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사회의 거울이다'
'학교는 사회의 거울이다'
  • 김희철(안동청년유도회 부회장)
  • 승인 2014.11.0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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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통해본 한국교육
[경북인칼럼] (김희철 안동청년유도회 부회장)

▲김희철(안동청년유도회 부회장)
우리나라 교육을 바라보는 각계 지식인들의 진단은 엇갈린다. 경쟁사회에 적합한 인물을 길러내는데는 한국형 교육이 주목받는 반면 전인적인 교양인을 양성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세계 자살률 1위인 나라. 노인,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 연일 왕따 문제, 성적 문제, 학교폭력 문제 등으로 만신창이 되고 있는 학교현장은 이러한 우리사회 현 주소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학이(學而) 제1편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하는 논어를 통해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며 현재 학교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부족한 견해를 말해본다.

얼마 전 모 시민단체에서는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순 줄 세우기’ 등 도를 넘은 경쟁교육 실태를 조사 발표한 바 있다. 전국 주요도시를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 대구지역 모 초등학교 3학년 학급에서는 정기시험 성적에 따라 급식 순서를 정하여 1등하는 아이는 점심도 먼저 먹고 꼴등하는 아이는 밥 먹는 순서도 꼴등으로 먹게 했다는 것이다. 학교를 서열화하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 하는 이 같은 행태는 비단 이 학교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번 조사의 요지다.

부산의 모 초등학교는 점심시간 전에 시험을 친 뒤 문제를 풀지 못한 아이는 맨 나중에 밥을 먹도록 하는가 하면, 경기도 모 고등학교는 전교 50등까지만 들어갈 수 있는 유리박스 자습실을 만들고 자리도 성적순으로 배열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유부남’(유리부스에 들어가는 남자), 혹은 ‘유부녀’라 부르기까지 한다. 광주의 경우 일제고사 결과를 성적순에 따라 일간지 신문에 학교이름을 게재하는 방법으로 학교를 서열화 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등 그 백태는 놀라울 정도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인본적 가치와 철학을 중시하고 많은 명현 석학을 자랑하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도 예외는 아니다. 발표에 따르면 안동을 비롯한 광주, 마산 등 7개 남부지역 거의 모든 학교에서 이와 같은 성적 줄 세우기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할 아이들이 생활하는 학교 현장이 어쩌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학교를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라 말한다. 앞으로 사회를 책임져야 할 미래 인재들의 배움터이기에 당연한 말이겠지만 한 측면에서 보면 현대사회의 단면이 그대로 투영된 곳이라는 이야기기도 하다. 즉 이 사회가 어떠한 사회인지 직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 현장이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학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점수를 따기위해 다른 친구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장난친 아이를 일러 벌점을 받게 한다. 자신의 성적이 전체 아이들에게 공개되고 열등한 아이는 밥 먹는 순서도 꼴찌가 되는 학교 현장. 해맑고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넘쳐야 할 학교는 그릇된 경쟁 분위기로 삭막해져 가고 올바른 인성을 가르쳐야 할 선생님은 서열화에 앞장서는 현실이 지금 우리 아이들이 생활하는 학교라는 지적이다.

어쩜 부모들이 살고 있는 우리 사회와 이렇게 닮았을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 공동의 가치와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인 사회, 평범한 대다수 서민보다 출세한 소수가 주도하는 사회,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은 절망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회로 인식되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복지 문제를 이익분배의 문제로 접근하는 시각, 군의 폐쇄성과 문란, 위정자들의 도를 넘는 도덕적 해이 등 한국사회의 시급한 현안들은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늘 학교 폭력문제나 청소년 자살 문제가 나오면 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그러나 그때마다 대충 넘어가는 입바른 소리로만 들리는 것은 왜일까? 아이들은 이 사회가 어떠한 사회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아무리 학교에서 인성을 강조해도 아이들의 눈에는 순진해 보일뿐이다. 왜냐면 이 사회가 어떠한 사람을 요구하는지 아이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존재만으로 큰 버팀목이었던 가정에서의 아버지는 지금 아무리 자상해도 아이들 눈에는 적자생존의 냉혹한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열등부모일 뿐 더 이상의 가르침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경제적 환경이 좋은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여력이 없는 집 아이들은 학습환경도 열악하다. 어려서부터 비정상적 경쟁사회에 노출된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난과 열등 유전자를 원망하고 배타적인 사회를 원망한다. 한국사회가 걸어온 악순환의 고리가 학교 현장에 고스란히 비춰지고 있음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사회를 어떠한 사회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70, 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됐던 사회의 그늘은 우리에게 우리 사회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으며 구성원들이 어떠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지 자문할 만큼 충격을 주었다. 75년 김대두사건, 94년 온보현, 지존파사건, 96년 막가파사건, 2003년 유영철사건, 2004년 정남규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극악무도한 사건들의 공통점은 성공과 출세주의가 극에 달하고 졸부들이 판치던 시기, 사람을 경쟁으로 내몰고 인권이 없던시기, 인간의 자존감은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불우한 환경에서 허덕이던 산업화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는 점과 그 학교에서 어린나이에 이미 실패한 아이로 성장했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 외제차 타는 돈 많은 사람과 사회에서 우월한 사람을 범행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과연 그들의 마음속은 어떠한 상태였을까.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극악한 심성을 갖고 태어났을까. 과연 이들을 강력한 법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많은 의문을 가지며 성적으로 줄 세우기 하고 아이들을 서로 극한으로 경쟁시키는 교육의 결과가 앞으로 어떻게 나타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 느리고 착한 아이가 단지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점심 먹는 순서에서 배제된다면 그 아이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마음이 생겨나며 어떠한 사람으로 성장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물론 국제사회는 긴박하고 현대사회는 너무나 복잡 다양하다. 점차 인간다운 인간을 가르쳐야할지 아니면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야 할지도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원칙을 점검하고 근본을 살펴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지금처럼 중원의 패권을 두고 각 제후국들이 죽이고 죽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있었다. 극한의 경쟁을 통해 군주의 욕심을 채우는 사이 중국 백성들은 굶주림과 생사의 현장으로 내몰려야 했다. 적어도 당시를 살았던 공자의 눈에는 마땅히 인간이 갖추어야할 도(道)는 하, 은, 주 이후 사라진지 오래. 고전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생각은 끊임없이 위정자들의 생각을 지적하고 덕(德)을 회복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공부라는 것은 성공의 수단, 혹은 경쟁에서 이기는 수단은 아니었다. “제자, 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 이친인. 행유여력, 즉 이 학문”(弟子 入則孝 出則悌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 以學文)이라하여 “공부하는사람은 집에들면 부모에 효도하고 나가면 웃어른께 공손하고 믿음을 주며 널리 대중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해야한다. 배움이란 이러한 일을 스스로 충실히 실천하고 남은 여력이 있은 다음에야 하는 것”이라 말하며 더불어 배움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에게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덕을 쌓기 위함이며 이것 역시 고르게 배부르게 한 이후에 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미 백성들이 많다면 여기에 무엇을 더해야합니까”라는 염유의 물음에 공자는 “그들을 고루 부유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미 부유해 졌다면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또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는 공자의 말을 보면 교육 이전에 어떠한 사회가 형성되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경쟁만을 강조하는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그늘에서 전지른 범죄에는 작은 죄책감도 찾을 수 없다.

논어 위정 2편에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而德, 齊之而禮, 有恥且格)라 공자는 말한다. 범죄가 극성일 때 위정자들이 형벌로 바로잡으려 한다면 벌을 받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면 도덕적 감화력으로 인도하고 예절을 가르친다면 그들은 벌을 받지 않아도 부끄러워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고 가르친다. 됨됨이 교육이 사실상 불가능한 우리 사회를 보면 공자의 말은 갈길이 멀어 보인다. 하지만 가치 혼란의 시기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고전의 큰 가르침을 한번쯤 새길 만하다. 분명한것은 사회문제와 교육문제가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는 사회를 복지제도를 통해 안정시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사회 안정망을 시급히 가동해야한다. 사회 기부를 늘리고 사회적 공동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한편 부자세 감면문제와 현재의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며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과 가능성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마련에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는 성적보다 잘할 수 있은 것을 찾도록 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간다면 아이들의 마음은 보다 따뜻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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