 사람도 없고 미화하는 문구도 없다. 천년을 흐르는 샘을 보며 끝없는 지혜의 깊이와 쓰임새의 중요성을 알고 늘푸른 소나무를 보면서 변함없는 항상심의 중요성을 알았다. 우뚝솟은 바위를 보면서 義로 뭉친 단단함에 감탄했으며 가끔 부는 바람에 궂은 때를 씻었다.

공자는 그가 사는 노(魯)나라의 동산(東山)과 태산(泰山)에 올라 “동산에 올라서 노나라를 보니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서니 천하가 작게 여겨졌다”고 말했다. 이는 진리를 크게 깨우치기 위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며 또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알며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오래 산다고도 설명 했다. 막힘없이 흐르는 물은 지혜의 결정체며 만물을 품고 있는 산은 어진이의 품성과 닮았다. 그래서 선현들은 등산이라는 용어 보다는 그 품속에 노닌다는 의미로 유산(遊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많은 유산록(遊山錄)과 유산시(遊山詩)를 남겼다. 여기에는 퇴계선생과 남명선생을 비롯한 그 학맥을 형성했던 선비들이 적극 참여하는데 작품수를 보면 금강산, 지리산, 다음으로 청량산의 유산록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주시는 지난해 전해 내려오는 소백산관련 유산록과 시를 모아「소백산」이라는 책을 펴냈다.

「소백산」에 보면 퇴계선생은 “40년 동안 이 산 밑을 지나면서도 그렇게 오르려 했으나 기회를 잡지 못하다 마침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비로소 오르게 됐다”며 그 감회를 ‘遊小白山錄’이라는 유산록으로 남기고 “소백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들은 유산록을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후 유산록은 60여편, 유산시는 500~1,000수에 달한다.

유산록 작품 속에 나타나는 산은 한결같이 자연에 대한 감동과 자기성찰, 배움의 대상으로서의 산으로 그려져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인간의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동반자로서의 산이다. 옛사람들은 굳이 정상을 탐하지 않았으며 산중에서 평생을 보내는 어떤 스님도 정상을 오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마음을 경계하고 그냥 산이라는 품속에 노닐다가 감사한 마음으로 내려올 뿐이다.

물론 정상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산악인은 정상의 의미를 “힘겹게 오르고 오르다 보니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더라” 정도로 말하는 것을 보면 최종 목적지, 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르는 정상이나 지배하고 정복하는 의미의 정상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생각해 볼만 하다.

소백산 중턱에 있는 바위 光風臺를 노래한 퇴계선생의 유산시 한편을 통해 옛사람의 정취를 느껴본다. 광풍대는 주렴계(周濂溪)를 일컷는 光風霽月에서 따왔으며 퇴계 이황은 주렴계의 無極而太極을 聖學十圖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美名感余衷 미명감여충 아름다운 이름에 마음이 감동하여
策杖尋古台 책장심고태 지팡이 끌고 옛 대를 찾았노라
僧言周去後 승언주거후 스님 말이 주선생이 가신뒤에
遊人莫往來 유인막왕래 놀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하네
絶壁梯可升 절벽제가승 벼랑이야 사다리로 오를 수 있고
荒榛翦可開 황진전가개 가시덤불은 베어내면 트이련만
祗恐光霽處 지공광제처 두려워라 비개이어 맑은 곳에
不在南溟杯 부재남명배 바다를 퍼마실 잔이 없으니
欲問無極翁 욕문무극옹 무극옹께 묻고자 하노니
眞知竟誰哉 진지경수재 참으로 아는 사람이 마침내 누구인지!
〔주선생-주세붕, 무극옹-주렴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