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루 복원 '위치', 1934년? 1970년?
영호루 복원 '위치', 1934년? 1970년?
  • 유경상 기자
  • 승인 2014.10.2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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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 복원 위치를 둘러싼 두 개의 視覺'1934년 위치'냐? '1970년 중건 당시 위치'냐?

 

▲ 1934년 7월23일 갑술년 대홍수 이전에 발행된 우편엽서 속 영호루 모습

1970년 당시 정하동 언덕에 이건복원(移建復元)된 현재의 영호루는 목조가 아닌 철근과 콘크리트로 세워져 있다. 창건 이후 천여 년 동안 중수·복원의 전통을 이어온 만큼 최근에는 옛적의 목조건축물로 복원해 세계역사도시답게 안동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지위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2012년 4월 총선 당시 재선에 성공한 김광림 국회의원이 내걸었던 공약에서부터 점화된 복원 논의가 올해 6월 재선에 성공한 권영세 안동시장 공약에서도 재차 거론되었다. 이에 영호루(映湖樓) 복원사업을 둘러싼 청사진이 조만간 가시권에 들어올 전망이다. 영호루 복원을 둘러싼 정치권, 행정권의 공약이 중첩되는 과정에서 안동시는 내년도 상반기에 ‘영호루 복원 타당성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시행한다는 입장이다.

▲ 1934년 대홍수로 유실된 후 36년만인 1970년 11월 옛 터를 떠나 강 건너 정하동 언덕에 영호루가 중건 되었다. 영호루중건기념비 모습.

 

▲ 1992년 9월, 영호루 옛 부지에 세워진 영호루유허비.

그러나 영호루 복원을 둘러싼 2개의 상이한 시각이 병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향후 격렬한 논쟁이 예상된다. 2개의 상이한 시각은 ‘1934년 위치’로 이전해 복원하는가? 와 ‘1970년 중건 당시의 현 위치’를 고수하며 복원할 것인가? 이다. 다양한 논의가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복원의 위치’를 둘러싼 2개의 시각은 타협이 어렵다는 점에서 한동안 지역사회 내부의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누(樓)’가 지녔던 전통사회에서의 위상과 현대사회에서의 의미로까지 논의가 확장된다고 전제할 때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안동지역 정체성과 시민의식에 어떤 계기로 작용할 것인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공민왕 몽진으로 유명해졌으나 근대 이전 네 번이나 유실

▲ 고려 김방경 장군은 1274년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서 시를 지었다. 시의 내용에 소년시절에도 영호루에 왔던 적이 있다고 쓰고 있다.

 

▲ 공민왕은 50일간의 안동몽진 이후 환도한 뒤 영호루 3자 금자현판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했다.

유서 깊은 영호루가 언제 건립된 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려시대 김방경 장군(1212~1300)이 1274년(원종 15년)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서 시를 지었고, 시의 내용에 소년시절에도 영호루에 왔던 적이 있다고 해 고려중기 이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영호루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홍건적의 침략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한 사건 때문이다.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백관을 거느리고 복주(福州)로 50일간 피난을 왔으며,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남문 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아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했고 사장에서 활쏘기경기를 했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된 후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1366년 친필로 영호루 3자가 쓰인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했다. 어필을 하사받은 안동판관 신자전이 1367년에 강 가까이로 이건해 누각을 크게 중건했다고 한다.

이후 영호루는 여러 차례 중건과 개축을 겪게 된다. 1488년(성종 19년) 부사 김질이 중수, 1547년(명종 2년) 홍수로 유실돼 5년 뒤인 1552년 부사 안한준이 복원, 1605년 유실로 74년 후인 1676년(숙종 2년) 부사 맹주서가 복원, 1775년(영조 51년) 홍수로 유실돼 13년 후인 1788년 부사 신익빈이 복원, 1792년(정조 16년) 홍수로 유실돼 4년 후인 1796년 부사 이집두가 복원했다.

1934년 대홍수로 영호루, 다섯 번째 유실 겪어

▲ 영호루 유실 당시의 폐허 모습. 유실 1년 후인 1935년 7월23일 구 영호루 자리에서 1천여 명의 읍민이 모여 익사한 수십명의 추도식을 가진다.

근대 들어 1934년(갑술년) 7월23일 대홍수가 발생해 영호루는 다섯 번째로 유실을 겪는다. 동아일보 7월27일자 기사에 따르면 “7월23일 오후 3시경 홍수로 인해 낙동강 상류 안동읍 앞에 있는 제방이 결궤되어 시내는 전멸 상태이다. 교통은 사방이 두절되고 영호루는 유실되어 버렸는데 누상에 피난했던 백여 명은 행방불명되어 안부가 절망적이다. 25일까지 판명된 피해는 도궤가옥이 850호, 침수가옥이 1371호, 피난수용자는 3500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29일자 동아일보에는 한 개 지면을 할애해 홍수피해 참상을 화보로 게재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8월12일자 기사에서는 “천여 년 사적인 영호루가 불시에 유실된 것이 아깝고 주민들이 쓸쓸한 회포를 느끼고 있어 관계당국과 유지들이 협의해 원상태로 재건하기로 하여 건축기술자를 물색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의 재건 소식은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고, 어떤 이유로 재건 움직임은 중단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년이 지난 1935년 7월23일에는 수재기념제(水災記念祭)가 열렸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이어진다. “오후 3시에는 안동보교(安東普校)에 3백여 명이 회합해 수재기념제를 했고, 오후 5시부터 수해 당시에 익사한 수십 명 망령의 추도식을 감회 깊은 구 영호루 자리에서 읍민 1천여 명이 참석해 가장 성대히 거행했다.”고 전하고 있다.

1970년 정하동 이건 이유는 ‘홍수’컴플렉스 작용한 듯

▲ 영호루 옛터에서 바라보이는 안동 낙동강 철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는 대홍수가 발생한 1934년 이후인 1942년 직전에 개통된 것으로 보인다.


35년이 지난 1969년에 12월에 안동지역에서 ‘영호루중건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 1970년 11월 김각현 안동시장 시절 국·시비에 시민성금을 보태 옛터에서 강 건너 정하동 언덕에 중건이 되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친필 편액이 게첨되기도 했다.

한편 1992년 9월에는 시의회와 안동문화원이 옛 부지에 영호루유허비를 세워 영호루의 원래 자취를 표시해 놓은 상태이다. 유허비 위치는 안동 시가의 남쪽, 중앙선 철교와 강변도로 교차 지점에서 서쪽으로 100여 미터 지점 우측도로 옆 언덕인 태화소공원 내에 있다.

그런데 70년 당시 왜 정하동 현 위치로 이건복원(移建復元)을 했는가 이다. 몇몇 증언을 토대로 살펴보면, 먼저 ‘홍수로 인한 유실을 걱정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으로 안동지역 시내에 물난리가 났었다. 예를 들어 안동고등학교 교사 절반이 물에 잠기고 허물어졌을 정도다. 이후 안동댐과 임하댐이 생겨 홍수로 인한 유실 걱정이 없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하나는 1942년 경 개통된 중앙선 철도 때문으로 옛 위치에 복원을 포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자리 바로 위쪽으로 ‘강을 가르는 철교’가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몇몇 인사들은 “큰 논쟁 없이 정하동 언덕으로 옮겨 복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하고 있다.

선현들, ‘영호루 중수는 옛법을 중단하지 않는다’ 정신 고수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선현들은 왜 영호루의 중수와 복원을 거듭했던가? 이다. 홍건적의 외침으로 고려 공민왕은 안동으로 몽진을 왔었고 그로 인한 임시수도로서의 위상과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는 수단이 되었다는 점이 먼저 눈에 띈다. 지역 속에 유독 공민왕과 연관된 신앙과 전설이 많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복주(福州)라는 옛 지명이 안동(安東)으로 승격된 의미를 확인하고 지속시키는 상징건축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고려, 조선시대의 문사(文士)와 걸인(傑人)을 포함해 중앙고위관료들이 시문 게판의 권리와 누각이용의 특혜를 누린 만큼 이들에 의해 복원과 중수가 이어졌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 또한 선현이 남긴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의식이 투철했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할 것 같다. 이는 선현들이 수차례의 복원 과정에서 남긴 기문(記文)을 보면 그 정신을 알 수 있다. 조선 성종 때 성리학자인 김종직이 남긴 기문에서 “이 누는 편안히 놀기 위한 것이 아니며 후세의 이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옛법을 떨어뜨리지 않는 데에 그친 것이겠는가.” 라고 썼다. 영호루의 중수는 옛법을 중단하지 않으려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조선 정조 때 문신으로 안동부사를 지낸 신익빈은 중수기(重修記)에서 “영호루는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이 누대의 흥성과 폐해짐은 실제로 한 고을의 성쇠와 연관되어 있으니, 어찌 다만 경치만 빼어날 것인가. 천년 동안 내려온 옛 자취를 잡초 속에 매몰시키지 않고, 한 고을의 이름난 경치를 거듭 새롭게 하려는 것뿐이다.” 라고 기문을 썼다.

어느 위치이든 영호루 복원, 안동시가지 랜드마크 되어야

결국 영호루의 복원 위치를 둘러싼 2개의 상이한 시각이 충돌한다 해도 ‘복원’에는 공통적인 전제들이 이미 내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월이 흘렀고 자연경관 또한 변천이 많았기 때문에 서로 간에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도시경관의 바탕위에서 상호 위치를 둘러싼 논의와 논쟁은 중론을 거쳐야 하겠지만, 규모와 양식은 옛것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점은 동일해진다.

2011년 7월 손광영 시의원은 천리 소하천정비공사 시행 시 설계용역에 영호루 복원을 함께 검토할 것을 건의했고, 2013년 10월에 열린 ‘안동지역 수상·수변공간 활용방안’ 정책토론에서 권기창 교수는 수변공간 개발방안의 하나로 “시내 인근 낙동강변에 역사문화유적을 복원하고 이를 배울 수 있는 영호루 복원과 철교카페 등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몇 문화계 인사들은 “전통건축물을 복원하고 재현시키는 사업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안동시 동부동 옛 관아를 복원한 영가헌(동헌)과 대동루(문루)가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가에 강력한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지금의 정하동 언덕에 세워진 영호루를 목조로 개축하면서 이 일대를 새로 정비해 새로운 명소로 탈바꿈시키는 방안이 더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전통사회에서의 누의 활용과 의미가 있었듯이 향후 영호루의 복원은 미래지향적 관점을 획득하는 동시에 관리대책이 철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복원과 중수 과정을 거치며 선현들은 ‘산천과의 조화’, ‘주변경관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구지(1934년 이전 옛터)든, 현지(1970년 현재 터)든 역사적, 문화적, 건축 및 경관의 측면에서 골고루 검토돼야 할 것이다. 또한 문화라는 측면에서 문학생산과 예술활동의 무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계획이 뒷받침 될 때만이 복원의 의미가 더 가미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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